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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Jun 23. 2024

치자꽃을 훔치며

    

이종민 그림



책갈피를 놓은 곳이 하필이면 서포 김만중 선생께서 군자(君子)를 논한 부분이었다. 새벽의 고요에도 글 읽기는 고사하고 생각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아파트 화단을 염두에 두고 도둑의 마음을 키워온 것은, 뜬금없이 수생 화분을 구상하게 된 이후로, 지난밤 야간 잠행을 포함하여 아침 산책길이 바빴다. 그러나 인위로 만든 화단이란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수생에 어울릴 “석창포‘ 따위는 지난밤 이불 속에서의 염원에 불과할 뿐, 생김새가 비슷한 '맥문동' 무리만 지천이었다. 오히려, 이슬 맞은 강아지 꼴의 몰골과 눈먼 욕심을 위로한 건 풀 섶으로 설핏 스미는 짙고 고혹적인 향기의 발견이었다.  

   

치자꽃 특유의 향으로 말하자면, 무리 지어 피면서도 봄의 산수유꽃 냄새와 같이 지천으로 흐드러진 느낌과 달리 선뜻선뜻 바람에 묻어 은연중에 코를 스친다. 풋 처녀의 살 내음을 닮은 분망함이라 할까. 코를 찌를 듯 무거워 자칫 선정적이다 싶지만, 막상 가까이하면 노골적이지 않은 은은함이 숨어 있어 짙은 향에 대한 선입견을 접어야 한다. 어디 그렇지 않은 꽃향기가 있으랴마는 수많은 향내 중에서도 유독 맑은 유리병 같은 데에 담아두고 오래도록 즐기고픈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향에 대한 애착의 뿌리가 꽤 깊었다. 어쩌면, 수십 년 전 남도의 어느 마을에서부터 사모의 심정을 키워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내 보쌈이라도 하려 했을까? 애당초 도적의 마음을 품고 내디딘 걸음이라 결심도 쉬워 ‘석창포'에 대한 미련을 핑계로 꽃가지 몇 개를 분지르고 만 것은 실로 찰나였다. 순간, 목이 뻣뻣해지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가슴이 콩콩거렸다. 손아귀로 꽃을 감추고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는 행동이 나이답지 않게 재빠른 것 하며, 천연스레 주위를 살피기까지 하니 영락없이 도적의 짓거리다.     

 

훔친다는 것은 혼자 소유하겠다는 것 아닌가. 양심의 가책을 불사하였기에 막상 정원사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도 어른이 할 행동치고는 참으로 계면쩍고 우스운 일이었다. 꽃이 보고 싶고 향이 그리워지면 이 자리로 다시 와 앉으면 될 일을. 절화의 순간,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를 실천하려 아끼던 난초 화분을 떠나보낸 일화가 떠오르는 건 또 무슨 야릇함인가. 아~ 이 극과 극의 대비로 나는 지금 성인과 속인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장막 같은 걸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자리를 벗어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설가 오 헨리는 벽에 그린 잎새 하나로 생명의 존엄을 설파하려 했다던가. 나보다 더 이른 시간에 동네 노인들이 이 오솔길을 자주 지나다닌다는 데에 겨우 생각이 미치고 보면, 혹 내가 꺾은 그 구석진 자리에 핀 꽃가지와 어느 노인이 어제까지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던 건 아니었는지? 갇힌 아파트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동경과 그리움의 시절로 돌아가 보는 데에 매개가 된 그 꽃이 아닐지?      

그렇다면, 며칠을 두고 같은 시간에 자리하면서 봉오리가 맺히는 설렘과 망울 터지는 환희를 보았을 거며, 오늘 성숙한 향을 맡으려 큰 숨 들이쉬고, 또 내일이면 쓸쓸히 시들어갈 꽃을 아쉬워하며 자신의 일생을 반추할 것이었다. 꽃이 사라진 노인의 아침은 얼마나 쓸쓸할까? 아쉬움이 비단 그 노인에게 뿐이랴. 설령 이 꽃가지의 정체를 꼼꼼히 살피려던 어느 호기심 많은 젊은이인들 그런 섭섭함이 없으리오. 맑은 아침임에도 돌아오는 길의 걸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생각대로 꽃을 물병에 꽂아 놓고 아내에게 유년의 추억 몇 가지를 얘기하려던 심사였지만 절화하기 전의 마음이었다. 물병에 담긴 치자꽃은 내가 제 명을 재촉했음에도 여전히 맑고 은은하다. 도리어 시들고 꺾인 것은 욕심만 채우려던 알량한 나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굳이 성인의 마음과 비교치 않았더라도 터무니없이 작은 가슴을 오늘 아침에 보고야 말았다. 운 좋게 깨우친 것이 있다면, 나의 욕된 마음일랑 탓 없다는 듯 유유히 향기를 뿜어 주는 꽃이 나보 다 훨씬 아량이 넓으며 자세가 고고하다고 느낀 것이다. 비록 작은 식물이지만 이 꽃은 군자의 태도를 보였으나, 나는 소인에 불과함이 분명해진다.     


방문을 연 아내가 꽃보다 향기를 먼저 찾아내고 말을 붙였다. “와! 향기 좋다.” "으응~ 지나던 길에 꺾여 있는 꽃 가지 하나를 주워 왔어." 짧은 거짓 대답을 하고 새벽의 책상머리로 발을 옮겼다. 책갈피는 여전히 그 페이지에 덩그러니 꽂혀 있다. 어느새 치자꽃 향이 나를 따라와 있었다. 향기를 음미한다는 것은 마음 한구석에 도둑을 키워온 나에게조차 즐거운 일이다. 군자의 길이 힘에 부친다면, 나의 자세란 사람의 향기를 맡아보는 즐거움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보다. 이제는 내가 선생의 시간과 공간으로 진중히 들어갈 차례였다.   

  

추측한다. 선생이 꿈꾸던 것도 향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공맹(孔孟)의 시절이라 하여 소인이 드물었을까? 외로운 섬 가시 담장 아래로부터의 향은 북을 향하여 유유히 남풍을 탔으리라. 울분은 활자가 되고 외로움은 웅변으로 화하여 뭇 소인들의 막힌 귀로 흐르고 둔한 코를 스쳤으리. 경동하지 않고 외로운 군자로 살려 한 의지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으며, 그러한 올바름의 사수는 어느 정도의 무게로 나를 감동시키는가.      


활자를 더듬는 순간순간 살에 소름을 돋우며 내려앉은 것은 하나의 훼손 없이 되살아 온 바로 그 삿갓섬(노도)의 치자꽃 향이었다. 곧음도 바름도, 그 때문에 시렸던 문학의 여정도, 하물며 고전이 된 선생의 유고마저도 고스란히 눈 앞에 펼쳐진 현시점의 향이 아니던가. ‘서포만필(西浦漫筆)’, 그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사위는 여전히 선생의 문향으로 가득하다. 나는 소망한다. 그 향으로 말미암아 잠시 꽃을 도둑질한 나의 검은 마음 한구석이 부디 소멸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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