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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May 14. 2023

잘 만들어진 화장실 슬리퍼 같은 날

유연 근무를 쓴 지 몇 달 됐다. 그래서 그런지 관성 때문에 주말에도 6시 반이면 눈이 떠진다.

며칠 전 이틀 정도 연이어 비가 내렸고, 오늘 아침은 화창한 것 같다.


푹신한 침대와 두툼한 이불 사이에 있는 살결이 부딪치는 느낌이 퍽 좋다.

보송보송하고 또 부드러운 게 기분을 좋게 한다.

이불속에 있어도 화창함이 느껴지는 이 기분,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 하루 시작이 좋다.


30분 정도 유튜브 쇼츠를 휙휙 넘기다가

인터넷 뉴스 홈에 들어가서 여러 기사를 훑어보다 보니 또 스륵 잠이 들었다.


한 시간 뒤에 깨어나, 침대에서 엎드려 비비적거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나는 산지 5년 정도 된 뉴발란스 반바지를 참 좋아한다. 다른 운동복 바지도 많은데 유독 이게 좋다. 조금 더 낡았고 살짝 빛바랬지만 허벅지 살 결에 닿는 부분이 해져서 그런지 부드럽고 매끄러워서 좋다. 

바지가 나한테 맞게 바뀐 것 같다.


두툼한 회색 후드 집업에 나이키 모자, 페가수스 러닝화와 무릎보호대를 차고 중랑천으로 나갔다.

중랑천으로 가는 길은 살짝 춥다. 

빌딩과 건물들 사이에는 아침 일찍 해가 들지 않는다.

1킬로 정도 걷다가 해가 선명하게 비치는 중랑천입구로 내려간다.



나는 러닝을 하며 라디오를 듣거나 노래를 듣는 게 너무 좋다.

이순간부터 나만의 세상에서 내가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다.

이보다 주체적인 행위가 없다. 그 어느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이 행위를 한정할 수 있다.

별 것 아닌 이 작은 행위가 오늘 하루 무언가 해냈다는 나의  작은 ‘효능감’을 올려준다.

이것 말고도 또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운을 얻는다. 건강은 덤이다.

사람은 꾸준히 자기 효능감을 채워나가야 한다.



러닝에도 묘리가 있다.

목적에 따라 트레이닝 방식을 달리한다.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최대한의 파워를 내게 해줄 심폐 기능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반면에 긴 거리를 오래 달리게 해 줄 수 있는 근지구력과 심폐기능이 필요한 사람의 훈련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예컨대, 복싱과 같이 제한된 라운드에 따라 호흡을 조절하며 강력한 힘을 내야 하는 사람은 1킬로미터당 3~4분 수준의 러닝 속도로 3~5킬로미터를 뛸 수 있어야 한다.

10킬로 이상의 장거리 런너들은 킬로미터당 6~7분 정도가 적당하다.

물론 장거리 런너들도 대회에서 입상할 수준의 애슬릿이 되려면 3~4분 대로 맞춰야 한다.

다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러닝 후, 신체 반응에 따라 본인이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검진을 해볼 수 있다.

예컨대,

정강이 앞 근육이 땅기고 아프다면, 달릴 때 필요 이상으로 발목에 힘을 주고 발끝을 위로 세워 착지한다는 것이다.


무릎과 햄스트링에 통증이 있다면 아마 착지할 때 발 뒤꿈치부터 땅에 닿았을 것이다.

뒤꿈치가 먼저 닿게 되면, 그 압력이 고스란히 무릎으로 갔을 것이고, 몸을 마치 바운스 타듯 쿵쿵거리며 달렸을 것이다.


달리기도 알아야 잘 뛸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흔한 증상인 허리 통증이 있다.

달리고 나서 허리가 아픈 이유는 허리가 과신전 됐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쉽게 말해 허리가 섰다는 것이다. 힘들면 턱이 올라가고 가슴은 하늘을 보며, 허리는 활처럼 휘어진 상태로 달리게 된다.

무게 중심이 불안 정한 허리로 집중되고 통증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자기가 가진 체력에 비해 빨리 달리려고 했고, 달리다가 숨이 찬 게 그 원인이다.


욕심부릴 필요 없다.


천천히 뛰다 보면 체력은 자연스레 올라가고 또 더 빠르게 멀리 뛸 수 있게 된다.


김창옥 교수가 말하길,

더 많은 해산물을 캐려고 물속에 오래 있다 보면 병에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 해녀들은 이런 말을 한단다.




 '니 숨만큼만 해라'



달리기도 내 숨만큼만 뛰면 된다.



달리기를 마치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어제 끓인 갈비 된장찌개를 마저 먹는다.

회사 동료에게 줄 파일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마무리 짓는다.

이제 11시 반 정도 됐다.


집 근처에 조용하고 창가자리 외에는 어두침침한 카페가 있는데 나는 거기가 참 좋다.

주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일본어 공부를 하러 간다.

나가기 전에 다시 머리를 만지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샤워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아직 젖어 있지 않을까?' 하던 슬리퍼가 벌써 말라 있다.


필라테스 폼롤러나 매트 소재로 쓰이는 푹신한 에바(EVA) 소재다.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서 물이 금방 빠지고 금세 마른 것 같다.


화장실 슬리퍼는 금방 마르고 또 젖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게 최고다.

더할 나위 없이 잘 만들어진 완벽한 제품이다.


오늘 하루도 이 잘 만들어진 슬리퍼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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