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아버지 돌아가신 후 몇 년이 지나 2012년 여름에 고향 선산에 있는 조부모님 묘소까지 아버지를 모신 경기도 광주의 가족봉안묘로 이장을 하던 때의 꿈이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제법 길이 막혔다. 도착하니 시계는 아직 오전을 지나지는 않았지만 해는 이미 뙤약볕이었다. 파묘를 하고 이장을 하기 위해서 면사무소를 찾아가 개장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면사무소를 들렀다 고향 어른들 댁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서둘러 이미 인부들이 와 있을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로 향했다.
선산으로 향하는 길에 왠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수군대는 듯한 느낌.. 고향 분들께서는 당연히 욕도 좀 하실 것이다. 이제 이장해 올라가면 명절 때마다 못해도 1년에 최소한 두 번은 꼬박꼬박 내려오던 우리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찌 섭섭하지 않으시겠는가. 죄송한 마음에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겠다, 한 해 한 번은 오지 않겠냐.. 고 말씀드렸었지만, 이렇게 가고 나면 지금 인사드리는 이분도 다시 보기가 쉽지 않으리란 건 우리 가족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손자인 나뿐만 아니라 생전의 아버지조차 기억을 못하셨다. 사진은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 제사 때 올릴 영정 사진 한 장 없었으니 말이다. 아버지야 어릴 적 십 대 이전까지는 당신의 아버지와 지낸 기억이 왜 없었겠냐만은, 할아버지가 전국을 돌아다니시느라 집에 못 들어오시는 날도 많았고 어린 시절이라 이제는 기억을 못 하시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지역 발전을 위해 교육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당시 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자금을 모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니셨다 한다. 그러던 중 마을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웬만하면 집안에서 안 나오던 때에도 불철주야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을 구하러 애쓰시다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지금의 초등학교 같은 소학교를 세우시려 했던 건지, 아니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생각하셨던 건지 알 길은 없지만, 교육에 대한 철학은 확고하셨던 듯싶다. 할아버지 젊으셨을 때,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아래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고난을 보고 겪으셨을 터. 그 울분을 모아 모아 생산적인 에너지로 쏟아내셨다 생각하니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돌아가신 때가 1950년 3월이니, 6.25 전쟁이 일어나기 석 달 전이다.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를 보며 많이 안타까워했더랬다. 더불어 존경의 마음과는 별개로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참 야속하기도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언제 결혼하셨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세 남매를 낳고 돌아가신 게 1950년이고 아버지 생년을 고려하면 결혼은 아마 1930년대 후반이나 40년 초반에 하셨을 것이다. 일제 치하 후반기의 엄혹한 시절에 만나신 것이다.
교과서와 역사를 통해서만 접하던 그 옛날 그 시절에 당신께 시집와서, 잠시잠깐 같이 계시다가 홀로 남겨두고 떠나가신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가난한 살림에 할머니 혼자서 힘들게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이 얼마나 크셨을까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는 주위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홀어미 슬하에서 자라 저렇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회초리도 자주 드셨고 아버지를 매우 엄하게 키우셨다고 한다. 아마 큰고모는 맏이긴 하지만 딸이라고, 작은아버지는 어린 막내라고, 이래저래 집안의 큰아들에게 온 신경이 다 가신 거겠지 싶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살림을 하고 자식들 키우며 살아온 탓에 성정도 아마 독해 지셨을 테지..
성정이 강한 분 두 분이 만난 탓에 훗날 고부간의 갈등이 생긴 부분까지.. 할아버지는 원인 제공자로서, 무력하고 무능하게 느껴졌던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로 내 마음속 원망의 덤터기를 쓰실 수밖에 없었다.
온 가족이 죽어서라도 다시 만나면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이는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다. 만약 아버지가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린 이장에 대한 생각은 있어도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 몇 해가 지나면 아버지는 계속 찾아뵈어도 차츰차츰 고향 선산에 묻히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으리라.
생각에 잠겨 뙤약볕을 걷다 보니 어느새 선산 앞에 당도했다. 선산을 올라가니 계약했던 인부 아저씨들은 와 있었고 이미 작업을 시작할 채비를 다 마치신 상태였다. 지역은 조금씩 달라도 다 비슷한 곳에 사시는 고향사람 같은 분들이라 그런지 뭔가 알아서 다 세팅이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파묘요~!!”
산소를 파고 유골을 수습해서 흰 천 위에 차례차례 순서를 맞춰 늘어놓았다.
세상에, 어릴 적부터 늘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어서 힘들어하시던 할머니의 키 작은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처럼 돌아가신 지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아 아직 유골이 대체로 다 남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숨이 턱 막혀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서대로 늘어놓은 할머니의 모습은 무척이나 키가 크셨다.
이렇게도 훤칠하신데.. 그렇게나 긴 세월을 허리가 많이 굽어 거동을 하시기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마음이 아려왔다.
그렇게 파묘를 하고.. 유골을 화장한 후 가족봉안묘로 이장을 했다.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아버지와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제단 바로 위, 비어 있던 선대의 자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골단지가 올라갔고, 다음 해에는 따로 일산의 납골당에 모셔져 있던 작은아버지까지 모셔왔다. 온 가족이 다시 합쳐지던 날,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부지, 작은아부지.. 많이 늦었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렇게 하늘나라 가신 뒤에라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해후(邂逅)의 정(情) 먼저 나누시고, 이제는 힘들었던 일 모두 잊고 그곳에서나마 함께 즐겁게 지내시고 행복하세요..‘
눈이 떠졌다.
이제는 익숙한 기분.. 난 종종 이런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작은아버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있다. 그들은 웃으며 나를 반기고, 꿈에서나마 나를 보살펴 주시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진다. 그건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훗날, 저 아래 단에는 내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