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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Sep 07. 2024

살아보니 그러하더라

우린 따뜻한 말하기 훈련이 필요해


간혹 상대방이 핑계의 여지없이 뼈 때리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나라고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던가. 내가 하는 말은 진심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충언일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다소 직설적인 말일지라도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면죄부를 주기 십상이다.


‘너, 이 얘기 처음 들어? 야야, 너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잘라라, 진짜 널 생각하는 친구는 없네. 지금부터 내 얘기 새겨들어!’ 하면서 여태까지 세상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진심 어린 고언을 바로 내가 너에게 하겠노라고.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자만의 함정에 빠져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지 않는 확신범이 되곤 한다. 그(녀)가 살아온 지난 세월, 아무렴 나같이 걱정하는 이가 제법 없었을까. 오지랖도 풍년이다.

물론 그 진심만큼은 맞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사회, 정치문제를 논하며 괜스레 감정싸움에 휘말리는 우를 범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 현실일터. 그 정도 이야기를 해도 되고, 그 이야기를 진심 어린 충언으로 받아들일 정도의 사람이라면, 실은 실제 그런 직접적인 얘기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태반일지니.


꼭 ‘T’이고 ‘J’인 사람만 그러하지는 않으리라. 가령 ‘FP’의 결과가 나와 그 대척점에 있는 나 같은 사람도 가끔은 찐친, 절친이라 부르는 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말은 맞지만 듣는 상대가 못내 서운 타고 느끼게 된다면 이미 그 이야기를 한 나의 진심은 반감기를 겪고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겪어보니 그러하더라.


그래서 <나의 아저씨>에서의 박동훈 부장도 철없어 보이는 당돌한 신입, 이지안 씨에게 그렇게 충고해 줬던 게 아닐까.

‘그 사람을 진짜로 위한다면 다 얘기하지 말고 모르는 척해주라‘고.  ’네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아는 것을 안다면 결국 그 사람은 너를 불편해하고 피할 것이라고‘.  어른들의 세계는 그런 거라고..


가만 보면 나보다 이 친구가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긴 한데.. 하지만 그런 현실이 실제로 닥쳤을 때 어떻게 움직이고 대응할지의 문제와, 그런 일이 예측될 때에 미리 그에

대한 계획을 가감 없이 말해주는 것이 꼭 일치해야만 할까 - 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

사회성에 좀 더 윤활유를 칠하고 싶다면 솔루션을 제시하기보다는 마음을 다독여주는 능력. 혹은 공감하는 마음, 상대방에 대한 태도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닐런지. 


인간이란 존재가, 우리의 믿음과는 달리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인지는 굳이 행동경제학의 오랜 연구와 추적의 결과를 논하지 않더라도 이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난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들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참 징허게 사셨다.  술 한잔하고 들어와 ‘허허’ 웃으시며 취기를 빌려 아내에게 낯간지런 멘트를 마구 날리시고 엄하게만 훈육하던 자식들에게도 함박웃음과 함께 전기구이 통닭과 용돈을 한 아름 안겨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평소에 좀 그러면 얼마나 좋아하시며 술만 먹으면 늦게 와서 자는 애들 깨우고 저런다고 무지 싫어하셨다.  당시 남부러울 것 없는 집의 외동딸로 하이힐 신고 직장을 다니던 신여성이 홀어머니 슬하에 가난한 집의 장남에게 시집와서 자식들과 집안 건사하느라 힘드셨을 터. 그 스트레스가 악다구니로 남아 그런 날의 아버지께 모진 소리도 많이 하셨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한잔 걸치고 들어오시는 날은 나에겐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그런 애매모호한 날이었다.  암으로 그렇게 부질없이 가시고 난 그때부터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모진 소리 했던걸 무척이나 후회하고 계시지만 말이다.  


아버지에겐 어머니가 요구하셨던, 술도 안 먹고 멀쩡한 정신으로 일찍 들어오는 날 전기구이 통닭을 양손에 쥐고 우리에게 두 볼을 비비며 용돈을 쥐어주시는 상황은 애초에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으니. 난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러하길 원하는 것. 상대가 행하기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순간 갈등은 시작되고 그 골은 깊어지더라.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로서는 내가 좀 부족한 게 있어도 조금은 내 이야기를 존중해 주고 기분을 맞춰주는 부인의 모습을 기대했겠지만, 그 시절 신여성으로 주체적이고 당당했던 어머니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모습이었을게다. 사람은 그렇다.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척하는 것일 뿐.


사랑도, 우정도, 명예도, 이상도.. 사람 간의 관계에서는 절대적인 등가성이 유지되는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 하겠다. 결국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조금 더 좋아하고, 의지하고, 아쉬워하고.. 그런 것이다. 그 차이를 서로 인식하면서도 적절한 예를 갖춰, 한쪽은 그걸 너무 이용하거나 의기양양해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고, 또 다른 쪽은 너무 매달리거나 의지하는 티를 내지도 않는 것.  서로 간에 그 정도의 성숙함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것일까.  


허울 좋은 말의 성찬도 부질없지만, 따뜻함이 배제된 말은 맘이 아리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라 해도..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과 청자가 누구인지를 고려하는 말하기는 주의와 훈련이 필요해 보인다.


이성과 감성의 적절한 조화가 이리도 어려운 것인지는 들려오는 저녁 뉴스 한토막에서, 세상 희한하게 돌아가는 모습에서 익히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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