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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Kim Mar 06. 2017

멀라이언 스노우볼 -1-

한걸음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 -1-

검고 긴 머리칼, 빨간 손자국이 남아있던 풍만한 가슴. 검은 원피스. 인위적인 미소. 연리지.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내 심장 조각들.

서율을 처음 안았을 때, 나는 파멸을 예상했었다. 확신에 가까운 그 예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검고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 안에 담긴 욕망의 에너지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그 달콤한 파멸을 향해 달음박질 할 수밖에 없었다.

서율은 그런 여자였고, 내가 사랑한 여자였다.

     

     

     

한 걸음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

     

     

누군가가 내 작업실 앞에 멈춰 섰다. 저 멀리서부터 들리던 어긋난 리듬의 발자국 소리에서 망설임이 느껴진다. 망설이다가, 문에 손을 얹는다. 좀 더 망설이다가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는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나무 조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어서 의뢰인을 맞았다.

이번 의뢰인은 사십 중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음영이 진 두꺼운 눈가와 강인하게 다문 처진 입 꼬리가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닮아 있어서 거친 삶을 살아왔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좋은 공방이군.”

남자가 턱을 움직였다. 다 물었던 입술을 열자 그 안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듣기 좋은 목소리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빙긋 웃었다. 잠시 살짝 올라왔던 남자의 입 꼬리가 다시 어둠속으로 잠겼다.

나는 남자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다소 각이 진 유리병 하나가 나왔다. 호박색의 액체가 병 안에서 출렁이며 맑은 소리를 냈다. 남자가 병뚜껑을 열자, 진한 알코올의 냄새가 공방에 퍼졌다. 맡기만 했는데도, 아찔한 정도의 향이었다.

“혹시 얼음과, 레몬이 있나?”

냉장고에서 얼음과 슬라이스 된 레몬을 꺼내 남자에게 가져다주었다. 남자는 톡-. 톡-. 하고 얼음 틀을 두드려 얼음 두 개를 꺼내서 자신의 잔에 넣었다. 그리고 병을 들어 얼음이 잠길 만큼 붓고는, 그 위에 레몬 슬라이스 한 조각을 얹었다.

남자는 잔을 몇 번 흔들어 얼음과 술, 그리고 레몬을 섞은 다음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술을 한 모금 삼키는 순간, 남자의 얼굴이 잠시 평온해졌다.

“크으-. 이제 살 것 같군.”

남자는 공방에 머무르는 동안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내 작품들을 만지작거리다가 내게 혼이 나고, 내 식품 창고를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다.

남자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바로 내게 일을 의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기에, 남자에게 캐묻진 않았다. 대개 저런 부류는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시험하고, 나를 신뢰해도 좋다고 판단을 했을 때, 일을 의뢰하곤 했다.

남자는 말이 많았다. 대개는 어느 정도 술을 마셔야 말을 시작하곤 했는데, 가끔 남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것처럼 횡설수설 하는 때가 있었다. 단순한 술기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남자에게는 늘 불안감이 느껴졌는데, 남자의 말은 마치 허공에 뻗어있는 구름다리와 같다는 느낌을 주곤 했었다.

남자는 그저 타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말을 나눈 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두는 것 같았고, 자신이 하는 말을 통해 자신이 지금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음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넌지시 그에게 그 불안감의 존재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어느 날인가. 짐을 한 가득 싣고 공방에 올라온 남자가 짐을 부엌으로 가져가 뭔가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난 후에, 은색의 쟁반에 빨간색 액체가 담긴 잔을 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 내게 다가왔다. 엉성하게 잘린 있는 파인애플과 체리 조각이 뭐랄까. 아주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으나, 남자가 이 것을 만드는 것에 걸린 정성과 노력을 비웃는 것 같아 힘껏 웃음을 참고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선물이네.”

나는 웃으며 잔을 받았다. 남자가 마주 웃으며 내 반대편의 의자에 앉았다.
 “칵테일이야. 싱가폴 슬링. 색깔이 아주 예쁘지?”

