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외가로부터 내려오는 명약이 있다. 우리 외할머니가 아플 때 자주 드셨고, 우리 둘째 이모의 시누이 되시는 분은 앵무새가 죽어가던 때 이 약을 숟가락으로 조금 먹였더니 살아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세련된 셋째 외숙모도 자주 드시고 새침하고 예쁜 내 외사촌 S양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이 명약은 바로 판피린이다.
어렸을 적 엄마가 판피린을 먹으면 엄마에게 중독이라며 그만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약 남용이라고 툴툴거렸다. 그 시절 엄마 나이가 된 나는 이제 판피린을 매우 즐겨 먹는다. 머리가 아파도 먹고, 목이 아파도 먹고, 감기가 걸려도 먹는다.
이를 걱정한 남편이 약국에서 물었다.
"판피린을 자주 먹어도 되나요?"
약사님이 말했다.
"주로 할머니가 키워주신 분들이 자주 이약을 찾으시는데, 카페인이 많은 편이니 늦은 시간에는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 나는 진짜 빵 터져버렸다. 외할머니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나를 자주 돌봐주셨다. 발이 넓고 활달한 할머니는 늘 내 손을 잡고 돌아다니셨다. 오죽하면 이종사촌 언니는 할머니를 와쭈네 할머니라고 불렀다. 언니와 나는 똑같이 할머니의 외손녀였는데 말이다.
할머니는 내가 20대 후반이던 어느 날 돌아가셨다. 그날 엄마는 할머니의 부고를 아침에 아셨는데도 내게 저녁에 알리셨다. 그날 나는 중요한 시험이 있었고, 엄마는 혹시 그 소식이 딸의 마음에 짐이 될까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야 부고를 알리셨다.
할머니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내가 어리고 건강할 때 아픈 곳이 많아 자주 이 약을 먹던 우리 엄마,
그리고 병원 한 번 안 가던 나도 이제 이 약을 찾는다.
이제 나는 그녀들이 그 약을 먹던 시간을 산다.
그녀들이 살던 시간을 살며, 그 약이 왜 필요했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나이가 먹는다는 건 애매하게 아픈 곳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병원 가기 애매하게 목이 아프고, 두통이 올 때 그녀들은 그 약을 먹었다. 나도 그러하다. 나는 딸이 없어 이런 나를 타박하는 이는 어린 딸이 아니라 남편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이 살던 시간에 이르러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 쌍화탕을 인터넷에서 사 먹을 수 있다. 엄마와 나는 겨울이면 쌍화탕은 백 개 정도 사서 나눈다. 한겨울 목이 아플 때 함께 해주는 쌍화탕,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에 추억으로 남으려나.
할머니 보고 싶어요.
할머니에게 제 남자친구를 소개해드리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어요. 그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말고 같이 만날 걸 하는 후회가 들었어요. 할머니가 정말 좋아해 주셨을 텐데. 그땐 할머니가 더 오래 함께해 주실 줄 알고 기회가 많을 줄 알았어요. 그때 그 남자친구와 결혼해서 11년째 잘 살고 있어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행복해요.
할머니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지금도 판피린을 보면 늘 할머니가 떠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