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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Jun 24. 2023

복싱 도전기 (1)

햇수로 14년째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왔고, 복싱은 시작한 지 만 1년이 갓 됐다.



복싱을 하게 된 계기는 어린 시절 보던 만화책에 대한 동경과 오랜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오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편은 복싱을 시작하며 느낀 것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 보고,

다음 편에서는 보디빌딩식 웨이트 트레이닝의 크리티컬한 문제점과 이를 복싱으로 보완했던 것에 대해 다루기로 한다.


복싱 시작

더파이팅이라는 만화 나오는 기술과 장면들은 아직까지 슬램덩크의 명장면들처럼 회자된다.

멋진 등근육과 위빙, 더킹으로 주먹을 피하고 진짜인 듯 아닌 듯 비현실적인 펀치로 상대방을 쓰러뜨린다.

그런 동작들을 보고 있자니 저게 가능할까 싶으면서도 또 해보고 싶게 만든다.

 복싱기술(뎀프시롤, 가젤펀치, 화이트팡 등)이 재미있었다. 언젠가는 꼭 복싱장에 가서 직접 해보고 싶었다.


https://youtube.com/clip/UgkxMxkRWsP85Pf2wLTT0X8oSP55o4Dd8dn8


그렇게 마음 한 구석에 있던 복싱을 작년부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시내 몇 곳의 복싱장에 가봤지만, 대부분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위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복싱장에서 진짜 복싱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다 찾아냈다.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고, 그것도 엄청나게... 허름하지만 어딘가 예술적으로 보이는 인테리어들, 벽에 걸려있는 20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글러브, 심지어 요즘엔 당연한 샤워시설도 없고 어두침침한 지하에 있어 늘 어딘가 눅눅한 기운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여기가 끌렸다.

복싱은 헝그리 정신이라 했던가 그런 느낌에 빠져버렸다.


수 십 년간 복싱장을 운영하시며 선수들을 전문적으로 키우시던 할아버지 관장님께서 몇 해 전 돌아가셨고, 제자 중 한 분께서 유지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래서 복싱장에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었다. 나는 어느 복싱 체육관에 가도 다 그 정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 알았다... 이 괴물들...

그리고 갓 마흔이 된 관장님도 캐릭터가 엄청났는데 이 또한 나중에 알았지만,

사진 촬영도 하시고 정규앨범도 낸 실력파 인디밴드 리더였다.

현역 프로 복서이자 포토그래퍼, 그리고 밴드를 하는 관장님이다. 그리고 잘생겼다.

왠지 복싱장 구석구석 마이크와 엠프, 기타, 촬영용 조명들이 곳곳에 인테리어처럼 쌓여 있었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특이한 복싱장에 매료되 지난 일 년간 주 5일, 퇴근하고 3시간씩 복싱과 웨이트를 병행했다.



복싱장에 오는 사람들

복싱장엔 시간대 별로 이른 시간엔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가게 오픈전 왔다 가시고,

오후엔 학교 끝나고 오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차례로 온다. 그리고 저녁엔 성인들이 찾아온다.


초등학생 애들이 스파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소름 끼치도록 놀랍다.

링 아래 밴치에서 삼삼오오 핸드폰을 붙잡고 게임을 하며, 관장님이라는 용어가 어색한지, 관장님 대신 '선생님~선생님~'하던 아이들이 링에만 올라가면 가차 없이 상대방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는다. 그것도 엄청 잘...

그러다가 링의 종이 '땡!' 하고 울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방실방실 웃으며 뛰어논다.

이래서 조기교육이 무서운 건가 싶었다.

뭐랄까, 살아있는 생물, 인간을 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전쟁 고아들을 잡아다 암살자로 키우는 그런 스토리가 실제로 현실성이 있겠구나 싶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을 보면 유독 특출란 애들이 있다. 확실히 예체능은 재능이 9할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몸무게도 비슷비슷 애들이지만 유독 잘 치고, 순간적인 반응과 쎈스가 번뜩이는 애들이 있다.


그런 애들이 체육관에 열심히 나오면 학교에서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


누구나 운동을 하면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격투기만큼 직관적인 게 없다. 못하면 그냥 처 맞으니 말이다.

