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기도에서 나고 자랐다. 친가 친척들은 모두 차로 1시간 거리 이내에 살았고 외가는 서울이었지만 멀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집 명절 풍경은 심플했다. 명절 전날 오후에 모여 음식을 하고, 저녁이 되면 각자 집에 가서 잤다. 다음날 오전 일찍 차례를 지내고 아침 식사 후 10시 반 전에 각자의 외갓집으로 떠났다.
가끔 윷놀이가 더해지는 설날에는 조금 늦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외가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티비에 나오는 귀성 행렬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명절은 그냥 좀 긴 휴일에 불과했으며 특별할 것이 없었다. 결혼 후 나는 티비 속 행렬에 완벽히 참여하게 됐다. 남편의 고향은 목포였다. 신혼 후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서울, 명절이면 우리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끝에서 끝으로 고향길에 나섰다.
안 막혀도 5시간 반 막히면 장담할 수 없는 그 거리는 정말 엄청났다. 결혼하고 첫 번째 명절 시댁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녹초가 됐다. 명절이 이렇게 힘든 건지는 티비 속 행렬에 참여해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두 번째 명절 조금 더 똑똑해진 우리는 새벽 4시에 길을 나섰다. 해도 뜨지 않은 그 시간, 도로는 차로 가득했다. 나는 진정 결혼 전에는 알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차가 얼마나 많은지...
고향길에 나서는 남편의 모습도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 여유롭고 느긋한 편인 그는 왠지 초조해 보였고 동작도 매우 빨라졌다. 막히는 차량 탓에 일찍 출발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를 재촉했다. 미리 준비한 명절 선물이 있음에도 부모님께 딱히 유용할 것 같지도 않은 물건들을 가져가자고 하기도 했다. 남편에게 고향은 두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가야 하는 곳처럼 보였다.
선물은 새로 사야 한다고 믿던 나는 그런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자꾸 쓰던 물건, 안 쓰는 물건을 가져가려고 하는 걸까?' 아마 좋고 비싼 물건을 사가자고 했다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 같다. 그러나 내 눈에 남편은 커다란 보따리를 싸는 느낌이었다. 본인이 안 입는 철 지난 옷도 넣고 현재 사용 중인 블루투스 스피커도 챙긴다. 심지어 본인이 잘 신고 있는 신발도 짐보따리에 넣곤 했다.
아니 저런 걸 부모님이 좋아하실까?
얼핏 보기에 그의 짐보따리는 딱히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그를 말려도 보고 그가 싼 짐에서 일부를 빼기도 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나는 이제 목포에 갈 일이 생기면 한참 전부터 보따리를 사기 시작한다. 겨울철에 손에 바를 핸드크림도 넣고, 어깨운동에 좋은 필라테스용 리본도 챙긴다. 사계절 피부를 위해 필요한 선크림도 넣고 전에 맛있게 먹었던 견과류도 보따리에 미리 넣어둔다.
내 보따리 역시 두서가 없다. 화장품도 있고 소소한 간식도 있으며 심지어 핸드워시도 있다. 모두 다 소소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고향 가는 길에 좋은 명절 선물을 준비한다. 그리고 여전히 커다란 보따리를 싼다. 평범하기 그지없고 비싸지도 않지만 부모님 댁에 없거나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물건들을 보따리에 담는다.
실제로 그 물건들이 부모님께 꼭 필요한 물건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언젠가부터 남편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멀고 먼 고향 가는 길, 그 고생길의 끝에는 우리가 가져간 어떤 물건도 다 좋아하시는 부모님이 계신다. 그분들 앞에서 커다란 보따리를 풀면 '이건 뭐고 저건 뭐다', '이건 어디에 쓰고 저건 어디에 쓰면 좋다'라고 말하면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로워하신다.
어떻게 남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의 힘 일 수도 있고 돌아올 때 손에 들려주시는 우리가 가져온 것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보따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남편을 닮아가게 됐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커다란 보따리를 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