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화첩단상

새의 귀소

일상을 말하다

by 이종민
그림 이종민


그날 나는 울산태화강국가정원에서 떼까마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환이란 말은 그 광경을 보러 굳이 길을 떠난 나의 입장에 맞추어 과장된 말일지 모른다. 설령 그곳의 까마귀가 철새라 하더라도 새의 입장에서는 본능적이며 일상인 행동이었을 테니 귀소 정도의 표현이 아무래도 적합하지 싶다. 집단이든 개별이든 동물이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먹이 짓과 그에 따른 부수적인 짓일 테다. 하루에 한 번씩 시간을 맞추어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 근처에서 먹이의 포획이 이루어지며 그것들의 삶 또한 도시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음이다. 새의 집단적 행동에 수긍이 간다.


오랜 시간을 이루어져 온 대나무 숲은 넓고 조밀했다. 내가 보기에도 노곤한 노동 뒤의 휴식과 새 에너지의 충만을 위하여 이곳만큼 안온한 곳이 없지 싶었다. 그것들이 낮에 먹이 짓을 끝내고 무리를 지어 이 숲 속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사람들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으리. 변화 없는 일상에 지친 도시 사람들에게 하늘을 뒤덮은 새떼의 검은 물결은 장관이었겠다. 마치 지신의 자유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


나는 새를 기다리며 지하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노동자들의 퇴근을 생각했다. 집으로 가는 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돌아가야 하는 그곳.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의 지나는 것을 삶이라 부른다. 그리고 건축 또한 탄생시킨 것이 아닌가. 애당초 인간의 거소 또한 저 숲과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숲으로 돌아가지 못한 인간. 그 인간이 만든 또 다른 숲, 집과 도시. 그 인위의 숲에서 나는 저 새들의 숲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날 결국 새는 오지 않았다. 날씨가 따듯하면 굳이 숲으로 오지 않기도 한다는 주민들의 전언이 있었으나, 애를 태우고 새의 군무를 기다린 나의 시간은 무의미하였다. 새의 곡절에 나의 일시적 열망이 되교될 수는 있을까마는 나는 허탈함을 숨길 수 없었다.


아래로 떨구어진 나의 시선은 낙조 아래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 쌍의 물오리에게 머물렀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머리일랑 아예 깃털 속에다 감추었다. 저 가느다란 다리로 긴 밤을 온통 견뎌낼 셈이 아닌가. 만약에 그렇다면 태화강 물오리에게 집이란 두 덩이의 작은 바윗돌이 될 터인지? 아~ 집이란 말의 무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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