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자정을 넘은 시간, 아버님의 병환 소식을 알리는 선배의 글을 보고 문득 상념이 많아진다.
그 선배님만큼 급작스러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난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려야 했다. 아버지는 워낙에 두주불사 하시는 분이셨지만, 대신 그래서 더 걱정이 되셨던지 건강 또한 당신 스스로 진료 분야별 찾아다니는 병원이 따로 있으을 정도로 꼼꼼히 관리하시던 분이었다.
어머니가 유난스럽다고 모라고 하셔도 꿋꿋하게. 한편으론 사람을 좋아하시며 꽤나 약주를 많이 하셨던 아버지 셨기에, 술은 도저히 못 끊는 대신 스스로나마 그렇게 관리를 열심히 하시나 보다 했었는데..
갑작스러운 혈뇨 등 몇 가지 증상이 이상해서 정기적으로 검진받으며 다니시던 병원에서 검사를 몇 차례 해봐도, 특별한 문제는 없다는 얘기에 몇 개월 시간을 더 허비했다. 그러다 증상이 점점 심해져서 이를 호소하니 조직검사를 해보자 해서 해 보았지만, 여전히 크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병원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는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고,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증상이 심해지셔서 다른 더 큰 병원에 갔더니 이미 희귀 암 말기라는 진단이었다. 그나마 의사 선생님께서 급하게 일정을 잡아주셔서 긴급히 대수술까지 했지만, 이후 항암치료를 받으시면서 약 1년 반 정도의 짧은 투병기간을 거쳐 결국 집에서 임종을 지켜드려야 했다.
이래서 ‘집안에 의사는 하나 있어야 한다’는 말들을 하던 건가 싶더라. 두 군데 병원 모두 다 서울에 있는 큰 종합병원이었는데.. 그땐 참 병원도 밉고 의사도 밉고 싫었다. 수술을 했지만 이미 전이가 많이 되어 수술로 다 제거할 수가 없다고, 일부는 긁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둔 채 닫았다더라. 남은 암은 방사선 등 화학치료로 가야 한다고. 사람의 운명이란 게 참 덧없이 느껴지고 나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부정적인 수술결과도 전해 듣고 이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하는지 가족들이 고민도 많았다. 평소 씩씩하시던 어머니는 심장이 떨린다고 겁이 나서 의사와 직접 대면도 피하셨고, 나중에 따로 자식들에게 전해 들으셨다. 어쨌든 아버지께는 치료에의 의지를 가지실 수 있도록 보다 긍정적으로 말씀을 전해드리게 되었고, 길고 힘든 치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얘기에도 살아는 있으니 실낱같은 희망이니마 가지셨었다. 1년 가까이 진행된 치료 뒤.. 결국은 얼마 못 버티시겠다고, 힘들 것 같다고 하는 의사의 선고에 어머니는 병원 바닥에 주저앉으며 오열하셨다.
한평생 투닥투닥하며 살아오시다 '너희 아버지 이렇게는 못 보낸다' 며 울음을 터뜨리는, 내겐 언제나 강인하게만 보였던 어머니의 그런 맨바닥의 감정표현을 본 것도 생전 처음이었고, 나 역시 드라마에서나 보는 장면들 같은 비현실감과 당혹감, 그 뒤 밀려오는 슬픔에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고모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작은 아버지까지 보내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까지 그렇게 가버리셨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어느새 꽤 세월이 흘러갔다.
양방의 화학치료를 중단한 후에는 한방이나 양한방 협진, 첨단 로봇수술 등 여러 병원을 돌며 여러 방법을 찾아봤지만.. 마지막엔 통증 관리에 주력하면서 자주 찾아뵙고, 식사하실 수 있으신 동안 이것저것 좋아하시던 거, 몸에 좋은 음식들 원 없이 드시도록 가까운데 위주로 다니거나, 사들고 가서 같이 식사하고 말벗해 드리는 게 아버지와 가족에게 서로 최선인 것을 깨달았다.
