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짓는 것들 1화

부제 : 너와 그녀의 집으로 날 초대하지 마

by 글쓰는 앳지
너와 그녀의 집으로 날 초대하지 마


커피는 식어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따뜻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단지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를 다시 봤다.

한때는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하루가 흘렀지만,

지금은 사람도, 계절도, 감정도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잘 지냈어?”

그가 물었다.


낯설지 않은 말투였다.

예전엔 매일 듣던 인사.

지금은 마모된 표현.


“응. 그냥, 그렇게.”

나는 무심한 척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그냥’은 아니었다.

무사했던 날보다

간신히 버틴 날이 더 많았고,

어떤 날은 잠에서 깼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박수를 쳐야 했다.

그 모든 걸 한 단어로 덮었다. 그냥.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몸짓이었다.

그의 호흡은 낮았고,

그 고요조차 낯익었다.


“그땐… 미안했어. 진심이야.”


나는 식은 커피잔을 들었다가

입도 대지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기억한다는 건,

그때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거야.

네 말엔, 그게 없어.”


그는 고개를 떨궜다.

말을 삼키는 사람의 침묵은

때때로, 변명보다 멀게 느껴진다.


“그 사람은… 그냥, 그랬던 거야.

잠깐 흔들렸고,

말 못 했고… 그러다 그렇게 된 거지.”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문질렀다.

지우고 싶은 기억은 종종

몸으로 먼저 움직인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너의 이성이 골라낸 선택이었어.

사람은 자기 마음을 어디에 둘지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적엔 너무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그 여자 얘긴 꺼내지 마.”

나는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화를 내는 것도,

눈물을 삼키는 일도

더는 감정의 해답이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숨 쉬는 일 외엔

모든 것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가장 오래 머문 마음의 장소에

자신만의 집을 지어.

그 집은 벽이 아니라,

기억으로 만들어져.

넌 아직도 그 집을 짓고 있지.

내 앞에서.”


“하지만 나는,

그 안에 초대받고 싶지 않아.”


그는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의 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계절들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뭐 하고 지내?”


나는 짧게 숨을 쉬고 말했다.


“살아.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누군가에겐 별거 아닐지 몰라도,

지금 나한텐

그게 생존이야.”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해인지, 미안함인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지는

더 이상 내가 확인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자주 하던 버릇.


그 소리는

아직 닫히지 않은 집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구조 요청처럼 느껴졌다.


“늦었지?”

그가 체념하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모든 시간이 스며든 동작이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남았고,

나는 나왔다.


그의 집은

아직도 그 여자와 함께 쌓은

감정의 잔해로 가득해 보였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불은 켜져 있었지만,

따뜻하진 않았다.


나는 나를 위해 만든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가구도, 전구도 없었지만

그 방은 조용했고,

무해했다.


다시 커피를 내렸다.

불빛 아래 놓인 빈 잔은

지금의 나를 닮아 있었다.

오래된 고통을 껴안은 듯한 모습으로

출렁이는 것들을 감쌌다.


그 밤,

나는 서랍 속에 흩어져 있던 나를

하나씩 꺼내어 안았다.


붙이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채로.


신에게도

부모에게도

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


'삶은 그 고통 속에서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때

고요한 시간 속에서

내가 나를 오롯이 지켜내는

훈련이었다.'


나만의 방을 만들고,

그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일.


상처가 지워지기도 전에

인심 쓰듯 ‘좋은 기억’으로 포장되길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온전히 도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완전히

잃어버리고 싶었다.


영원한 이별이면

더는 바랄...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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