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정석 Oct 31. 2018

나만의 어른다움'학'

나의 어른스러움을 향한 소박한 연구

    내가 생각해도 나는 어른스럽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이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택시를 탈 때마다 듣는, 이런 말 때문이다.

학생답지 않게 어른스럽네 말투가!

    그렇다. 나는 택시를 탈 때마다 이와 유사한 말을 높은 확률로 듣는다. 왜 하필이면 택시인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게 말해줄 만큼 내가 어른스럽다는 말인가? 내가 스스로 어른스럽다고 자랑하거나 떠벌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비슷한 말들에 조금은 반항심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는, 어김없이 택시를 탔더니 기사님이 내 말투를 보고 전역한 군인의 말투 같다고 했다. '군인'의 말투? 과연 군인의 말투는 무엇일까. 내가 각 잡힌 어투로 말을 던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유 없이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런 상황은 부모님과 동행하며 새로운 어른들을 만날 때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그저 나답게 행동했을 뿐인데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고등학생에게는 그저 겉치레로 어른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중학생 때에는 칭찬으로 받아넘기곤 했는데,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왠지 어른스럽다는 말이 내게는 이상하게 들렸다. 왜 나는 어른스러운 걸까. 마치 내가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너답지 않아'가 아닌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 옷'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도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어른스럽다는 말은 칭찬인데, 마음속에서는 비꼬는 거라고, 사실은 진심이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거북한 칭찬에 갖게 된 이유모를 거부감의 원인을 나름대로 찾아보려 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 손잡고 누군가라도 만나면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디든 가면 부모님 옆에서 누군가에게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듣는 어른스럽다는 표현이 실제로는 예의 상 하는 말에 불과하지만, 이런 말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는 동행하는 부모님의 멋쩍은 반응을 보고 칭찬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어른스럽다'는 말에 갖는 인식은 칭찬이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어른스럽다는 말이 실제로는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고, 동시에 조금씩 자라나는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적어진다. 그런데 나의 경우, 자라면서도 어른스럽다는 말을 계속 들어왔고, 심지어 최근에는 더 자주 듣는 것 같다. 왜 이런 것일까.


    어른이 고등학생에게 어른스럽다는 말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일단 부모님 외에는 산더미 같은 공부량에 떠밀려 다른 사람을 만날 여유도 없거니와, 부모님과도 대화를 거의 않는 학생들이 많다. 곧 있으면 진짜 '어른'이 될 사람에게 어른스럽다고 하는 것도 무언가 이상하다. 왠지 어른이 될 준비가 잘 되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런 모든 어려움과 불편함을 뚫고 고등학생이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을 때는,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어릴 때의 형식적인 면보다는 진심이 담긴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불편한 것일까.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무의식이 있으며, 순간적인 판단이나 대상에 대한 막연한 인식은 무의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무의식은 꿈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개인이 흡수하는 모든 자극들을 뒤틀리고 추상적인 메타포로 전환시킨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보고 들은 내용들은 무의식의 일부가 되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나의 무의식이 '어른스럽다'는 자극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참조하여 어떻게 해석했을지 짐작해보자.

1. 어른스럽다는 말은 아이 때 많이 듣는 말이다.
2. 주로 어른이 아이에게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다.
3.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생이 되면 더 이상 듣지 않는다.
4. 내 주변에는 이런 말을 듣는 아이들이 적다.

    나의 무의식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해당 표현은 나와 내 또래들이 공통적으로 들었던 형식적인 표현이지만, 이제 내 주변의 함께 자란 아이들 중에는 자주 듣는 경우가 없다. 그러므로 '어른스럽다'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어린 상태와 연관을 갖는다. 주변 아이들 중에 나만 이런 표현을 계속하여 듣고 있으므로, '나는 아직도 남이 보기에 어리다'.


    물론 나의 의식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멋쩍은 칭찬으로 받아들일뿐더러 이렇게 뒤틀린 생각으로 해석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나에게 부여된 어른스러움에 막연한 부담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프로이트의 책을 읽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른스러움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이 내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일은 결국 나의 무의식적인 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의식은 우리의 또 다른 인격이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의식은 보고들은 모든 것을 한 구석에라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오래전에 방문한 곳이 꿈에 나오거나 아주 사소한 경험이 과장되는 꿈을 꾸는 것도 모두 무의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의 무의식은 마치 무수한 작업 파일들 속에 정리되지 않고 남아있는 폴더와 같아서, 언제라도 우리의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는 것, 결혼할 때는 상대의 부모를 꼭 만나라는 것 등의 격언 아닌 격언들은 모두 사람의 경험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경험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모여 내가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보고 듣는 것과 행동을 자연히 조심하게 된다. 내가 오늘 들은 사소한 내용 하나가 내 인생을 바꿔놓을지도 모르고, 내가 뱉은 말 하나가 또 다른 이의 인생을 얼마나 바꾸어놓을지 모르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자극들 중에 좋은 경험과 생각을 내 무의식 속에 잘 넣고, 또 다른 이에게 잘 분별하여 선사하는 일, 그것이 정말 어른스러운 일이 아닐까.


어른스러운 것과 어른다운 것은 다르다. 양쪽 모두 비슷한 의미지만, 어른스럽다는 표현은 성인이 되고 나면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마치 인성의 필즈상 같은 말이다. 수상 자격을 박탈당하기 전에, 진짜 어른이 되기 전에, 어른스럽다는 말 미리 한 번 들어보자. 어른스러워지는 일은 선행 학습해도 좋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소심한 나와 너를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