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의 뜰에 벌써 치자꽃 향이 가득한가 보다. 건듯 부는 바람이 익숙한 향기를 실어 주니 엉덩이가 들썩. 가랑비가 흩뿌리니 잎은 윤기를 머금었고 꽃은 더 분망해졌다. 잦은 비를 핑계로 산책하지 않았더니 그새 여름이 깊었구나.
향의 방만함. 매화향처럼 은은한 것이 아니어도 괘념치 않겠다. 길고 지루한 계절은 발걸음을 짙고 노골적인 향기 쪽으로 향하게 한다. 꽃의 유혹. 창백한 듯 분망한 꽃이 말한다. "꽃은 향기로 말해야 한다."라고. 모란이나 작약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노릇이지만 나는 이 계절만큼은 치자꽃의 주장에 동의한다.
치자꽃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 대개 꽃은 대칭의 속성을 숙명의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데, 치자꽃의 어린 봉우리를 보면, 처음부터 이 원리를 배반하려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막상 개화의 시간이 되면 망설임 없이 비대칭의 모양으로 흐드러진다. 별나지 않은가? 도발적이다. 이를테면 태생부터 이미 창조적이라 칭송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치자꽃은 늘 도둑의 마음이 일게 한다. 한 송이 꺾어 집의 유리 화병에 꽂아 두고 싶음이다. 꽃과 나는 月下情人이라도 되려는 듯. 야밤이 되면, 괜한 탐심이 일지나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