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를 딴지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내 운전면허는 장롱 깊숙이 잠들어있었다. 20여 년 전 운전면허를 땄을 때, 나는 필기, 기능, 도로주행을 모두 한 번에 합격했다. 필기는 얼래 벌래 운으로 합격했고, 기능은 학원에서 배운 대로 공식을 잘 따라서 무려 90점에 합격했다.
문제는 도로주행이었는데 연습 도중에 연습용 트럭이 언덕 앞 신호에서 멈추면 내 심장도 멈추는 기분이었다. 역시나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던 도로주행에서 감독관(?)님은 웬만하면 운전하지 말라고 하셨다. 운전면허를 땄는데 운전하지 말라니... 나는 그 말을 충실히 따라 면허를 취득하고도 20년간 운전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 살 때는 딱히 운전할 필요가 없었다. 버스나 대중교통이 편리했고, 주차비도 비싸서 운전은 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신도시로 이사 오며 시작됐다. 당최 이곳은 교통이 너무 불편했다. 남편은 본인이 필요할 때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그게 항상 가능할 수는 없었다.
처음 몇 번 버스를 타고 나가다가 아예 버스 탈 일을 만들지 않기 시작했다. 버스가 50분에 한 대씩 있다 보니.... 없는 거랑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누구라도 만나려면 왕복 3~4시간 이상 걸리니 그냥 웬만하면 안 만나게 됐다.
이렇게 산 지 4년째 되던 해, 남편이 통근버스로 출퇴근하게 됐다. 드디어 집 주차장에 차(일명 쏘리)가 그냥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운전을 시작하게 됐다. 쏘리는 남자친구 차로 만나 남편 차가 된 나랑은 20,30대를 같이 보낸 사이다. 웬만한 반려동물 수명보다 나이가 많은 반려 자동차 쏘리는 올해로 14살이다.
그렇게 쏘리와 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됐다. 처음 운전을 시작했을 때 14년간 타온 이 차가 얼마나 낯설고 새롭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세상은 쏘리는 오래된 차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내게는 새 차처럼 모든 게 새로웠다.
초보 운전자로 세상 앞에 섰을 때 두려웠다. 운전을 가르쳐 주며 남편은 자꾸 화를 냈고, 부부 사이를 위해서라도 운전을 배우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루에 열두 번도 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흘러 운전을 할 수 있게 됐다. 너무나 큰 스트레스였던 한 손으로 운전대 돌리기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졌으며 버벅거리지만 주차도 곧잘 했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이 세상이 작아진 기분이었다. 전에는 힘들게 가던 곳을 손쉽게 갈 수 있는 즐거움, 마치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었다. 나보다 일 년 일찍 운전을 시작한 친구 L은 왜 우리는 이 좋은 걸 이제야 하냐고 했지만, 마흔이 넘어서야 드디어 운전을 하게 된 나는 정말 행복했다. 이것은 마치 밥만 먹던 아이가 처음 사탕을 먹어보는 것처럼 특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운전을 통해 배운 중요한 한 가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나는 세상의 다른 운전자분들께 감사하게 됐다. 운전을 통해 배운 정말 특별한 것은 세상에 대한 감사이다. 이건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는데 사실 존재만으로도 민폐였던 건 처음이다. 어느 정도 운전에 능숙해져도 도로에서 늘 긴장하고 알게 모르게 실수를 하게 된다. 심지어 실수를 했는지 모를 때도 있다.
마치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도로 위의 다른 분들에게 늘 배려를 받고 있었다. 나와 쏘리는 크든 작든 분명 도로 흐름에서 약간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클랙슨을 울리는 분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우리를 기다려줬다.
주차를 버벅거릴 때, 길을 잘못 들어서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될 때, 내가 하는 모든 실수를 전혀 범하지 않는 운전 선배님들이 나를 기꺼이 배려해 주셨다. 욕은커녕 빵빵거리지도 않고 나를 기다려주는 많은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며 처음으로 세상에 커다란 감사함과 인류애를 느꼈다.
초보자에 대한 세상의 배려를 이렇게 크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운전은 나에게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안겨줬다. 약간 성악설을 믿었는데 운전을 하면서 성선설을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무엇으로 그들의 배려를 설명할 수 있을까?
새로운 질서 속에 진입하기 위해 타인의 배려는 어찌 보면 필수이다. 그리고 그 배려가 눈물 나게 감사하다.
아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었던가?
더 좋은 사람으로 사회에 남고 싶다.
세상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려 준 초보운전에 대한 배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지난 주말 새 차를 계약했다. 전 남친 이자 현 남편의 첫 번째 차로 우리와 청춘을 함께 한 쏘리를 뒤로하고 다른 녀석과 잘 지낼 수 있을까?
벌써 두근거려 옛사랑 쏘리에게 미안하다.
남편에게 부탁했다.
세상에 매일 빚을 지고 있어~
당신이 대신 갚아야 해
운전 못하는 사람 보면 내 부인이려니 하고 꾹 참아줘
남편은 네 빚은 네가 갚으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 실력이 아니다.
빚은 일단 남편이 갚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