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즈쭈꾸미 Oct 14. 2024

나의 커피 연대기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본관과 후관 사이 정원이었다. 커피 자판기를 처음 봤을 때 고등학생은 커피를 먹어도 된다는 것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아침 7시에 등교해 밤 11시, 12시에 집에 가던 시절, 커피는 잠깐의 산책과 함께 즐기는 낭만이었다. 단짝 친구와 자판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달한 밀크커피를 뽑아 먹던 순간은 그 시절 유일하게 분위기 있는 순간이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유명 커피 체인인 스타벅스에 처음 갔을 때 커피보다 ‘의자’가 더 인상적이었다. 이 당시 유행하던 다른 카페는 푹신한 소파가 매력이었는데 이 뻔뻔한 곳은 커피도 비싸면서 의자도 딱딱해서 ‘뭐지 빨리 가라는 건가?’라는 불만을 갖게 했다. 반면 캠퍼스의 낭만은 자판기 커피 가격에도 있었다. 학교 자판기에 100원만 넣으면 나오는 밀크커피와 잔디밭의 낭만은 우리를 강의실 밖으로 꺼내주었다.



첫 직장에 취업했을 때, 회사 건물 1층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대학생 시절 처음 방문했을 때 충격적이던 커피 값은 더 이상 그렇게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에 4천 원은 저렴한 가격은 아니어도 못 낼 만큼은 아니었다. 스벅 로고가 그려진 무게감 있는 흰색 머그잔 속 달달한 시럽이 올려진 카라멜 마끼아또는 내일 다시 출근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으며 사회 초년생의 쓰린 속을 달래주는 마법이었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고시를 시작했을 때, 커피는 다시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이 됐다.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만 광고할 수 있다던 맥심 커피 믹스는 100개짜리 박스로 사도 한 달 정도밖에 가지 않았다. 하도 먹다 보니 노란 박스도 사고 빨간 박스도 사서 섞어 먹기도 했다. 가끔은 소중한 나를 위해 새로 나온 아라비아타(?) 원두로 만든 믹스를 먹기도 했다. 티비에서 연예인들이 라면이나 생수를 브랜드별로 맞추는 프로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 시절 나도 커피믹스를 브랜드별로 다 맞출 수 있는 초능력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달디단 커피를 버리고 아메리카노로 전향했다. 도대체 저렇게 단 커피를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다. 커피란 자고로 쓴 맛이 지를 외치며 아메리카노는 최애 커피에 등극했다. 이 무렵 아메리카노는 우리 모두의 취향이 됨과 동시에 가격도 많이 저렴해졌다. 각종 프랜차이즈 커피 체인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기억이 나질 않는 어느 순간부터 나는 라테파가 됐다. 가끔 남편은 그 텁텁한 걸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 잘 모르겠지만 라테의 묵직하고 씁쓸한 맛이 좋다. 최근 알레르기성 피부 질환으로 피부과 약을 먹으며 약 먹기 전 1시간 이내로는 우유를 먹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듣고 매우 괴롭다. 인생의 낙의 절반은 식후 라테인데... 약을 먹어야 하니 우유가 든 라테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코로나시기를 거치며 에스프레소 머신을 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커피 머신을 우연히 샀는데 코로나가 왔다. 코로나시기에 내가 제일 잘한 건 에스프레소 머신을 산거다. 신축아파트로 이사하며 불편한 점 중 하나는 근처에 카페도 없고 교통도 좋지 않아 라테 먹기가 녹록지 않다는 점이었다. 괴로워하던 내게 커피도 먹지 않는 남편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선물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왔다.



코로나 암흑의 시절 ‘카페니’로 불리는 우리 집 커피 머신은 여러모로 1등 공신이었다. 하루에 몇 잔이고 씽씽 잘 뽑아내는 덕에 맛으로 커피를 먹는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커피 부흥기는 위장염의 재발로 막을 내리고 있다. 최근 한 달 동안 이어진 위장염으로 커피를 한 달이나 끊었다. 열일곱 처음 커피를 마신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술도 아니고 커피 정도도 못 버티는 몸이 야속하지만 커피와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



돌아보건대 커피와 함께 하며 커피에 열광하는 동안 그 안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서늘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같이 산책하던 여고시절 지영이, 대학로에 처음 같이 간 베프 지혜,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서로 사주던 대학 동기들, 회사 1층 스벅에서 같이 울어준 직장 동료 은혜, 커피믹스를 다양한 맛으로 사서 나눠 먹던 고시촌 친구들 그리고 커피를 먹지도 않으면서 굳이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자던 남편을 생각하니 심지어 커피를 혼자 먹던 시간조차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커피의 낭만을 씁쓸함에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 문득 커피의 낭만은 그 시절을 함께한 사람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달달한 마음이 든다.



마흔, 소중했던 사람들은 추억하게 되는 나이다.




이전 03화 판피린과 외할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