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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Dec 09. 2022

사라져가는 것을 그리다

도시와 건축을 말하다

 

내가 물었다. “아주머니! 여기에 오래 사셨어요? 저기 있었던 그 집은 어디로 옮겨 갔습니까?”, “글쎄요? 다 떠나고 나만 남았네요.” 아주머니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세상을 떠난 Y와 함께하던 골목의 냄새와 해장국집의 불그레한 국물과 아침까지 가시지 않던 술 냄새를 기억해 내고 있다. 그날도 겨울비가 내렸을 테고, 우리는 또 그 몇 해 전의 추억을 나누고 있었을 테다. 동네의 집들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언젠가부터 그것들을 그려 두기로 하였다. 속절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었지만, 겉으로는 건축가의 책무의 하나라 말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장의 그림이 화첩에 남았다. 정지된 시간의 비애 때문일까? 색채가 아무리 화려하여도 그려진 집은 쓸쓸하기만 하다. 시간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것은 어디에 존재할까? 내 마음속일까? 아니면 마음을 비운 후, 빈 가슴의 밖에 있는가.


매축지 마을 / 여기에 오면 특별한 감정이 생긴다. 숙연의 예고? 훗날, 그림 앞에 섰을 때. 마치 오래된 사람의 무덤 곁에서의 느낌과 같으리라.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태연히 그림을 그리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의 감정 정도는 꼭 남겨 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려 둔다.


대청동 / 몇 번을 더 와야겠다. 올 때마다 새로운 곳이 보인다. 이곳이 언덕 지대인 것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에 따라서 생각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겐 참 다행스러운 것이 아닌가? 아직은 재개발의 열풍에 휩싸이지 않았음이다.


해운대 재개발 현장 /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떠난 자리가 그리 삭막하지만은 않다. 그 와중에 나무와 풀은 잎을 피우고, 또 떨어뜨려 가며 시간을 읽어낸다.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것들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맑은 색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그것들은 왜 이다지 천진하게 꽃을 피우는가?


중앙동 그리고 동광동 /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곳을 오랜만에 걸었다. 야외 스케치 중이지만 뜻하지 않게 몽롱하고 아련한 시간 속이다. 더러는 저세상으로 가신 오래된 사람들의 그때는 미처 몰랐던 온기와 사십 년 전의 음식 냄새, 그리고 퇴근 무렵에 느끼던 낡은 외투 속의 체온과 어슴푸레하고 약간 푸르렀던 거리의 색깔.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해 내었다.


오래된 마을을 탐사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건축은 무엇이고, 집이란 어떤 곳인가?’. 그러고 보니 내 삶은 늘 멋지고 새로운 것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로 인한 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태도가 변했다고나 할까? 새로운 것만이 아름답다는 내 생각에 균열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건축가가 없는 건축이 더 많음을 알게 된다. 도시의 곳곳에 홀로 혹은 집단으로 남아있는 그것들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는 오늘, 나는 그것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건축 평론가 데이비드_리틀필드는 그의 저서 ‘건축이 말을 걸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건축은 당신 자신을 과거와 동일시 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닥칠 과거의 일부이다. 그리고 미래 세대의 시선으로 당신 자신을 그려보는 과정이며, 건축물의 연대 속에 당신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과정이다. 진품은 도면이나 컴퓨터 모형의 정밀성 안에 살지 않으며, 완성된 구조물에 살지 않는다. 진품 건물은 삶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것이다.’


평론가의 말에 동의한다. 집이란 형태와 크기가 지니는 물리적 느낌이 아니라, 삶이 장소와 버무려져서 만들어내는 기쁨과 그것들이 쌓여가는 이른바 추억과 같은 것이 아닐까? 나이든 건축가가 고층 아파트의 방에서 비로소 생각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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