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 남자들은 통상적으로 글씨를 썩 잘 쓴다고 보기 어렵다. 내용이 중요하지 모양이 중요하냐~라는 생각으로 학창시절을 살게 된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글씨 따라쓰기 수업은 교과서의 신명조체 처럼 천천히, 마치 서예를 쓰듯 글자를 틀에 맞춰 쓰는 교육을 하게 되고 결국 긴 흐름의 글을 쓰기위한 물리적 의미의 근육을 키우는 교육은 최소한 나는 제도권 교육에서 받은 기억이 없다. 아니면 내가 교육을 받은 걸 까먹었다던가. 내 인생의 회고는 차치하고 긴 글을 쓸 때 손이 아프고 모양이 형편 없어서 내가 찾은 몇 가지 방법은 아래와 같았다. 1)좋은 펜을 찾을 것, 2) 1)의 펜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할 것, 3)펜글씨 교본을 사서 연습할 것. 물론 나도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위 방법들은 의뢰로 수확이 좋았다. 여러 펜을 찾을 떄에는 부가적으로 몇 가지 기준이 새로 생겼다. 너무 미끄러지는 필감의 펜은 오히려 악필에게 좋지 않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쓰는 제트 스트림은 아직도 악필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적당한 마찰력이 있어야 종이가 펜을 잡아줘서 휘청휘청 하면서 글씨가 날아가는 일이 적어진다. 또한 너무 가는 펜 보다는 적당히 두꺼워야지 글씨가 희멀건하게 보이지 않고 획의 끝의 손 떨림으로 생기는 날림 같은 경우도 적어서 그나마 보기가 좋다. 악필들은 글 쓰는 근육이 비정상적이어서 글을 크게 못 쓰는 증상이 있곤 하는데 굵은 펜을 쓰면 어떻게든 글을 좀 큼지막하게 쓰게 되므로 가독성이 조금 좋아지는 효과도 있다. 시중의 펜 중에서는 사라사 0.7이 나에게 제일 적당했다.
펜을 찾다보면 필연적으로 만년필에 한 번쯤은 발을 담그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10-20만원 정도선 까지 실사용 만년필 위주로도 구입해서 보았는데 결국 남는 것은 라미 사파리였다. 그 장점의 첫 째는 삼각형 펜대였고 두번째는 교환형 펜촉이었다. 악필들은 그 대부분의 파지법이 굉장히 힘이 많이 들어가고 불필요한 힘을 줘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시중에서 본 펜글씨 교본과 더불어 새로 잡고 글씨 쓰는 법을 20대 지나서 다시 해 볼 때 사파리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자기 파지법이 확고한 사람은 오히려 삼각펜대를 싫어하긴 하는데 모든 과거를 포기하고 새로 글쓰기에 들어가는 악필들은 파지법을 가이드해주는 사파리가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또한 악필들이 비싼 펜 사고 쓴다고 호들갑 떨어봤자 떨어뜨리면 바스라지는 만년필 펜촉은 그다지 실용적이고 사무적이지도 않다. 단단한 스틸닙이 내 경험에는 좋았다. 굉장히 펜을 많이 쓰고 떨어뜨리기도 해서 간간히 촉이 고장나서 촉만 교체해가며 쓰고 있다. 위의 굵은 펜이 악필에게 좋은 점을 미루어 예전에는 M닙 사서 큼직큼직하게 글씨를 쓰다가 몇 년 전부터는 아예 1.1 닙으로 바꾸어서 쓰고 있다. 1.1닙이 가로획과 세로획의 두께가 다르게 형성되므로 글씨를 잘 써보이는 착시가 생긴다. 이보다 비싼 만년필을 사두거나 선물 받은건 몇 개 더 있지만 실사용으론 쓰지 못하고 그냥 장식품으로 책상에 둔 꼴이 되버렸다.
마흔이 다 되어가서 내가 자화자찬 하는 일이 바로 이 악필을 내 손으로 극복했다는 점이다. 달필들이 보면 굉장히 우습겠지만, 사람 꼴도 아닌 악필에서, 이제 그냥 일반 평균 사람들의 글씨 정도까지 올라온 것으로도 나는 20대에 내가 이룩한 소소한 업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디지털 시대가 되어도 아직도 종이는 남아있을 것이다. 예전에 본 일본 유머글에 젓가락질에 대한 부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왜 젓가락질을 잘 해야 하냐는 아들의 물음에 아버지는 대략 이런 식으로 가르쳐 준 것 같다.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하면 거기서부터 남에게 첫 인상부터 얕보이게 된다. 고작 그런 일로부터 얕보이느니 젓가락질은 잘 해둬야 한다.’ 글씨 쓰기도 그렇다. 못써서 욕먹느니 잘쓰는게 백 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