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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Jul 16. 2023

나는 반딧불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 중식이 밴드 노래 '나는 반딧불' 중에서 -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고, 산이고 강이고 신나게 뛰어노니는 대한민국 시골 중산층의 자식이었다.


나는 커서 뭐라도 될 줄 알았다.

그냥 아무 노력 없이도 크면 뭔가 되는 줄 알았다.


대학에 가니, 처음엔 ’ 나한테 화났나?‘ 싶었던 경상도 사투리 친구도 사귀어보고, ‘뭐여’를 난발하는 재밌는 전라도 사투리 친구도 만났다.

똑똑한 사람, 멋지고 예쁜 사람, 엄청나게 부자인 사람, 내가 살던 작은 시골 양평은 비교할 바가 못되게 많았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되겠구나.

세상에 나가 현실을 마주하니 등에 식은땀이 나고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처음엔 재능 탓을 했다.

타고난 두뇌 탓, 피지컬 탓, 집안재력 탓, 나라 탓, 세상 탓

탓할 게 넘쳤다.

그렇게 탓하면 마음은 편했지만 내 상황은 나아질 게 없었다.

뭐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난 특별하지 않아."

이 한 마디를 인정하기 싫었다.


일 년 후 군대에 입대하고 다시 세상과 단절 됐다.

물리적으로 고립되고, 전남 해남의 땅끝 언덕배기 절벽에서 2년간 바다를 지켜봤다.

단독군장을 하고 총을 들고 하루 4~12시간 365일 매일 근무를 섰다.

레이더 기지 특성상 레이더 전파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정말 끝내주는 해안선 경치를 볼 수 있었다.

드넓은 해안선을 바라보는 건 밤에도 좋았고, 낮에도 좋았고, 새벽에도 좋았다.

왜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이 사람 살 수 없는 깊은 산에 들어가서 폭포를 마주하는지 공감했다.


자연스레 사색하게 되고 나를 마주 할 수 있었다.

 "난 특별하지 않아."



고립된 세상에 있다 보니,

여러 의미로 세상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고, 나 또한 그냥 수십 억의 인간 동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여실히 느꼈다.

“나는 우리 군병력 수백만 중 하나의 소모성 병사일 뿐이고, 전쟁이 나면 고기방패가 되어 주먹만 한 수류탄에 산산조각 나 시체도 찾을 수 없겠지,

내 옆에 누워 있는 이 빡빡이들 또한 다 똑같네, 명문대 다닌다는 이놈이나 소년원에 갔다 왔다는 저놈이나 그냥 다 똑같은 고깃덩이 방패에 지나지 않아. “


마음이 편해졌다.

“나, 너 그냥 다 똑같아.”


철봉에서 풀업을 해봤다.

한 번에 15개는 못했다.

“15개를 한 번에 하는 사람은 차고 넘치겠지, 근데 괜찮아 그들이 할 수 있든 말든 내겐 아무 의미 없어,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나 없나 그것만 중요해”

평범한 내게 철봉 15개는 대단한 목표였다.

15개를 해내고 나니 20개를 해내고 싶었다.

20개를 해버렸다. 그리고 30개를 하고 싶었다.

30개도 해내고 나니 40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0개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어느덧 50개를 할 수 있게 됐다.


20대의 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주체적으로 차근차근 해냈다.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운동하고, 알바를 했다. 그리고 해외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몸 파는 일 빼고는 다 해봤다’ 할 정도로 다양한 일을 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전단지도 뿌리고 마트에서 수박도 팔아보고, 공장에서 수개월 동안 인간 컨베이어 벨트도 되어보고, 공사장, 가구 납품일, 카페, 베이커리, 레스토랑, 헬스장, 심지어 군 복무 연장도 했다.

스스로 RPG게임 캐릭터가 되어 나만의 퀘스트를 하나하나 깨며 레벨업을 해 나아갔다.


불행히도 30대를 앞두고 다시 한번 고꾸라졌다.

그녀가 이제는 돈이 진짜 많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단다.