남자가 내게 잔을 내밀었다. 나는 작업 도구를 내려놓은 후에 조심스럽게 남자가 내민 잔을 받았다. 위에서 아래쪽으로 단계적으로 점점 붉어지는 색이 마치 지는 석양 같았다.

“한 모금 마셔봐.”

“음….”

내가 망설이자 남자가 가볍게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덧붙였다.

“괜찮아. 독한 술은 아니야. 음료수에 가깝지.”

남자를 바라보면서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달콤하면서 새콤한 맛이 입에 가득 찼다. 곧, 레몬과 시트러스 향이 잔잔하게 코에 흘러들어왔다.

“맛있군요.”

“그럼. 누가 만든 건데.”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한 마디를 덧 붙였다.

“그래도 진짜 ‘싱가폴 슬링’에는 미치지 못하지.”

“진짜?”
 “응. 싱가폴 슬링은 싱가폴에서 만들어진 칵테일이야. ‘래플즈 호텔’이라는 유명한 호텔에 있는 ‘롱 바’라는 곳에서 처음 태어났지.

그곳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마시는 싱가폴 슬링이 ‘진짜’ 싱가폴 슬링이야.”

“싱가폴…?”
 “그래. 작열하는 태양과는 무관하게 여유로운 사람들과 늘어진 야자수, 깔끔한 거리, 자극적이지 않지만 맛있는 음식들이 있는 곳이지.”

남자가 ‘싱가폴’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입 꼬리가 잠시 올라갔다.

나는 ‘싱가폴’이라는 나라를 상상해 보았다. 그곳은 내가 그동안 찾지 못한 어떤 이상향이 숨겨져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나의 진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석양이 지는 나라.

     

며칠이 지나고, 술을 사겠다며 나간 남자가 취해 공방으로 돌아왔다.

“자네. 사랑해본 적 있나?”

남자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작업을 중단하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나는 곰곰이 나의 과거를 뒤돌아보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이런. 이런. 사랑 한 번 안해 본 애송이에게 작업을 맡기자니. 이거 왠지 후회되는 걸.”

남자는 크게 웃으며 테이블을 몇 번 내리쳤다. 내가 남자를 쏘아보자, 남자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미안하네. 내가 조금 술에 취해서 실언을 했구먼. 미안하네.”

하고 사과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 조각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 때 갑자기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이봐! 물건을 만들어줘.”

남자는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테이블에 앉아 가져온 술병을 열었다. 나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조각칼을 조심스럽게 보관 통에 넣고,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병의 목을 잡은 남자가 얼음이나 레몬을 곁들이지 않고 바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혹시라도 남자가 넘어 질까봐, 테이블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남자로부터 멀리 떨어 뜨렷다. 테이블에 반쯤 누운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해보여서. 그 남자의 길고 얇은 손가락에서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나는 남자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으나 섣부른 위로는 때로는 상처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어떤 물건을?”

남자가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남자의 긴 속눈썹이 가지런히 정렬했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 정말이야. 당신 같은 멋진 예술가가.”

남자는 잠시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남자의 말에 반응하지 않자, 남자는 조금 맥이 풀린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번 빨아들이고, 자신의 세상에 가득한 안개를 깊이 내뱉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 그래서 아주 열심히 연습했어. 보이는 공간이라면 어느 곳에나 그림을 그렸지. 책상. 노트. 의자. 식탁. 그릇. 우유팩. 냉장고. 마루. 기둥. 핸드폰. 책. 이불. 등등…. 그릴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내가 그릴 수 있는 것들을 그렸어.

가끔 내 행동을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어.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나는 상처 입었지.

그래도 머릿속에 그림이 가득해서, 그림만을 그릴 수밖에 없었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시선은 날 점점 파괴하기 시작했지. 나이가 점점 들며 사람들의 날 보는 시선이 달갑지 않았어. 나이가 먹었는데도 정신 못 차린다. 뭐. 이거지.

