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는 의지는 미래를 바라보는 창이다.
-노만 커진스(Norman Cousins)-
50에는 체면을 버리고 남에게 도움 요청도 해야 하는 시기다. 필요할 때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아프다’, ‘힘들다’, ‘도와줘!’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혼란스럽고 힘들 때 도움 요청을 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아플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선뜻 요청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못나 보이고 괜히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해버린다. 참고 견디거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혼자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 가족이나 친구, 회사 동료 등에게 도움 요청 신호를 보내지만, 예사로 여기고 반응을 해주지 않아 포기하기도 한다. 때를 놓쳐 몸과 마음에 심각한 증상들이 나타난다.
보건복지부의 「2021 정신건강 실태조사」의 결과를 보면, 지난 1년간 우울, 불안 등 정신 건강 문제를 경험한 비율은 8.5%로 약 355만 명으로 추산됐다. 이들 중에서 7.2%(약 26만 명)만이 전문가의 상담이나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에게 적극적 도움 요청하는 비율이 낮음을 보여준다.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당사자는 고통스러운 증상을 벗어나기 위해 혼자 애를 쓴다. 그럴수록 그 증상을 초래한 근본 문제는 보지 못하고 오히려 증상에 매달려 씨름하고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신을 고통에 빠뜨린 대상에게 향하던 분노와 적개심의 화염이 거꾸로 자신을 향하게 된다. 상처의 늪에 빠져 애를 쓸수록 늪에 점점 빠진다는 것을 모른다.
50에는 자신이 처한 상태를 가족과 아는 사람들에게 광고하듯이 알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면 누군가가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더라도 섣부르게 선택하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솔깃한 이야기를 하면 ‘훅’하고 빠질 수 있다. 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올가미가 될 수도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혼자 결정하지 말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많이 듣고 결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왜 자신이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 근본적인 대처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증상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봐야 한다. 이런 조언을 하는 나도 40대에 심각한 스트레스 증상에 빠져 허우적대던 경험이 있다. 몸과 마음이 아파서 ‘살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까지 편하게 했다.
처음에는 가족이나 친구,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고, 무기력하게 당했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픈 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내 처지를 대신해서 시원하게 응징해줄 사람도 없다는 절망감도 있었다. 내 사정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참아라’라고 하는 사람들의 어설픈 조언을 듣기 싫었다. 혼자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패기로 증상을 쫓아다니다가 탈진 상태에 빠졌다. 그때서야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도움 요청을 했다. ‘내가 그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움을 요청할걸!’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얄팍한 자존심이 나를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심리 치유 기법에서 강조하는 것은 경험을 회피하지 말고 ‘기꺼이 경험하라’이다. 지금 당장 불쾌하고 괴롭다고 숨고 감추고 회피하면 문제를 더 키운다. 혼자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져 상황을 좀 더 넓게 크게 보지 못한다.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힘들고 빠져나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는 SOS를 보내야 한다. 살겠다는 간절함을 가슴에 품고 내 안의 자존심과 창피함을 직면하면 도움 요청을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고 배포가 있는 사람이다. 진정한 용기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도움을 요청하는 행동이다. 도움을 요청하면 손을 꼭 잡고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난다.
아프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말을 해야 배우자나 가족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다. 주변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착각이다.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으면 누구도 자신을 모른다. 자신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드러낼 줄도 모른다. 내 몸과 마음에 주렁주렁 매달린 스트레스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 마음 수행하면서 심리학과 인연을 맺은 지 20년이 되어간다. 심리 상담을 하면서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지금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남 일 같지 않게 받아들인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힘들다는 것을 모두 털어놓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라는 안타까움도 올라온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심리적인 외상(外傷)이나 스트레스 상태에 빠져 힘들 때 치유에 적극적으로 도움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여성보다 남성들이 자기 문제를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경향이 더 많다. 남성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 정치나 경제 사회문제에 더 열을 내고 목소리를 높이곤 한다. 남성들은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배우자에게 가족에게 털어놓는 방법을 모른다. 남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자신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약한 탓이며 창피해서 남에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는 과정에서 문제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문제 해결을 위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50이 되면 이것저것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이 기대한 그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람은 누구나 괴로움 한 가지는 가지고 있다. 세상이 살만하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옆에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한 번쯤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다. 따뜻하고 친절하게 ‘힘드냐?’라고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자신의 입으로 도와 달라고 하지 않는 데 먼저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하는 건 오지랖일 뿐이다. 필자인 내 주변 사람들이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오지랖 넓다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나는 ‘요즘 힘든 게 있나요?’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Tip! 도움 요청을 위한 자기 상태 점검)
○ 자신의 상태를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몸의 증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증상이 있는지 글로 적는다.
○ 자신의 스트레스 상황을 글로 적는다. 자신이 어떤 스트레스 자극을 받고 있는지 글로 적는다.(누가, 무엇이, 왜,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 자신의 스트레스 자극을 확인하고 지금 자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글로 적는다. 어떤 생각이 올라오는지 생각나는 그대로 적는다. 몸에 어느 부위에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지 이름을 붙이고 글로 적는다. 감정이 올라오면 어떤 감정인지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글로 적는다. 지나간 기억 심상이 올라오면 영화를 감상하듯이 있는 그대로 글로 적는다. 충동이나 갈망, 욕구가 올라오면 충동과 갈망과 욕구에 이름을 붙이고 글로 적는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숙고해보고 글로 적는다. 이런 작업을 쉬지 않고 20분 이상을 계속한다.
○ 자신이 도움을 받을 부분은 무엇인지 글로 적는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있는지 글로 적는다. 자신의 상태를 마음속으로 정리해보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인식할 수 있다. 하루에 2~3회, 3일간 반복해본다.
○ 가까운 가족에게 먼저 털어놓는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친구와 직장동료에게 털어놓는다. 전문가를 찾아가서 치료와 상담을 받는다. 전문가는 몇 군데를 탐색해보는 것이 좋다. 자신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전문가를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