사람이 자기의 부족함을 직시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당장 운동에만 국한될 게 아니라,  운동에서 자기 관리를 할 줄 아는 애들이니, 그 외에 외형적으로도 스스로를 꾸밀 줄도 알고, 어떻게 해야 남들 앞에서 본인이 잘나 보일 수 있는지 아는 애들이다.

또 지기 싫어하는 투쟁심, 자기 자존감 그런 게 자연스럽게 길러지다 보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


당골 미용실에 토요일 오전 일찍, 오픈 직후에 간 적이 있다. 여성 디자이너 선생님들 10명 정도가 부산히 매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리를 하고 있었다.

담당 디자이너 선생님께 복싱장에 '이러이러한 이유로 멋진 남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연애를 하고 싶다면 복싱장으로 오세요'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주변을 쓱 보니 거기 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눈은 빗자루 질과 선반에 있는 미용 장비들을 정리하고 있지만 귀는 여기에 기울이고 있었다.



복싱장에서 처음 배우는 것

복싱장에 가서 처음 배운 것은 잽이다.

복싱을 잘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잽이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잽을 잘 날려야 그 경기의 흐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왼손잡이니 왼손이 훨씬 강하다. 그럼 반대손인 오른손 잽으로 툭툭 쳐주면서 간을 보다가 기회가 됐을 때 강한 왼손으로 스트레이트를 찔러주면 상대방에게 큰 대미지를 줄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를 해본 사람이라면 테란-저그전을 상상하면 좋다.

저그는 낮은 생산 단가로 끊임없이 공격유닛들을 뽑아 적에게 보내야 한다. 저글링 웨이브라고 불리는 전략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끊임없이 공격을 하면 상대방은 방어 하기에 급급해지고, 자기 페이스를 잃게 된다.

반격을 할 겨를이 없이 상대방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린다. 그 와중에 저그는 지상 공격 위주 유닛에서 공중 유닛으로 전략을 바꿀 준비를 다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공중 공격 유닛들을 보내면,

지상유닛을 방어하는데 급급하던 테란은 공중유닛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복싱도 똑같다. 잽으로 상대방과 나의 거리를 잡기도 하고, 짧게 툭툭 치다가 한 번씩 깊게 찌르는 잽으로 당황하게 하거나,

얼굴 위로 잽을 툭툭 치며 시야를 가렸다가 순식간에 앉아 상대의 배에 깊게 펀치를 집어넣어주면 쓰러진다.

모든 격투기의 기본은 상대가 예상치 못한 방향과 타이밍에 공격을 해서 대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인식하고 대비하고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건 매우 힘들다.


일상을 살아 가는데도 잽이 중요한 이유

잽은 늘 중요하다.

금연한 지 몇 년이 지났다. 끊기까지 끊임없이 잽을 날려 점차 피는 양을 줄이며 시도하다가 마지막에 크고 강하게 스트레이트를 찔러 넣어 깔끔히 성공했다. 한 번에 끊지 못해도 괜찮다. 끊임 없는 시도가 성공으로 인도한다.


바다낚시에서 수심 공략은 필수다. 감성돔, 노래미, 우럭, 볼락, 고등어, 전갱이, 벵에돔 등 어종마다 좋아하는 수심이 다르고 먹이활동을 하는 곳이 다르다.

그래서 방파제 낚시를 하러 가면 낚싯대 한 대로 먼저 바닥부터 수면까지 조금씩 수심과 미끼를 바꿔가며 어떤 어종이 있는지 보며 공략하다가, 내가 잡고 싶은 고기의 적정 수심을 찾으면 그곳을 집중 공략한다.


회사 일을 하다 보면 여러 유관기관과 업무 협의를 할 때가 많다.

어떤 업무를 협조할지 정하며 업무분장과 예산을 조율하는 과정에서도 마치 드라마 미생처럼, 상대기관과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방(공격방어)을 주고 받는다.

이런저런 스몰톡과 빅톡을 오가며 잽을 날리다가, 내가 얻어야 할 것을 빠르게 캐치하고 필요 없는 업무는 던져 쳐낸다.