하지만 자네도 알거야. 예술가라는 족속들은 말이야. 주위의 모든 것을 희생 시켜서라도 자신의 작품 하나만 나오면 장땡이라는 아주 이기적인 종족들이라는 걸 말이야,

당시의 나는 한 여자와 만나고 있었네. 그 여자는 내가 다니는 단골 카페 주인이었는데, 내게 벽에 그릴 벽화를 의뢰 했었어. 내 그림이 좋다며 말이야. 사랑했냐고? 글쎄…. 나는 그림밖에 모르는 바보 천치였어. 아니. 솟아오르기 시작한 내 감정을 외면 한 채 그림밖에 모른다고 믿었지. 그 당시 내게는 그림이 전부였으니까.

그녀는 내게 베풀었어.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 말이야.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게 와서 칭찬을 해주는 그런 것들. 없어도 모르지만 있을 때는 알아채는 그런 것들 말이야. 내게 다가와 새로운 메뉴인 방금 구운 쿠키를 건네며

‘당신이 처음으로 맛보는 사람이에요.’

라며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그런 것들. 그 당시의 나는 글쎄…. 누군가가 내게 호의를 건네는 것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았어. 그저 쑥스러운 미소로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그림에 몰두했지. 쿠키를 한 입 먹고

‘와. 대단한 쿠키에요. 모두들 좋아할 거에요.’

라고 대답했으면, 그녀도 한 번 더 나를 향해 웃어 주었을 텐데.

사실 그동안 내 그림은 아주 파괴적인 에너지와,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어. 하지만, 그녀가 내게 준 그 사소한 것들로, 나는 변하기 시작했지. 어느 순간 나의 그림은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어. 점점 밝은 색채를 쓰기 시작했고, 그림 안에 있는 인물들이 웃음을 띠기 시작했지. 그녀는 손님들에게 내가 그려가고 있는 벽화를 소개하고 자랑했어. 하지만 손님들은 모두 내 그림을 좋아해 주진 않았어. 깔끔하고 좋았던 카페에 뭐 이렇게 난잡한 그림을 그려놨냐며 나무라는 손님들도 있었지.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는 온몸이 발가벗겨진 듯 부끄러웠네.

나는 변화가 두려웠던 거야. 파괴와 분노로 내 삶을 지탱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 자리에 희망과 사랑이 들어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두려움에 휩싸였어. 그녀는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고 있었던 거지. 한 번도 닿지 못한 빛에 말이야.

그것을 깨달은 나는 괜히 그녀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어. 입에 머금었던 커피를 맛이 없다며 그대로 내뱉어 버리거나, 쿠키를 쓰레기통에 쳐 박는다던지. 아주 몹쓸 짓을 하곤 했어. 그래도 그녀는 그런 나를 이해해주었어. 조용히 미소로.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카페에 도착한 나는 내 벽화에 자그마한 낙서가 생긴 것을 알았네.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하트를 그리고 있는 자그마한 낙서였어. 나는 한눈에 그녀의 작품인 것을 금방 알았네. 정말이지…. 귀여운 낙서였어.

나는 마음속에서 뭔가 천천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는 것을 느꼈네. 여기서 한 걸음만 때 버리면 내 삶은 극적은 변화를 맞이할 거라는 것을 모든 것이 경고하고 있었지.

나는….”

남자가 빨아들인 담배의 끝에서 재가 허물어져 내렸다. 나는 그 모습에서 남자의 추락을 보았다. 남자는 멋쩍은 듯이 담배를 재떨이에 집어넣은 후 새로운 담배를 꺼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결국 한 걸음 물러나 버렸어. 어둠 속으로 숨은 거지. 나는 그녀를 밀쳐내고 일어나 벽화에 제일 왼쪽의 벽화가 있는 부분부터 지워내기 시작했어.

그녀는 멍하니 있더군. 잠시 후에, 그녀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내 뒤에서 들렸어. 나는 꿋꿋이 벽화를 지워나갔네. 그녀가 내 팔에 매달려도, 나는 벽화를 지워갔지.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지 말아줘요…. 나는 그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벽화를 지워버리고, 가게를 나섰지. 그리고 밤의 깊은 어둠 속에서 울었어.

뒤늦게 알아 버렸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어. 믿음. 우린 사람이야. 서로가 맘에 안 드는 점은 수도 없이 많아. 물론 나 자신에게도. 때론 서로에게 거짓말도 하고,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서로를 증오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믿음뿐이야.

