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준비 때, 공기업과 소방 공무원을 동시에 준비했었다.
결과적으론 공기업으로 가게 됐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엔 소방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는 지금 공기업에서 해외 마케팅을 하고 있다.
우리 국내 중소중견 기업이 해외 바이어를 찾고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다양한 마케팅 수단을 통해 지원한다.
19년도, 내가 한창 신입사원으로 반짝반짝할 때
사기업 쪽에서는 SNS를 활용한 마케팅이 서서히 활성화되고 있었고, 당연히 공공기관 쪽엔 아주 생소한 마케팅 수단이었다.
(검증되지 않는 방식엔 예산도 없고, 승인받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가 뒷광고 사태가 터지고 자기가 좋아하던 유튜버들이 몰래 돈 받고, 기업 제품 홍보를 했다며, 비난을 받은 유튜버들이 은퇴를 하기도 했다.
반면, 해외에서는 뒷광고라는 게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앞으로 받든 뒤로 받고 하든 그게 Why not? Who cares?
그래서 해외에 있는 소비자나 바이어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하는 우리 팀은
①국내에 거주하고 있고, ②해외 구독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③유튜버들을 찾아 그들에게 국내 중소기업들의 제품 홍보를 부탁했다.
또는 지자체 행사나 전시회에 초청해 마케팅을 했다.
여담이지만, 국내에 유학을 왔던 어떤 중남미 친구는 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페이스북으로 한국 남사친들과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했다가 그게 대박이 나서 유튜브를 시작했고, 한국 문화를 알리는 컨텐츠를 주로 하는 구독자가 100만 명이 훌쩍 넘는 파워 인플루언서가 됐단다.
여하튼, 당시엔 인플루언서 사업이 잘 먹혔다. 마침 해외 판로를 확대하려던 국내 화장품 기업이 대박이 났다.
만족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니, 이제는 당시의 뿌듯한 마음을 떠올리며 누군가에게 선뜻 이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그렇다.
이제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마케팅 수단이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다시 몇 년이 지나면 ‘아 언제 적 인플루언서 마케팅이야~ too old-fashioned~’ 하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
우리 회사는 정년퇴직하시는 분들이 이메일로 임직원 전체에 퇴직인사를 하는 문화가 있다.
사장님 이하 임원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사람, 퇴직 후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며 창업에 관해 적거나, 새로 입사할 회사에 대한 정보와 함께 연락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메일이 내게 날아와 비수로 꽂혔다.
내용의 주제는 아쉬움과 후회인 것 같았다.
뭔가 더 잘해볼 수 있었을 텐데, 또 내가 했던 것이 무엇일까 하는 복잡 미묘한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30년간 속한 이 회사에서 작은 세미나를 기획하는 일부터 대통령 해외 순방을 위한 경제외교 사업까지 다양한 일을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거친 파도가 있는 몇 곳의 해변을 거치면서 모래사장에 족적이라도 남겨보려 애썼습니다만 지금은 바람결에 날아가 지워졌을 것입니다.
지난 30년간 이 회사에서 많은 걸 했지만 뒤돌아 보니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 건지, 초연한 마음으로 적으셨던 걸까. 잘 모르겠다. 다만,
몇 년간 내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던 어떤 감정과 이 글이 섞여 명치 아래를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과연 내가 열정을 다했던 일이 나중에도 당시의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메슬로의 욕구 계층을 보면 저 아래 생리적 욕구부터 한층 한층 올라가다 보면
‘인정과 존경’의 단계를 만나고, 이를 뚫고 올라가야만 비로소 제일 상단에 있는 ‘자아실현’의 경지에 이른다.
과연 나는 나의 자아실현을 위해 그 단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나중에 추락하는 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참 역설적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해야만 인생 마이웨이 자아실현을 달성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치 무협소설에서 무참히 모든 생명체를 도륙하는 마(魔)의 시기를 거쳐야만 탈마의 경지 그리고 천마가 되고 우화등선 신선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싶다.
얼마 전,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서 자살 소동이 있었다.
나는 4층에 사는데 일요일 밤 10시쯤 더워서 창문을 열어놨더니
누가 계속 알 수 없는 소리로 흐느끼듯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또 누가 술 먹고 소리치나 보다 하고
조용히 시키려고 창문으로 다가갔더니,
아래층에 20대 여자가 몸을 반쯤 창가에 걸치고 울고 있었다.
정말 깜짝 놀라서 오메! 소리가 나오는데 깜짝 놀래키면 떨어질까봐 나오는 숨을 참고, 상황을 파악했다.
‘죽고 싶어요, 너무 힘들어요,’하며 목이 쉬도록 소리치고 울부짖고 있었다.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을 느낄 정신이 있어야 느낀다던데, 정말 죽을 만큼 힘들 땐, 그런 건 느낄 새가 없겠구나 라는 걸 여실이 느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울증이 있었고 연인관계 문제와 삶에 대한 비관이 원인이옸
여하튼, 나는 즉시 신고했고, 경찰과 소방이 도착하기 전까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와주겠다, 누가 못살게 했냐, 내가 아주 혼꾸녕을 내주겠다’며 온갖 소리를 다하며 말을 걸었다.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경찰과 소방에서 20명 정도가 도착했고, 일사불란하게 1층에 매트를 깔고 뛰어내릴 듯하는 여성의 옆집으로 소방관님들이 들어가 구출했다.
멋있다.
존경한다.
감사하다.
사람의 생명의 가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10년 후에도 똑같을 것이다.
정말 직관적이고 뚜렷한 지표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소방관이 되고 싶었고, 여전히 동경하는 이유다.
소방관은 사람을 구한다.
1년에 364일 벌집을 떼러 가거나, 나무에 매달려 있는 고양이를 내려도
단 하루, 사람을 구했다면
그 한 해는 정말 가치 있는 한 해가 됐고 뿌듯해 하지 않을까 싶다.
현대 마케팅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코틀러 교수가 [마켓 4.0]에서 이르길,
"인류의 복지와 지구를 위해 마케팅의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기여도를 높여줄 다음 세대의 마케터와 행동경제학자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라고 했다.
이분은 자신의 인생을 바친 마케팅에 이런 의미를 부여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는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지 고민해 본다.
1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먹고 사는데도 급급한데 무슨 의미가 있고, 가치가 중요하냐며 속 편한 소리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살기 위해 한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 한다.
처한 상황이 같아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그들과는 다른 중력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