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간 날
의뢰인 정보
이름: 윤해솔 (가명)
나이: 31세
직업: 전직 교사, 현재 요양 중
접수 감정: 오래된 연애의 끝에서 아직도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한 건, 그 사람 하나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이 바라보던 방식, 듣던 방식, 말하던 세계 전부를
사랑해 버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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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사랑한 건,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바라보던 세상,
그가 했던 말,
그가 좋아하던 책,
그 모든 것을—저는, 그대로 따라 했어요.”
그녀는 말한다.
사랑이 시작된 건 우연이었다.
카페에서 마주 앉은 낯선 사람,
깊은 눈동자 속 무심한 문장들,
시계를 보지 않고 시간에 대해 말하던 버릇.
“그 사람이 하던 말이 멋져 보여서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녀는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
그가 좋아하던 작가를 읽고,
그가 말하던 철학을 공부했고,
그가 꺼려하던 감정까지도
스스로 속에 가두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헤어진 후, 그녀는 문득
자신의 말투가 바뀐 것을 깨달았다.
말끝을 흐리는 습관,
침묵으로 대답하는 방식,
어디까지가 ‘나’였을까.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젠 기억나지 않아요.”
그녀는 감정 보관소에 그 시절을 맡기러 왔다.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 사람의 세계 전체를.
감정 그래프 (카일 제공)
• 회피: 92
• 정체된 안락함: 89
• 불안: 81
• 현실 기피: 86
• 자의식 낮음: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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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 분석 로그
『마의 산』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잠시 방문한 요양소에 점점 머무르게 되고,
결국 그곳에서 시간의 속도 자체가 변해버린다.
그의 병은 육체적 질병보다 더 깊은 감정의 병이다.
어떤 감정은 ‘병’이 아니라,
멈춰버린 시간의 흔적이다.
윤해솔 씨 역시,
‘병의 상태’가 아닌
‘병의 정체성’ 속에 들어가 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복이 아니라
정지된 시간을 원하고 있었다.
병든 몸은 회복을 향해 나아가지만,
병든 감정은… 때로 멈춰버리는 걸 택한다.
현실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자신만 정지된 듯한 체감 속에서
사람은 점점 ‘돌아갈 용기’를 잃는다.
몸은 멀쩡한데,
세상으로 나아갈 마음의 근육이 마비된 상태.
이 감정의 회복은 물리치료가 아니라
감정치료가 필요하다.
“지금은 쉬고 싶어요”라는 말 뒤에는
“사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가 숨어 있다.
고장 난 게 아니라,
길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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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션 크레딧 | 당신의 세계에서 나의 문을 찾기까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 세계는 때로 경이롭고,
때로는 질병처럼 퍼진다.
내가 그를 좋아했을 때
그가 좋아하던 것들도 좋아졌고,
그가 미워하던 말들도 나를 멈추게 했다.
그렇게 나는
그가 내게 열어준 창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창문을 닫는다.
내 세계의 문을 다시 찾아
스스로 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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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Thomas Mann의 『마의 산』은
단순한 요양소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곳은 시간을 잃고,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감정의 병’을 앓는 공간입니다.
질병, 시간, 인간의 깊이에 대한 명상이며
치유와 감염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아에 대한 소설입니다.
이 오마주 에피소드는
‘사랑이란 동화인가, 감염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누군가의 세계에 깊이 스며들었던 기억,
그리고 거기서 다시 자신을 되찾기까지의 시간.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날,
그 사람의 세계에 잠시 머물렀다면—
그건 결코 헛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세계를 통해 당신은 더 넓어졌고,
더 깊어졌으니까요.
우린 가끔 그런 산에 들러야 하죠.
그러나 거기에 머무를 것인지, 내려올 것인지는
오직 스스로만 결정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