맹목적인 믿음. 칼을 든 상대에게 목을 불쑥 내밀 수 있는. 불완전을 완전함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발걸음.

나는 결국 그 한걸음을 내딛지 못했어. 나를, 여자를, 사랑을 믿지 못했던 거지. 나는 그 이후로 그 카페를 가지 않기 시작했어. 그 근처를 아예 얼씬하지도 않았지. 몇 달이 지나고, 나는 버스를 타고 우연치 않게 그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아름답던 가게의 문 앞에 ‘임대문의’ 라는 빨간색의 섬뜩한 글자가 붙어있었네. 그때부터 나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잃었지.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

나는 그 부서진 마음을 다시 예술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어. 그래서 기다렸지. 다시 한 번 내게 영감이 내리기를.

하지만 결국 부서진 마음은 되돌릴 수 없더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서진 마음 틈 안에서 고름이 흐르면서 조금씩 마음이 떨어져 나가고, 내 마음을 구성하는 ‘핵’같은 존재만이 남았어. 지금은 서울에서 나름 규모 있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내 과거를 연상시키는 예술가들을 보면 마구 퍼주는 내 습성 때문에 통장 잔고는 늘 적자였네. 그렇게 내 좋을 대로 행동한 결과는 가족들의 가난으로 이어졌어. 결국 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셈이 되었지.

나도. 가족도.

내 마음이 부서져 있다는 것은 내 아내도 모르고, 내 딸도 몰라.

아무도 몰라. 단지 나 혼자만이 알 뿐이야.

부서진 마음에는 공허가 가득 차 버렸어. 한 번 비어버린 마음이라는 것은 늘 외로운 법이라 뭔가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하지만 공허가 들어찬 곳에 다른 것이 들어설 공간은 없어. 그저 모두 헛 것일 뿐이지.

나는 언젠가 아예 부서질 거야. 그걸 알아. 내게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하지만…. 내 아내와 내 딸은? 아내는 좋은 여자지만 뛰어난 여자는 아니야. 내 딸은 아직 어려.

자네는 아마 이해하지 못 할 거야. 예술가라는 아주 감성이 풍부한 직업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내 인생은 난해해.

알겠나? 나는 그저 공허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 공허로 가득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이야.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을 한 번 져버린 다음에는, 그저 술로써 나를 괴롭히고, 술로써 나를 즐겁게 하는 이것밖에 할 수 없단 말이야.”

잠시 숨을 고르던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여 몇 번 연기를 내뿜고는, 마지막 잔을 비우며 한 문장을 덧붙였다.

“자네는 사랑을 할 자격이 있어. 꼭 그리 될 거야. 하지만 나처럼 실패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테이블 위에 담배와 지포 라이터, 술병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남자가 결국 작품 의뢰를 하지도 않은 채 공방의 문을 열고 그토록 좋아하던 담배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가 떠나고 한참 뒤에, 어느 날인가. 나는 나무 조각을 다듬다가 내 마음 한구석에 생긴 어떤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갈망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갈망이 염원이 될 때마다 나는 남자가 이야기 했던 한 문장을 떠올렸다. 마지막 한 걸음.

나는 그 문장이 떠오를 때 마다 발을 들어 한 걸음을 떼어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평소는 그렇게 쉽게 때어지는 발걸음이 신기하게도 떼어지지 않았다. 그 한 걸음을 걷게 되면 나는 이제의 나가 아닌 내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들기도 하였다.

그 호기심이 끝에 달한 순간 나는 담배와 라이터, 술병을 들었다. 그 남자가 되어 마지막 한 걸음을 걷고 싶었다.

남자가 남기고 간 술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나는 그 남자를 위한 작품의 구상에 돌입했다.

나는 몽롱한 술기운과 연기 안에서 의뢰인이 되었다. 걷지 못한 한 걸음.

결국 부서지고 만 마음. 스케치를 마치고 난 후 나는 창고로 들어가 먼지가 가득 쌓인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핏빛을 띈 붉은 루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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