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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b n Wrestle May 29. 2022

좋은 부탁 하나

나 같은 프로 부탁러들에게

1/ 결혼식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결혼 청첩장이 오간다. 좋은 날 부부의 인연을 맺는 이들 주위에는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하객들이 있다. 이들의 참석은 축복과 함께 그날의 예식을 보증한다. 이것은 근대화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온 거의 모든 한국인의 결혼식 풍경이다. 좋은 날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예비부부와 그들의 지인들은 그렇게 무언의 사회적 거래의 당사자가 된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세상만사라 해도, 축의금 장부에 적히는 액수만큼 상대방의 약속 이행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는, 일종의 사회적 거래다. 결혼식은 우리 부모 세대 이전부터 자연스레 학습한 사회적 거래기 때문에 내가 받은 청첩장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 며칠간 고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훨씬 다양한 부탁과 요청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요청(부탁)과 수락(수용)의 관계는 숫자로 드러나는 교환 거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호혜성을 연구한 프랑스 사회학자 모스(Mauss)는 1925년 저서 <The gift>에서, 선물은 그 자발성과 비계산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의무적이고 계산적이고 힘의 사용에 의해 제재되는 것이라 보았다(출처: 네이버 사회학 사전). 오늘 글의 주제인 ‘요청’은 수치로 매길 수 없는 요청에 관한 글이다.


2/ street cred


신용 거래를 성실히 이행하면 신용도가 올라가듯,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거래로도 신용이 쌓인다. 그것을 ‘street cred’ 라 부르는데, 원래 의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구전 효과가 있는 신용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벤처 캐피털리스트이자 안드리센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의 Jeffrey Jordan은 페이스북이 어릴 때 마크 저커버그를 만났다. 어떻게 자신을 찾아왔냐고 묻자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초대 사장인 션 파커(Sean Parker)가 Jeff Jordan의 street cred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투자 업계 밖 모든 삶에서 이런 방식으로 좋은 인연과 기회가 만들어진다.


3/ ‘부탁의 경제성’


어느 수준까지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어디까지 요청을 들어줄지에 대한 한계값(threshold)은 사람마다 다르다. 또 그 요청 자체에 얼마나 많은 의미 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적 거래의 양상이 아예 바뀌기도 한다. 부탁은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갑분싸), 더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줄 재료가 된다.


난 대학생 시절부터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를 여럿 해왔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떠나 일련의 과정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부탁과 거절의 연속에서 자립을 연습한 시간’이었다고 하고 싶다. 나는 연약하여 남에게 쉽게 부탁하는 사람이었다. 부탁은 그저 편리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귀중한 카드를 탕진해버리는 사람이었다. 사소하게 남발한 것들이 나중에 부채로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부탁이란 이자가 높은 대출 상품이었구나 느꼈다. 그래서 부탁은 아껴서 써야 하는 유한한 재화의 성격을 가진다.


4/ 기대치


우리가 부탁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각자의 방식으로 잘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요청대로 무언가 이행되었을 때 가장 큰 수혜자는 요청한 당사자이다. 그렇다 보니 내 입맛대로 기대하게 된다. 상대방이 내 요청을 수락하여 내게 도움을 주리라 하는 기대는 설탕과 같다. 요청이 들어줄 거란 기대는 달달하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행복 회로에 중독되게 만들고, 결국 나는 더 큰 실망감과 자괴감에 빠진다.


괜한 기대는 좋았던 사람을 미워하게 만든다. 큰 기대는 상대방의 숨통을 조인다. 가족이니까 옆에 있지, 세상살이에서 만난 사람들은 상대의 헛한 기대감을 감내할 의무가 없다. 나의 옹졸한 기대감 하나로 공들여 쌓아 온 인간관계가 무너진다. 내 street cred 가 상처받는다. 그냥 다 퍼주는 사람으로 인식되든, 무시해도 되는 부탁을 하는 사람이든, 요청에는 분명 값(price)이 있다.


나도 티셔츠 사업을 할 때, 파티팀을 운영할 때, 그 외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주변 친구들에게 많은 요청을 했다. ‘사줘, 와줘, 홍보해줘, 주변에 퍼뜨려줘,’. 요청을 하는 행위는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프로 해줘러’인 나는 여러 교훈을 얻고 있다.


5/ 잘 요청하기


내가 생각하는 좋은 요청(request)은 두 가지를 확인한다.


첫째가 나의 자립성을 해치는 요청인가이다. 그 요청이 상대방에게 내 일의 주도권을 넘기는 부탁인지 확인한다. 주도권과 영향력은 다르다. 주도권이 너무 높으면 상대방에게 큰 부담감을 지우는 일이고, 또 기대치를 높여 장기적인 인간관계를 망친다.


내가 자부심을 가진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이다. 스스로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그때 부탁해도 늦지 않았다는 말. 이 말은 대부분 맞았다. 남에게 요청한 결과물이 시원찮은 경우, 동시에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 꽤 괜찮은 경우가 많았다. 내 두 발로 서려는 정직한 노력의 총합이 프로젝트의 성공 실패를 갈랐다. 파트너와 함께 일일이 박스 포장을 한 기억, 파티 현수막을 몸에 두르고 거리로 나가 홍보하던 기억, 밤새 디지털 작업물들을 만들고 낮엔 가구를 옮기던 기억들이 잘했던 기억들에 속한다. Sweat Equity는 오롯이 내 것으로, 부탁을 통해 넘길 것 중 가장 마지막에 넘겨야 할 지분이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에게 요청하느냐다. 타인의 TPO를 고려하는 것은 기본이다. 상대방의 TPO를 고려한다면 덜 친하거나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람에게도 정당한 요청을 해볼 수 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랑 친밀도는 낮더라도 요청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때 조심은 해야 한다. 이 사람의 능력만 믿고 요청했다가 내용이 외부로 새 나갈 수 있다. ‘A가 B한테 3천을 빌려달라 했더라’처럼. 잘못된 사람에게 부탁하면 얻는 위험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요청에 스스로 값을 매겨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 요청의 가치를 계산해보면 그 일을 정말 남이 도와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해볼 계기가 된다. 결국, 부탁하기 전에 웬만해선 직접 해보고, 그 후에 맞는 사람에게 정당한 요청을 하는 것이 좋다.



essay by 준우

photo by Samuel Re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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