잽인 스몰톡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가볍게 나누는 대화에서 의도치 않게 중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게 때문이다.

상대방의 내부적인 KPI나 가지고 있는 패(총 가용 예산, 본 업무를 통한 수익비율, 상대 기관 내부에서 누가 이 업무를 지지하고 또 반대하는지, 현재 내부 상황_인사이동 등)를 파악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패를 알면 그에 맞춰 제안을 하거나, 이런 업무는 그쪽 기관에서 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압박을 주기도 한다.


복싱장에 복싱을 아주 잘하는 선수출신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연애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다.

연애가 어렵단다. 어떻게 여자아이에게 다가가야 할지,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 어렵단다.

그래서 썸 타는 것을 잽에 비교하며 얘기한 적이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어리숙한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혼자만 감정적으로 앞서가서 좋아하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갑자기 급발진해 여자에게 고백한다.


갑자기 고백받은 여자는 당황하며 확신이 없어 일단 거절을 해버린다.

그렇게 별이유 없이 차이고 상처받은 남자는 또 혼자 마음 단념하며 떠난다.

잘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법한 관계도 바로 끝난다.

서로 호감이 있는 관계든 아니든 일단 잽을 날리면 좋겠다.

서로 뭘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툭툭 아주 가벼운 잽으로 상대방에게 나라는 사람을 인지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너랑 이런 걸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어디 어디 가보자라던가, 우리가 무언가 함께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는 기운을 담아, 조금 더 센 잽을 툭툭 날린다.

상대방에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마음을 열 시간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나 또한 상대방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링 위에서 잽은 그리 잘 치면서 왜 여기서는 못 치냐며 장난스레 다그쳤다.


이 별것 아닌 비유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연애에 성공했다. 연애에 성공해 복싱장에서 방실방실 웃고 있는 게 아주 귀여웠다.



기초 훈련과 첫 스파링

복싱을 시작한 지 거의 7개월간은 치아 교정 때문에 스파링을 전혀 못하고, 미트와 샌드백, 쉐도우 복싱으로 기본기를 탄탄하게 단련했다. 누군가는 지루한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너무 좋았다. 동굴 속에서 묵묵히 폐관수련 하는 기분이었다.


뭘 하든 간에 기본기가 탄탄해야 한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 중 하나는 처음에 잘 못된 자세를 몸에 새기면 나중에 곱절은 고생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벤치프레스도 그랬고, 스쿼트도 그랬다. 애매하게 배웠다가 아주 고생을 했다.

나는 벤치 프레스를 아주 좋아한다. 보디빌딩대회 유공의 9할은 내 대흉근이다. 벤치프레스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봉을 잡는 그립법, 봉을 잡는 넓이에 따른 자극부위와 젖꼭지 위치를 기준으로 봉이 위로 떨어지는 것과 아래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차이와 그렇게 되는 이유, 이에 따른 이두 삼두 어깨 대흉근의 개입 정도, 호흡법, 바닥에 발을 어떻게 두고 지지 해야하는지, 힙드라이브 쓰는 방법, 대흉근을 열고 광배를 닫아 안정성을 기르는 방법 등등

벤치프레스 운동 하나도 제대로 배우려면 몇 개월은 걸린다.


여하튼, 처음부터 관장님께 잽 하나를 배워도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금전적으로 많이 쓰긴 했지만 나중에 다시 되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교정하고 배우는 바보짓을 안 하기 위해  1:1 PT지도로 배웠다.

그렇게 7개월 동안의 기초 훈련 후, 교정기를 떼고 첫 스파링을 했다. 상대는 10년 이상 복싱에 매진한 발도 빠르고 가벼운 아웃복싱 위주의 육군 중위 출신 고수였다.

복싱대회는 나갔다 하면 가볍게 매달을 가져오는 분이라 긴장감 없이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겉보기에 몸은 내가 훨씬 좋지만 사람을 패기 위해 단련한 몸과 심미적으로 보기 좋게 단련한 몸의 기능은 달랐다.


패션 근육


패션 근육을 실전 근육으로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https://brunch.co.kr/@jackyd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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