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루프일지-(LOOP LOG) 루프 D-Day

Day 10 of the Loop - 루프 탈출

by J이렌

10화. “메일 초안은 작성됐다. 전송만 남았다.”

(자넷 vs 윌슨: 누적 기록의 날)


열 번째 루프.

자넷은 오늘도 새벽에 눈을 떴다.

출근 알람보다 먼저 깬 건, 이미 습관이었다.

이 회사에서 자넷은 리더였고,

윌슨은 그 위에서 리더인 척하며 리더십을 코스프레하는 독재자였다.

오늘도 프린터에서 익숙한 서류가 뽑혀 나왔다.

이틀 전이었다.

윌슨은 자넷을 불러다 놓고 또 엑셀을 문제 삼았다.

“자넷, 왜 이게 가로예요? 커미션은 세로가 기본이죠.

이건 내 스타일하고 안 맞잖아요.”

자넷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건 워터폴 형태고, 이건 분기별 트렌드를 보여주기 위한 구조입니다.

보고 대상이 다릅니다.”

“그래도 내 스타일에선 이건 아니에요.

그리고 이 페니 디퍼런스는 왜 이렇게 커요?”

“시스템 자동 계산된 수치입니다. 소수점 라운딩 차이일 뿐입니다. “

“그러니까요. 그걸 조정해 주세요.

숫자가 안 맞으면, 우리는 안 맞는 거예요.”

자넷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정확히 0.17달러.

윌슨은 그걸 “정확성 문제“라고 부르며 전체 리포트를 다시 만들라고 했다.

자넷은 속으로 비웃으며 생각했다. [0.17 소수점 에러 찾느라 백만 불 택스 에러도 못 찾는 주제에 꼴값은. 어차피 다음 회기 정산 때 조정 가능 하겠지만 나 아니었음 백만 불 이번 분기 과다 지출하고 깨졌을 거면서.]

그리고 그다음 날, 윌슨은 회의에서 자넷이 만든 리포트를 펼쳐 들고 말했다.

“저는 사실 이런 스타일 안 좋아해요.

엑셀 공식도 이건 좀... 복잡하잖아요?”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엑셀을 잘 몰라서겠지]

자넷은 속으로만 비웃으며 침묵했고

회의실에 있는 다섯 명은 말이 없었다.

크리스틴은 예의상 끄덕였고, 콜린은 웃지 않으려 애썼다.

도로시는 시선을 책상에 고정시켰다.

자넷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했다.

그리고 기록했다.

윌슨 말투, 파일명, 회의 일시, 코멘트.

그 모든 게 엑셀 파일에 시간순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이메일 작성창으로 돌아온 자넷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윌슨 VP는 반복적으로 사소한 수치를 근거로 리포트를 반려하거나,

개인의 작업 스타일을 문제 삼으며 실질적인 판단보다

기준 없는 ‘감’에 따라 업무를 지시합니다.”

메일을 다 쓰고 나니, 문장 수는 37개.

파일 첨부는 4개.

CC는 HR, Legal, 그리고... 도로시.

(bcc: 자기 개인 이메일)

잠시, 그녀는 손을 떼고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 위에 깜빡이는 건—“Send” 버튼 하나.

그때 도로시에게 슬랙 메시지가 왔다.

도로시:

오늘도 노티스 주진 않을 거죠, 그렇죠?

자넷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답을 보냈다.

자넷:

응. 오늘 저녁에.


사표는 출력되었고, 메일은 작성되었다.

자넷은 루프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기록하고,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루프는 끝나지 않았지만—

자넷은 준비를 마쳤다.

Janet_Resignation_Final_v10_REAL_REAL_FINAL.pdf

하지만 오늘은 그걸 들고 가지 않았다.

오늘은 다른 걸 준비했다.

메일.

To:

elliot.hwang@corpfinance.com

Subject:

Concerns regarding VP Wilson’s conduct and continued leadership suitability

CC:

HR, Legal

BCC:

janet.private@gmail.com

내용은 길었다.

말 대신 쌓아온 정확한 시간, 정확한 말투, 정확한 망신들이었다.


“March 11 – IRS Audit Call”

윌슨은 중간에 끼어들어 자넷의 질문을 끊었다.

“그런 건 지금 물어보는 게 아니죠.”

하지만 그 질문은, IRS가 요청사항을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에 맞는 정확한 질문이었다.

회의 끝나고 동료들이 자넷 편에 섰지만, 회의 중 윌슨의 톤은 법관 같았다. 심지어 회의 종료 후 따로 전화를 해서 언성을 높이며 삼십 분 정도 모욕적인 언사로 훈계했다.


“March 24 – Franchise Tax”

처음엔 ‘corporate tax’로 분개하라고 했다.

다시 지시를 바꿨다.

결국 자넷이 원래 분개한 ‘business tax’로 되돌아갔다.

세무 법인이 자넷 손을 들어줬다.

윌슨은 사과하지 않았다. 말도 안 꺼냈다.

틀린 건 조용히 묻히고, 맞은 건 시끄럽게 무시됐다.

“April 8 – $1M Discrepancy”

자넷이 발견했다.

윌슨은 동의하지 않고 자넷을 무시하고 회의 중 “의심스럽다”라고 했지만, 결국 외부 회계법인도 자넷 손을 들어줬다.

그 후에야 윌슨은 전화를 걸어왔다.

“그거, 잘했어요.”

하지만 공개적 언급은 없었다.

감사는 비공식, 비난은 공개.