대학원에 다니며 변호사, 증권사, 외국계 대기업, 피트니스 모델 등등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다 보니 당신은 적어도 그 정도 사람은 만나야 급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그렇지 못한 나를 탓했다.

그래서 끝났다.

처음엔 자격지심에 더 예쁘고 몸매도 좋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멋진 여자와 연애를 해야만 이 거지 같은 기분을 보상받을 것 같았다.

이내 정신 차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이런 생각이 났다.

 ”‘내가 돈이 많이 없기 때문에‘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동시에 나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

사실 당시에 나도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설계를 하지 않았다. 당연히 준비도 안 했다. 어떻게 해야 가족을 이루고 부양할지, 위기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지는 몰랐다.

여하튼 이러나저러나 적어도 그녀는 나에게 아주 나쁜 X이지만, 동시에 나에게 아주 좋은 충격요법이었다.


한동안 현자처럼 세상 다 겪은 척 사색하며 멍 때렸다.

그러다 불교에서 나오는 ‘돈오’처럼 문득 깨달았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야겠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2년간 폐관수련을 하듯 다시 세상과 단절하고 삶의 판단 기준을 타인에서 나로 돌리는 데 주력했다.

퇴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운동을 했다. 자정이 넘어서도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고,

주말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를 하는데 매진하거나, 중랑천에 나가 러닝 하기를 반복했다.

나와 경쟁하면 언제나 승리자는 나였다.


남들에겐 별거 아닌 행동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이 별것 아닌 작은 행동들을 성공적으로 해낼 때마다

깨진 단전이 기적적으로 치료되 다시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된 무협지 주인공처럼,

사랑, 우정, 고통 그리고 성장이라는 클리셰 없이는 이야기 전개가 안 되는 소년챔프 만화책 주인공처럼,

이전보다 더 강해진 상태로 변하고 있다고 믿었다.

 

"오늘 하루도 끝내주게 보낸 나는 훌륭한 사람이야. 나는 평범하지만 대단한 사람이야. “


세상과 소통을 끊었을 때, 주변사람들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싶었고, 자기 치유력을 믿었다.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조용하고 고요하게 다시 해남 땅끝에서 바다를 보듯 사색하고 싶었다.

나를 손절하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마웠다.

태어난 지 30년쯤 지나면, 한 번쯤 핸드폰 메모리 정리하듯 인간관계를 정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추천).

주변 전화를 받지도 않고, 카톡을 읽지 않자 핸드폰 기본 메시지로 남겨 놓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힘내고, 다시 박차고 일어나 보자, 널 응원한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우리 형, 친구야 사랑한다”며 응원해 주던 몇몇 동생과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동했고 또 고마웠다. 이들이 내 남은 인생에 같이 가야 할 동반자들이었다.


땅속에 매미처럼, 땅 속에서 수년간 지상으로 올라오길 기다리는 죽순처럼 힘을 응축했다.

어느 날,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러닝을 하다가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달리다가 이내 울컥했다.

나와 유사한 상황에 처했던 누군가인게 분명하다.

아니 그냥 내 이야기였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는 중식이 밴드의 메인 보컬이자 본 노래를 작사한 정중식의 이야기다.

커서 뭐라도 될 줄 알았지만 아무것도 안된 자신, 방어기제로 남 탓, 세상 탓을 하다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취방에서 하염없이 멍하니 누워있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지어먹고, 설거지를 하며 그제야 무언가 하나하나 '성공' 해내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성공의 기준을 오롯이 중식이 자신에게 맞췄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성공의 기준을 낮추고 나니

성공에 대한 조급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 상황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모르고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나는 이제 먹고사는 데 큰 문제없게 됐다. 운이 좋았다.

인생은 운칠기삼이라더니 운구기일이었나 보다.

읽고 싶은 책 양껏 사서 읽고, 글도 쓴다. 주말엔 달리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달린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고 싶었던 복싱을 신나게 하고 있고,

친구들과 바다낚시 가서 밤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수다도 마음껏 떨고 있다.



힘냅시다.




[노래 링크] https://youtu.be/Fz1cJ5XRI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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