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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Mar 26. 2024

죽은 개를 기억하다_(5)

한비_3

나와 동생 그리고 아버지가 한비를 산책시키는 건

가끔 시간이 날 때 뿐이었다. 부정기적이었다는 뜻.

"개는 정기적으로 산책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어떤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비가 우리와 함께 산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

저녁을 먹고 한비 목에 줄을 채운 후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처음 바깥으로 나갔을 때만 해도 낯선 풍경에 덜덜 떨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활기차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는 모습이 귀엽고 기특했던 탓에

이번엔 활동 반경을 좀 더 넓혀 보기로 했다. 

그게 문제였다.


두려움은 약해지고 호기심이 강해지는 시기에 돌입한 한비는

전에 없이 기운 찬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목줄을 잡은 손에 제법 힘을 줘야 할 정도로 녀석이 자랐다는 생각에

나는 혼자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아마 쥐를 봐서 그랬을 것이다, 이 녀석이 갑자기 펄쩍 뛰었다.

그와 함께, 답답할까봐 조금 느근하게 묶어놨던 목줄이 빠졌다. 

쫓으려던 것을 놓친 한비는 

땅에 떨어진 목줄과 나를 돌아봤다.

나는 땅에 떨어진 목줄과 한비를 번갈아 쳐다 봤다.

난 분명히 봤다. 한비가 잠시 웃는 것을.


한비는 골목길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 끝에 큰 길이 나오고, 그래서 차가 많이 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한비를 부르며 달렸다. 

운동화를 신지 않고 슬리퍼를 신었던 게 너무나 후회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한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상태로 한비는 왕복 2차선 차도를 건너고 어두워진 시장을 가로 질러 

왕복 6차선 차도에 이르렀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한비가 줄곧 달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잠시 킁킁거리며 뭔가를 관찰하기도 했고

오줌을 싸며 영역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내가 다가서면 힐끗 바라보고 저 앞으로 도망갔다.

이름을 부르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버린 터라

더 이상 "이리 와"라든지 "한비야" 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처음엔 걱정으로 가득 찼던 내 마음에

그쯤부터 뜨거운 분노가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잡히기만 하면 그냥...

언젠가 유튜브에서 

"목줄이 풀린 개를 붙잡으려거든 개와 반대 방향으로 뛰어야 한다"는 내용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을 보고 반사적으로 떠올랐던 게 바로 그날의 한비, 그 얄미운 뒷모습이었다. 


한비는 결국 그 넓은 왕복 6차선 도로를 혼자 건넜다.

그나마 다행히도 퇴근 시간을 지난 시점이기에 차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 건너편은 골목이 더 많은 동네였던 터라

저 녀석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주 작은 구원자였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있던 초1 정도 돼 보이는 남자 아이가 한비를 보더니

"어, 강아지!"라고 크게 외치더니 자전거에서 뛰어내린 후

곧바로 한비에게 뛰어가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제멋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한비는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꼬마는 한비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면 "너 진짜 귀엽다"며 웃고 있었고

나는 얼른 뛰어가 "꼬마야, 고마워"라 말하며 한비의 목덜미를 잡았다.


한비와 꼬마가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둘다 놀란 눈이었다.

"얘가 도망쳐서 잡으러 다닌 거야. 고마워. 이제 데리고 갈게."

라고 인사를 하며 한비를 품에 안고 엉덩이를 때렸다.

물론 한 대만 때린 건 아니었다.

"야이 똥개야!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등의 말을 하며

서너 대는 때렸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꼬마가 날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저씨, 강아지 왜 때려요! 귀여운데 왜 때려요!"

밖에 나온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은 시점인 터라

게다가 집에 연락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던 터라 

나는 얼른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얘가 도망가서 그랬다니까. 지금 혼내야 말을 듣지!

야, 그리고 나 고등학생이야. 알았어?"


마침 파란불로 바뀐 횡단보도를, 나는 한비를 껴안고 냅다 달렸다.

꼬마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고 

품 속의 한비는 다시 웃는 얼굴이 돼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해 한 시간 반 남짓 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는 "그래도 우리 한비가 영리하게 사고를 안 당했으니 다행"이라며

한비를 쓰다듬어주셨다. 


그 이후로 나보다는 아버지와 동생이 한비를 데리고 나가는 빈도가 높아졌지만

그리고 2년 후, 우리집 남자 모두가 아침 저녁으로 한비를 앞세우고 대문을 나서야 했다.

한비에게 문제가 생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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