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웬일로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서 다니고 계시는 노인학교에서 각자 자신의 인생 앨범을 만드신다고, 당신이 나온 사진이 있으면 좀 가지고 오라 하셔서 오래된 PC에 백업되어 있던 묵은 사진 폴더들과, 휴대폰 클라우드에 있는 오래된 사진들을 눈알 빠지게 찾아보았다.
워낙에 평소 사진을 잘 찍고 그러는 집안 분위기가 아닌지라, 가족들과 살가운 일상을 찍은 사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사진조차도 어머니가 잘 나온 사진을 찾기가 마땅 찮았다.
막상 찾다 보니 어머니의 사진은 아버지가 옆에 같이 계신 사진이 오히려 많았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와중에 어머니께서 공무원의 아내로 이런저런 행사나 봉사활동 때 찍은 사진과, 연수나 여행을 함께 가셔서 찍은 사진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당신의 이름은 잊혀진 채, 아버지의 아내로, 시어머니의 며느리로, 우리들의 어머니로 살아오신 세월이었다.
사진 폴더들 안에는 아이들의 태어나 자라온 모습들만 가득이었다. 문득 너무나 죄송했다.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 막상 어머니가 주인공인 사진이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별로 없더라는 것.
아버지가 돌어가신 후 어머니께서 지역사회 커뮤니티나 노인학교 등에서 찍은 사진들은 본인이 가지고 계셨기에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 이전까지의 삶에서 어머니 사진이 별로 없다는 것은 의외였고, 미처 잘 생각지 못했던 지점이었다.
어머니는 6, 70년대 그 옛날에도 하이힐을 신고 직장에 다니시던 잘 나가는 ‘신여성’이셨다고 했다. 결혼할 생각이 1도 없던 어머니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결국 부모에 대한 효심이 결정적이었다. 간암에 걸리신 외할머니께서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올라와 수술을 받으신 후에, 청주의 고향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와병 중이던 어느 날 밤, 외할머니, 그러니까 당신의 어머니께서 밤에 잠을 못 이루시며 “우리 혜자, 처녀귀신 되면 안 되는데..” 하고 나직이 읊조리시던 혼잣말을 우연히 듣고 결혼을 결심하셨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외할머니께 가서 중신을 서 달라고, 시집을 가겠다고 바로 말씀을 하셨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만나게 되셨다.
아버지는 홀어머니 아래 영동의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다 홀로 상경하여 고학을 하였고, 그렇게 당신 혼자의 힘으로 대학을 다니고 공무원이 되셔서 평생 시민의 공복으로 열심히 일하셨다. 종종 하시던 말씀이 학교를 마치고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셨는데, 돈을 주고 사셨다는 건지 가게 사장님이 가끔 챙겨주셨다는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추운 겨울에 먹던 그 곰보빵(소보로빵)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추억을 말씀하셨더랬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곰보빵을 가장 좋아하시던 아버지셨다.
과거의 많은 일들이 눈앞에서 한 장 한 장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사랑은 내리사랑인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부모의 사랑과 헌신은 너무나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 그렇게 인생은 흘러간다는 것.
어머니께는 이번 주말에 사진을 가져다 드리겠다고 했다. 이미지 파일로는 이미 카톡으로 보내드렸지만, 사진을 찾다 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인화된 필름 카메라 사진들이 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의 느낌은 실물로 보고 간직하셔야지, 스캔해서 파일로만 전송해 드릴 일은 아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