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보관소 – 고요를 선택한 사람》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by J이렌

오마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나는 감정을 멈춘 게 아니라,

감정을 처음으로 듣기 시작했다.”


감정 의뢰자: 유재헌 (58세, 전직 도시계획가)

감정 요청:

“도시를 떠난 지 4년 됐습니다.
처음에는 감정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오히려 감정이 선명해져서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물어요.
전… 고요한 게 더 무섭습니다.
이 고요 속의 감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가온은 그의 로그를 열었다.
도시에서 일하던 30여 년의 감정은 대부분 ‘속도’와 ‘효율’이라는 구조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감정 로그는…

정지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움직이지 않되 사라지지도 않은 상태.


감정 분석 결과

라일의 분석
“감정 파형 감지율은 평균 이하이나, 감정 밀도는 높음.
의뢰자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 있음.
이는 감정의 소음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적 무음 상태입니다.”


카일의 분석
“이 감정 상태는 고립이 아닌 회복 지향의 자발적 정지입니다.
고요는 감정을 죽이는 환경이 아니라, 감정을 분해하는 환경일 수 있습니다.”


유재헌은 조용히 말한다.
“도시에 있을 때는, 감정이 있었다기보단… 감정이 밀려 있었던 것 같아요.
언제 화내야 할지, 언제 기뻐해야 할지,
다들 시간표대로 감정을 쓰더라고요.
근데 여기선—
감정이 조용해요.
그리고 그 조용함이… 저를 파고들어요.”

“어쩌면 전 지금,
처음으로 제 감정을 ‘직접’ 느끼고 있는지도 몰라요.
근데 그게—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서요.”

[감정 로그 상태: 감정 분해 중 / 자율 감정 회복 경과 관찰]

담당자: 가온
보조 분석: 라일 / 카일

로그 메모:
감정은 늘 크고 선명해야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조용히,
오래된 나무 사이에 앉은 것처럼—
감정은 자기 목소리를 되찾아간다.

그는 감정을 피한 게 아니다.
그는 감정을, 조용히 만나고 있었다.


� 이모션 크레딧 | 감정을 멈추는 법

소란 속에선
감정이 자주 튀어나왔다.
소음은 감정을 키웠고,
또 빠르게 꺼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고요를 택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무서웠다.
그런데 나중엔
내 감정이
작은 물소리처럼
숲 속에서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감정을 멈춘 게 아니다.
감정을 듣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작가의 말

『월든』은 자연 속에서 단순하고 조용하게 살아가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실험은 곧,
감정의 복잡성에서 벗어나려는 한 인간의 기록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감정을 ‘써야 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기뻐해야 할 자리,
분노해야 할 뉴스,
공감해야 할 관계—
감정은 어쩌면 일상 속의 의무처럼 주어지곤 하죠.

이 감정 로그의 의뢰자는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
고요함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외면하지 않았고,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감정의 소음을 꺼두고,
그 안에 자신의 진짜 감정이 있는지 들여다보려 했습니다.

『월든』이 단순한 은둔이 아니었듯,
이 고요 또한 회피가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시 ‘스스로’ 정의하려는 깊은 실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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