“April 22 – Insurance Call”

새 지점 전세 보험 가입건으로 빌딩 건물 관리 담당자에게 직접 연락했다는 이유로 자넷은 윌슨에게 불려 갔다.

“그건 빌딩 관리자가 아니라 우리 지점 관리자에게 물어봤었어야지! 당신 지난번 회사에서 이런 거 처리 안 해 봤어요? 이건 우리가 정리할 부분이 아니야.”

문제는 없었다. 지난 회사에서도 건물 주나 그 대리인을 통해 건물 상세 정보를 문의했었고 항상 건물 대리인 또는 관리자들은 긍정적으로 응답했고, 일도 잘 해결됐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건물 관리자가 응답해 왔다.

문제는 윌슨이었다.

직접 해결한 사람을 혼내는 리더. “우리 회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아요.”라고 자넷을 혼내고 또 삼십 분 일장 연설..


메일은 이어졌다.

"May 9 – Profanity in meeting"

“이거 완전 crazy sh*t이잖아.”

자넷 바로 직속 직원 도로시가 작성한 IRS 제출용 문서를 보고 윌슨이 내뱉은 말이다. IRS 감사관이 요청한 방식대로 작성했을 뿐인데 문제는 본인 스타일이 아니라고 직원 앞에서, 회의 중, 소리치듯이.

문제는 문서가 아니라, 말의 방향이었다.

누구 앞에서 망신을 주느냐는 그의 일관된 방식이었다.

자넷은 슬랙을 열었다.

도로시에게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도로시:

“보낼 거예요?”

자넷은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려놨다.

커서가 “Send” 버튼 위에서 깜빡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그녀는 천천히 타이핑했다.

자넷:

“응, 전송 예약 걸어 놨어. 오늘 밤 퇴근 후, 윌슨이 전화 못하고 밤새 고민하게....”


자넷은 오늘도 루프 안에서

누군가의 말이 아닌, 자신의 감정으로 하루를 닫고 있었다.


[열 번째 감정 기록됨: 폭발 직전.

원인: 누적된 비웃음, 침묵 속 기록.

경고: 무기화된 감정의 구조화 진행 중.]


루프는 반복이 아니다.

자넷에게 루프는, 기억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 기억 중 하나는—

전송될 수도 있다.


다음날 아침 – 전송됨, 그리고 시작됨

오늘은 더 이상 루프가 아니다.


자넷은 눈을 떴다.
익숙한 알람, 익숙한 캘린더.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프린터는 조용했고,
슬랙도 열리지 않았다.

그 대신—
메일 하나가,
아주 조용히,
그녀의 아웃박스를 벗어났다.


“Resignation_FINAL_FINAL_v12_SEND.pdf”
보낸 시각: 오전 8:31
CC: HR, Legal, 그리고 자신
BCC: 미래

자넷은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건 확정이었고,
확신이었고,
확고한 감정의 정산이었다.

9개의 루프 동안
그녀는 무시당했고,
왜곡되었고,
지워졌지만—
오늘만큼은
그 누구도 그녀를 지우지 못했다.

회의실은 비어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윌슨의 목소리에 침묵으로 대했다.
도로시는 문자로 “축하해요”를 보냈고,
프랭크는 커피 이모지를 눌렀다.

그리고 자넷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하나씩 밟아 내려가며,
그동안 쌓아온 감정들을
한 계단씩 내려두었다.

건물 밖.
햇빛.
서늘한 바람.
그리고… 새로운 출근지 주소가 담긴 일정 하나.


“Day 1 – Orientation, 9:30 AM”


[마지막 감정 기록됨: 해방
원인: 기록의 완성과 감정의 승인
상태: 루프 종료, 새로운 루트 생성됨
전송 확인: 완료]


이제, 나는 나로 돌아간다.
직함도, 리포트도 아닌 이름 하나로.
그리고 그 이름은—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루프는 반복이 아니었다.
기억을 정리하고, 감정을 지켜내는 여정이었다.



퇴사란 건

종이 한 장이 아니고,

감정 하나의 서명이다.

매일 참는 대신,

오늘은 보내기로 했다.

말하지 못한 말들을,

지워졌던 나를,

펜으로, 손끝으로,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리고 문을 나섰을 때—

루프는 멈췄고,

나는

걸음을 시작했다.

출근은 회사로 가는 길이었지만

퇴근은 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제, 나로 출근한다.



작가 노트

사직서는 매일 썼고, 루프는 매일 돌았다.
그리고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다시 출근했다.


미국에서는 자진 퇴사 시 통상 고용주에게 2 주의 (10 영업일) 노티스를 주고 떠나는 게 관례입니다. 루프는 사표 제출한 후 지난 열흘간의 못 다하고 떠나는 말의 기록이었습니다.
저에겐 기억의 회계 장부였습니다.
감정은 자산이 아니라, 퇴사 사유의 누적 손실이니까요.

이 글을 쓰고 있던 저는,
지금 새로운 직장에서 첫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퇴사는 끝이 아니었어요.
이 기록은 제 감정의 회복이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저만의 작별 인사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당신이
아직 루프에 있다면,
언젠가 당신의 ‘전송 버튼’도 눌려지기를 바랍니다.

퇴사는 끝이 아니라,
감정이 나를 회복하는 시작이었습니다.


— 감정 백업 완료 후 전송한 사람, J이렌 드림


(이 글을 읽고 퇴사 버튼 누르실 분은, 꼭 복직 루트도 생각해 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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