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말하다
*몇 년 전에 쓴 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인가 보다. 묘역의 전경이 펼쳐지는 텔레비전에서 논란 끝에 이젠 익숙해진 곡이 흐른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 노래를 따라 불러 본다. 가사가 아프고 절절하다. 유독 우리 세대에 그런 일들이 많았다. 절망의 날들을 회상하고 기도하였다. “죽은 영혼들이여! 그대들의 희생으로 살아있는 자들을 부디 긍휼히 여기소서.”
사실 ‘임을 위한 행진곡’ 우리 이후의 노래였고, 우리 시대에는 격동의 그때마다 가수 안치환의 노래 한 소절로 절망의 순간을 달래었다. 이후로 노래방 마지막 곡도 으레 이 노래여야만 했다. 특히 후배 K 소장이 잘 불렀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 샛바람에 떨지마라 / 창살 아래 내가 묶인 곳 / 살아서 만나리라~~” 노래는 늘 결연한 의지를 북돋웠다. 투쟁의 시절에도 건축을 할 때도.....
노래도 노래려니와 오늘은 왠지 소나무 그림을 한 장 그려야 할 것만 같다. 경주 서출지 앞의 소나무 그림을 한 장 그렸고, 전에 그려둔 창녕 관룡사의 소나무를 꺼내어 본다. 소나무 그리기는 익숙한 대상임에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수채로 그리거나 펜으로 터치를 하거나 둘 다 어렵긴 마찬가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내 기억 속의 소나무는 형태가 아니라 소리이며 촉감이었다. 샛바람에 윙윙 부딪히는 솔잎의 울음이 마냥 무서웠고, 꺼칠꺼칠하던 껍질과 손에 쩍쩍 들러붙던 송진의 감촉도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으니 그 모양새가 내 눈에 차분히 들어 왔으려고.
그런데도 가끔 그림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소나무다. 나이가 드니 겨우 모양새가 눈에 들어온다. 뒤늦게 매력에 빠지려는 것일까? 예컨데 구불구불 삐뚤삐뚤한 모습이 오히려 좋고,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는 고집과 개성이 좋고, 샛바람에 떨지 않을 강한 유연함이 매력적이다. 그래서 내가 자꾸 너를 그린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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