가난한 집안,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열심히 노력하여 자수성가해 이루어오신 당신의 인생처럼, 아버지는 목표의식과 의지가 누구보다도 강한 포기를 모르는 분이셨다. 그랬기에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건, 어느 순간 아버지가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하셨는지 열심히 치료를 받아 완쾌하시려는 마음을 내려놓으신걸 처음으로 느꼈을 때였다.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 수첩에 적어놓으시며 지키려고 노력하셨었는데.. 아마 처음 아버지의 암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어쩌면 그런 무너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느껴졌을 때 더 당황스럽고 더욱 가슴이 아팠던 것 같다.
당신의 생을 어떻게 정리할지, 그동안 많은 시간 함께하지 못하고 고생만 시켰던 어머니에게 '고맙다' 하시며 함께 하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시던 아버지. 찾아올 자식들을 생각해 고향 선산에 묻히시는 걸 포기하고, 당신이 누울 자리를 알아보라는 마지막 미션을 형과 나에게 주시던 그 모습이 새삼 그리운 밤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임종을 지켰던 그 밤, 아버지의 숨결이 잦아들던 마지막 그 순간은 내 머릿속에 지울 수 없는 화인처럼 남아 있다.
그 순간은 정말 예기치 못했을 때 갑자기 닥쳐오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더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숱하게 보아오던 그런 모습은 아니더라. 마지막으로 한번 쳐다봐 주시고, ‘아비 없어도 엄마 모시고 잘 살라..’는 그런 류의 말 한마디 해 주지도 않고 가시는 게 원망스럽기도 하더라. 가쁜 숨, 그 힘없는 숨소리조차 점점 짧아지고 간격이 길어지고, 초점은 흐려지고.. 그렇게 조용히 잠드시더라.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덧없더라...
이제 내가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자식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나의 과거가 수시로 소환된다. 어떤 상황 상황들, 어떤 순간순간마다 그땐 그랬지, 이런 비슷한 순간이 있었지 떠오르며, 아버지가 그때 왜 그러셨는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때 아버지 마음이 어떠셨을지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에 후회가 사무친다.
이렇게 한 개체가 점점 더 인간이 되어가는가 보다.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을 반추하며 내 자식들을 조금씩 더 성숙하게 돌보는 부모가 되어가는 것인가 보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신 모든 분들께 감히 한 말씀드리건대, 짧은 시간이나마 지금이라도 부모님과 많은 시간 함께 하시고, 가슴이 많이 아프지 않을 때 조그만 추억이나마 더 함께 만드시면 좋겠다. 가시고 나면 그 순간부터는 모든 게 돌이킬 수 없고 후회만 될 뿐이니.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더 에이고, 지나간 세월 아버지에게 상처가 되었을 말 한마디 한마디와 내 행동들 하나하나, 회한이 깊어지는 밤이다.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띠띠띠 도어록 해제하는 소리가 들리며 큰 아이가 들어왔다. 이제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버린 아이. 시계를 보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일찍 일찍 못 다니니? 어쩌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이게 뭐 하는 짓이니!”
신경질적으로 나오는 내 말에 아이는 쥐 죽은 듯한 소리로 “응..” 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휴.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도 말할 때만 알겠다고 대답하고 행동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 녀석이 답답하고 화도 나고 원망스럽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 식으로 말하고 나면 1분도 지나지 않아 후회가 밀려온다. 괜히 또.. 그 나이 때 다 그렇지 뭐.. 하면서 나 젊었을 때를 생각해 보기라도 할라치면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속을 썩이고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잔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이 녀석은 그렇다고 중2병이나 사춘기를 걱정할 만큼 크게 엇나간 적도 없었고, 공부도 나름 자신의 승부욕 때문에 벼락치기라고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노라면 참 고마운 녀석이다.
그럼에도 맏이라는 이유로 어렸을 적부터 참 많이 혼나기도 했다. 이후 같은 나이 때의 둘째에게는 훈육을 하지 않는 일도 큰 아이에게는 왜 그랬을까. 나도 첫 부모 역할이라 아무것도 모르기도 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또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는 언니가 둘째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몫했더랬다. 상념의 날개는 이번엔 큰 아이가 갓난쟁이였을 때로 떠나고 있었다.
