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즈쭈꾸미 Oct 26. 2024

나는 화가 난 사람이 아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급하게 병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만성 지루성 피부염이 또 도졌다. 좁쌀여드름이 잔뜩 생겨 보기 좋지 않은 건 둘째치고 얼굴이 너무 가려웠다. 스테로이드 주사 한 방과 항히스타민제가 절실하다. 빨리 가지 않으면 점심시간에 걸릴 텐데 서둘러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5분, 급하게 접수 중인 내게, 간호사 선생님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접수 마감했어요. 2시 이후에 오셔야 해요.” 병원 안을 보니 환자도 별로 없는데 접수를 받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애써 그 말을 삼켰다.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서운한 마음 가득, 속상한 마음 가득 발길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하다가 문득 왜 화가 나는지 생각해 봤다.



만약 피부과에 오기 위해 주차해야 하는 주차장 자리가 넉넉했다면 나는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좁디 좋은 이 주차장에 주차하기 위해서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이곳은 늘 주차가 어렵다. 그리고 내 주차실력은 형편없다. 주차에 소요되는 시간이 10분은 넘는 것 같다. 오후에 다시 오더라도 주차가 쉬울 리 없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만약 주차장에 주차가 어렵더라도 오후에 대기 환자가 많지 않다면 나는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병원은 2시에 가면 기본 대기 시간이 한 시간 반이다. 두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집과 병원이 좀 더 가깝다면 나는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과 병원은 꽤 먼 편이다. 지금은 12시 5분이지만 집에 다녀오려면 왕복 1시간은 걸릴 확률이 높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결국 내가 화가 난 건 5분 차이로 진료접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주차의 어려움과 긴 병원의 대기 시간, 집까지의 왕복 거리 등이 모두 결합해 나를 화나게 한 것이다.



걱정과 우려,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 잘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병원 주차장에 주차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예상과 달리 긴 대기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아 손에 들자 벌써부터 간지러움이 한결 덜 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결 기분이 좋아진 채로 좀 전 상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그래 아까 난 화난 게 아니야. 그저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해져 조금 곤란했을 뿐이지. 내가 아까 화를 내거나 진료 접수를 받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했더라면 접수순서는 빨라지지 않았겠지만 간호사 선생님은 점심시간 전에 마음이 상했겠지.’ 내 마음이 잠시 상한 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잠시 화가 났을 뿐이지 나는 화가 난 사람이 아니다. 화는 금방 가라앉고 화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화를 누군가에게 분출하기에 앞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멈추어야 할 이유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불운은 한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한 번의 불운은 여러 가지 사건의 종합적 결정체이다. 


우리에게 발생한 소소한 불운에 화내거나 분노하기 전에 잠시 한걸음 멈춰 가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의 화는 금방 풀어져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잠시 화가 났을 뿐 화가 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흔, 화는 잠시 스쳐가는 것이라는 걸 배우는 나이다.



이전 07화 초보운전자가 세상에 보내는 감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