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 만의 해후였다. 그 아이와 나는 아래윗집에 살았었다. 울타리엔 커다란 감나무 몇 그루가 듬성듬성 서 있었고, 여름이면 서늘한 그늘을, 가을이면 붉게 익은 감과 단풍 진 낙엽으로 마당을 물들이곤 했다.
조문을 마치고 자리를 잡는데, "저 정순이예요." 건너편의 고운 중년 여인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넨다.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아, 그때 함께 각시놀이를 하며 놀던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계집아이, 정순이다.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 아이는 생쌀 씹어 먹는 걸 참 좋아했었다. "삐약삐약" 거리며 묘한 이 가는 소리를 내곤 했는데, 어른들은 그러면 "어매가 일찍 죽는다"며 말리시곤 했다. 그 우스갯소리가 정말 씨가 되었던 걸까. 정순이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너무 어려서였는지, 그때 정순이는 슬퍼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정순이 오빠는 나와 친구 사이였다. 그는 그 당시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나이답지 않게 구성지게 잘 불렀다. 풀을 베러 갈 때나 나뭇짐을 한 짐 짊어지고 내려올 때도, 그리고 별빛이 곱게 쏟아지는 밤이면 동네 둥구나무 아래 기대앉아 내게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 청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밤, 우리는 둥구나무 아래 모여 서로 잊지 말자고 언약했다. 그 약속이 진심이었는지, 청주로 이사 가고 몇 달 뒤 정순이 오빠가 실제로 나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오늘 떠나보낸 고인(故人)은 나의 사촌 형수이자, 정순이의 맏언니이기도 하다. 형수는 참으로 고운 분이셨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뒤 어린 동생들을 곁에서 돌보기 위해, 좋은 혼처를 마다하고 한동네 사는 사촌 형과 혼인을 택하셨다. 모진 풍파의 세월을 오로지 자식과 동생들을 위해 버텨내신 분이다. 나는 정순이 오빠인 친구에게 "정 씨 집안에 시집오셔서 호강 한번 못 하고 고생만 하시다 가셨다"며 짧은 위로를 건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에둘러 보아도 세월의 허망함은 어쩔 수 없다. 장례식장을 나서며 초동 시절의 기억을 다시금 되짚어 본다. 60년이라는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우리를 전혀 다른 자리로 옮겨 놓았다. 아이였던 우리는 어느덧 서로의 얼굴에 깊게 파인 세월의 흔적을 이고 서 있다.
문득 그날 밤 둥구나무 아래서 보았던 별빛이 떠오른다. 그 별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조금 멀리 왔을 뿐이다.
반가웠다, 친구들아. 다시 만날 기약은 없지만, 부디 남은 생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