곤히 자고 있는 15평 작은 집의 침대에서 오늘도 아기 울음소리에 눈을 떠버렸다. 밤새 울 것 같던 아이를 계속 업어가며 간신히 재운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엄마는 나에게 SOS를 보냈고, 난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며 아기를 안은 채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가 얼러주며 업었다 안았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러다 울음은 차츰 잦아들었고 안고 있는 아이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다 보니, 짜증 속에서도 나도 모르게 피어난 미소가 내 입가에 걸렸음을 느낀다.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야, 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볼까?"
아기는 자장가 같은 내 목소리에 안정을 찾은 듯 잠잠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기 때는 남자의 중저음에 더 안정감을 느낀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는 듯했다. 한 줌도 안 되는 이 작은 생명체가 그 순수한 눈으로 뭔가를 이해하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네 할아버지는 정말 강한 분이셨단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신 분이었고, 언제나 옳은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하셨어. 하지만 아빠는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구나. 이제는 아빠가 그 길을 걸어가게 되겠지.."
물끄러미 쳐다보며 얘기를 하다 보니, 아기는 다소 평온해진 듯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자장가를 듣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작은 입맞춤을 하며, 아버지와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런 밤들이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수첩을 다시 찾았다. 수첩은 아버지의 일상기록을 담은 일기이자,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의사 선생님이 한 말을 꼼꼼히 메모해 두고 매 끼니 식사 내용과 처방약에 복용 기록을 빼곡히 적어두시는 투병일지이기도 했다. 수첩에는 작고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찬, 아버지가 의사와의 상담에서 적어 내려간 메모들이 있었다. 그 메모들은 아버지의 긴 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매주 月 하교수 진찰, 매주 木 채혈 실시”
“방사선 2회 차 치료, 15시 박대표 문병 전화”
"오늘 진료 결과 : 혈액검사 특이사항 없음. 약물 변경 필요 없음."
“7/14, 16시 하교수 : 채혈검사 재실시했으나, 면역체계 미회복으로 금주는 방사선 치료는 중지하고 내주 월요일 보자고 함
"고통이 매우 시해서 치욕적인 생각이 들다. 오늘은 아들이 일 때문에 못 와 부인과 전차로 귀가"
“셋째 삼계탕 준비 기특 (며느리가 더욱). 재 앞 챙기기에 급급한 자식도 있고 각색이다.”
“아버지의 허전함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는 배려도 고맙다.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과가 문제가 아니라 미치는 마음 영역이 중요한 것이다”
“영 겉도는 인생이라 허망함을 불금한다. 온다 간다는 말도 실질적으로 뛰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알면 그만인 셈이렸다. 바람이나 쐬자, 세상이 오직 혼자 뿐인 것을”
“진통제 아이알 코톤정 (5mg) : 02:10, 11:45, 13:30
옥시콘틴 서방정 (10mg) : 07:20, 15:30
식욕촉진제, 한방 캡슐 (10:10, 15:30), 탕약 (10:20, 15:30)
오늘의 배변.. "
이렇게 한 줄 한 줄 적혀 있는 글들을 보니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가 용기를 내어 병과 싸우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과 걱정들을 하셨을까. 어떤 날은 자식들의 문병과 식사가 흡족하셨을 테고, 어떤 날은 우리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못내 서운하셨던 게다.
아버지의 마지막 여정을 추억하며, 나는 그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단순한 몇 마디가 있었다.
"미움은 잊고 사랑만 남겨두자.. 가족이 최고다. 그 무엇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
의지만큼이나 강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글귀였다.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위해 싸우셨고, 사랑하셨다. 자꾸만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들이 이제 나를 더 이상 무겁게 짓누르지만은 않았다. 그 모든 기억들은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는 큰 힘과 용기 또한 주기에. 하루하루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가슴에 새기며, 나 또한 그 사랑을 내 자식에게 물려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아이들은 남 보듯 대면대면하고 서로의 일과로 엇갈리다 보니 하루에 얼굴 한번 제대로 볼 일이 없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부모 자식들이 비슷비슷하다고 위로해 보지만, 그게 어느 정도 사실임을 알면서도 내 마음에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속 편한 소리를 할수록,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독하셨을지 감히 상상이 안되고 회한이 크게 남은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