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동아줄
그 한마디면, 되었을 것이다.
창자는 느리게 비틀렸다. 장기들이 안에서부터 스러졌다. 오래 삼킨 말들이 검게 타들어가듯, 조용히 속을 물들였다. 고요한 방 안에 신음이 흘렀고, 그 이름이 문장처럼, 그러나 부서진 문장처럼 터져 나왔다. 기도도, 비명도 아닌 무언가.
나는 그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를 부여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숨은 목구멍 위에서 자꾸만 끊겼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줘. 너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저… 그냥,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 말이면, 됐다고.”
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 불쌍히 여겨지기 싫었고, 동정을 구한 적도 없었다. 단지, 마지막만큼은 사람 대 사람으로 말해주기를 바랐다. 한때 진심이었던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
“미안해.”
“이제는 감정이 없어.”
“우리는 여기까지야.”
그 말이 있었다면, 나는 나를 조금 덜 잃었을 것이다. 남은 생이 그렇게까지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사라졌다. 수없이 반복되던 침묵. 전화는 받지 않았고, 문자엔 대답이 없었다. 그 정적은 마치 물속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는 산소처럼 나를 질식시켰다.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아무 준비 없이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말.
“넌 아무 하고나 쉽게 사귀는 여자야.”
“아무한테나 너를 주는 여자지.”
그 말은 망설임 없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문장이 아니었다.
칼이었다.
며칠을... 말을 잃었다. 아무에게도 그 말을 옮기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그 말이 아니라, 그 말이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구원은 거창하지 않다. 어떤 날은, 그저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 그 사람의 말에 진심이 묻어 있다는 예의. 말 하나로, 사람 하나를 살릴 수 있다는 걸 그는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하지 않았다.
내가 쉽게 떨어져야 할 이유가 급했던 거다
남겨진 나는 짐처럼 한 구석에 밀려났다. 누군가가 일부러 버린 것은 아닐지 몰라도, 누구도 거두지 않은 쓰레기로. 수거되지 않은 나는, 흘러넘쳐서 더는 정화될 수 없을 만큼 스스로를 끊임없이 더럽히고 더럽혔다
내속은 순식간에 구더기로 뒤덮였고 미생물이 분해하는 악취로 썩어갔다
그가 떠난 것보다, 아무 말도 없이 나를 그대로 두었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나를 망가뜨렸다.
상처는 반복되었고, 나는 내 안의 존엄을 스스로 내던졌다.
나는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했다
그 후로 한동안, 미생물에 분해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이 되지 않았고, 형체도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마음은커녕, 나를 지킬 의지도 희박했다.
어떤 말은 복부 쪽에서 올라온다.
장기들이 구겨지다 못해 발버둥을 치고,
헛구역질처럼 말이 목까지 차오른다.
토할 것 같다.
그때 그 대답 없는 시간들을.
비겁한 변명으로 차오른 광기 어린 그의 모습을.
“넌 아무 하고나 쉽게 사귀는 여자야.”
그 말이 전화를 타고 내 귀에 박혔을 때
귓속 고막이 아닌, 심장부터 파열됐다.
그 순간, 입천장에 걸린 모든 이름이 바스러졌다.
나는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을 매일같이
이빨로 씹고, 혀로 다지고, 끝내 삼키길 반복했다
몰랐다. 너무 놀라면 욕도 안 나온다는 걸...
그저 숨을 내뱉었고,
그 숨에서 나는 피 냄새가 익숙해졌다.
방바닥에 엎드려 울 때,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던 건
슬퍼서가 아니었다. 화가 나서였다.
화가 나서, 온몸의 근육이 저항처럼 들썩였다.
‘어쩜 이게 내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엄마를 닮은 강단일 거라고 스스로 생각 같지도 않은 생각을 만들어 살기 위해 생각을 포장했다.’
‘이만큼 더럽고, 이만큼 억울해서, 더 살아야겠단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머는 숙주 없이도 전염병처럼 잘 번졌다.
나는 방역을 하지 않았고
그냥 내 몸하나를 기꺼이 불태웠다.
‘그래, 니들 다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괜찮아.
내가 알아서 재만 남길 테니까.’
이 악물고, 벚꽃이 흩날리던 대학 교정에서
그 재를 가슴팍에 눌러 붙인 채 그을음처럼 살았다.
손톱을 물었고,
혀끝을 씹었고,
방 안에서 종종 잊기 위해 벽에 이마를 박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회복의 시간은
이따위 식이었다.
참고, 삼키고, 조용히 죽어 있는 걸 연기하기.
산다는 건 고문이었다.
소문은 아직도 어디선가 숨 쉬겠지.
누군가는 그걸 진실처럼 갖고 다니겠지.
좋아. 그럼 가져.
근데 나도 나를 가져.
그게 공평한 거지.
이름도, 얼굴도 다 사라져도 내가 꾹꾹 눌러 참고 삼킨 그 말들의 잔해,
그건 내장이 기억한다.
나는 그걸 끌어안고, 계속해서 걷었다.
비틀거리면서.
근데 안 넘어져.
왜냐면 한 번도 난 안 죽었으니까.
그러다 아주 오랜 시간 끝에, 나는 우연히 나를 불렀다.
살아 있기 위해서. 누군가를 잃은 연인이 아니라, 루머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이름을 무심결에 불렀을 때, 나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미안해" 그 한마디는 끝내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 거대한 침묵 위에서 상처 입은 나를 껴안고 나를 쌓았다.
그 침묵을 견딘 내가, 나를 구원한 거였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고, 또 떠난다. 인연은 닿고, 끊긴다. 하지만 그 끝에도 넘지 않아야 할 선이 있다.
말로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것. 이별의 순간조차,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사랑은 끝나도, 예의는 남아야 한다.
마지막 날 선 말들로 모두 부정하는 일이 없기를.
동아줄처럼 쥐고 있던 누군가의 간절한
살고자 하는 그 마음 하나정도는
누구든지 잘라내지 못하기를...
나는 내내 기도했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걸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기를 좋아했으니까...
"당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