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4 보고서
Chapter-4 보고서
크게 아프고 난 민수와 미하르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마치 언제 아팠냐는 듯 깊은 숙면을 취한 후 배가 몹시 고프다며 먹을 걸 찾았다.
미하르는 요리 냄새를 맡고 다시 소화불량과 속의 거북함을 호소했지만 재시가 기다렸다는 듯 능숙하게 약을 처방했다. 금세 약의 효과를 본 미하르는 민수와 함께 빠르게 빈 속을 채워갔다. 할은 허겁지겁 먹어 대는 둘을 보니 눈치가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재시의 요리를 그렇게까지 먹어 치우진 않는 건데… 그랬더라면 자신의 빈 접시를 아쉽게 내려다보고 있는 민수에게 스캇의 기록 열람 요청을 부탁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래도… 찔러나 보자.
“저기… 그래서 민수, 내가 말이야 꼭 필요해서 스캇의 연구 기록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할은 바쁘게 움직이는 재시를 쫓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재시, 나 좀 봐줘, 도와 달라고.’ 아무래도 재시가 거들어주면 민수의 허락을 얻어내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재시는 갑자기 먹성이 좋아진 민수와 미하르를 위한 요리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재시가 할의 눈을 일부러 피하는 것은 아닐 거다. 민수가 일어나면 부탁해 보라고 귀띔해 준 게 재시였기 때문이다.
재시도 정확하게는 블라디미르 유로파 탐사팀에 프리랜서로 고용된 의료 팀원이라 죽은 본사 팀원의 기록 열람에 관한 권한은 없다. 대신 죽은 스캇이 남긴 기록의 열람권이 공식적으로 본사 탐사팀 대장인 민수에게 넘어갔다고 귀띔해준 게 재시다. 절대로 스캇의 기록이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대는 할이 귀찮아서 민수에게 떠넘기려고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민수, 정말 딱 몇 가지만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래. 물론 블라디미르 본사 지침은 잘 알고 있어. 모든 기록이 회사 소유로 넘어갔다는 말이잖아. 그래서 민수만 열람이 가능한 거고. 그러니까 민수가 열람해보겠다고 하고 나한테 조금만 보여주는 방식으로 풀어가면 되지 않을까? 참고만 할 거라서 민수가 보여줬다는 건 절대 비밀로 할 거라고. 전부 통으로 보겠다는 것도 아니야. 스캇의 사생활이란 것도 있으니까… 아! 민수 어떻게 안 될까?”
민수 옆에서 할이 끊임없이 떠들었다. 할은 재시의 귀띔을 듣고 처음엔 다행이다 싶었다. 민수는 친절하니까 바로 허락해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수는 처음 봤을 때 본 친절한 미소만 그대로 유지한 체 끊임없이 거절했다. 할은 조금 섭섭해지려고까지 했다.
“아니, 정말 민수 좀… 내가 그렇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할… 조금만 기다려 봐, 일단 본사에 물어보고 알려준다는 거잖아. 무조건 안 된 다는 게 아니야. 물어보고 허락만 떨어지면 할도 편하게 볼 수 있는 문제인데 왜 이렇게 서두르려고만 하는지 나는 그게 오히려 이해가 안 가는데? 할, 너도 조금 쉬면서 잠시만 기다려 봐.”
민수는 본사의 절차를 계속 핑계 삼았다. 할도 하는 수 없이 잠시 물러섰다.
“알았어…”
민수는 한결 편하게 먹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할은 얼마 못 가 금방 또 입을 뗐다.
“아! 그나저나 가장 최근에 스캇이 포획했다던, 내가 여기 동면캡슐에서 나오던 날 민수가 방생해줬다던 그 그루이트 말이야. 초록색 나노칩을 가지고 있는, 거기, 그것의 성기 안쪽에 나노칩이 반짝반짝, 초록빛이 반짝반짝.”
할이 그 초록빛 그루이트 이야기를 꺼내자 재시는 조용히 민수를 쳐다봤고 민수는 재시의 말없는 눈빛을 피해 포크질을 계속했다. 결국 그 눈빛에 치여 헛기침이 나와 재시에게 물을 찾았는데 재시가 듣지 못했다. 아니, 그냥 못 들은 척한 것 같았다. 할은 민수한테 말했는데 대답은 먹는데 집중하느라 한참 말이 없던 미하르가 했다.
“왜? 그 예쁜이가 왜?” 대답하는 미하르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그리고 반쯤 풀려 있었다. 아무래도 재시가 처방한 약물에 향정신성 성분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증상 호전을 위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처방이었을 것이다.
“예쁜이? 뭐 그래… 예쁜 건 맞으니까. 그 초록색 예쁜이 그루이트가 말이야, 임신 중이었더라고. 뱃속에 새끼가 들어 있더라고. 다들 알고 있었어?”
“응!”, “응?”, “아니.”
미하르는 당연히 알고 있어 보였고 민수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불편해 보였고 재시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재시는 정말 그루이트에게는 일도 관심이 없나 보다.
“아, 그래, 둘만. 둘은 역시 알고 있었구나. 스캇도 당연히 아는 거고. 그런데 왜 스캇의 공식 보고서에선 임신한 그루이트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을까? 노랑빛 그루이트가 낳은 새끼 크기와 초록빛 그루이트의 뱃속 새끼 크기를 비교해 추론, 계산해 보면 그루이트의 임신 기간은 대략 오차범위 내에서 402시간에서 419시간 사이? 최소 처음 스캇이 포획할 때 이미 임신 중이었단 소린데… 스캇이 그때 그루이트의 임신을 몰랐을까? 임신 초기에는 알아보기 어려운가? 그게 아니면 스캇이 일부러 관련된 기록을 숨겼다는 말이 되는데.” 할은 은근슬쩍 민수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민수, 내가 스캇의 기록을 조금이라도 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할, 그 이야기는 아까 끝난 걸로 아는데. 본사의 절차를 기다리기로 했잖아.”
민수에게 단칼에 거절당한 할이 우물쭈물할 때였다. 재시가 요리하던 걸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민수에게 물었다. 뭔가 꾹 눌렸다가 한 번에 튀어 오른 신경질이었다.
“민수,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스캇이 그루이트 임신에 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나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오호… 여성 휴먼으로서 쉽지 않은 체내 임신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했다고 한 재시다. 결코 쉽지 않은 경험이다. 그런데도 스캇이 재시에게 아무것도 안 물어봤다고? 역시… 스캇은 재시를 별로 안 좋아했나 보다.
“나? 그야 그게 여기서 꽤 오랜 시간을, 여기에, 그게 그러니까 오래 있었잖아.” 민수가 말을 버벅거렸다.
버벅거린 민수의 말은 사실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350시간을 꽉 채우고 방생한 그루이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것뿐이었다. 아마 나빠진 스캇의 컨디션으로 새로운 그루이트를 포획해 오지 못 한 탓에 이 그루이트만 오래 있었나 싶다.
“그리고 방생을, 방생을 내가 했잖아. 그걸 포획해왔던 장소로 돌아가 풀어주면서 일렉트릭 피시넷을 벗겨줄 때 본 거야.” 민수가 미하르를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재시, 내가 하기 싫다고 하니까 그날 민수가 대신해줬잖아.” 여전히 눈이 풀려 있는 미하르가 민수를 향해 헤벌쭉 웃었다. “민수 고마워.”
“재시 왜 그래? 왜 이렇게 예민해? 민수가 안다고 하는 것만으로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네. 방생할 때 봤으니 알 수밖에 없던 거잖아. 당연한 건데. 게다가 그건 발광 나노칩 때문에 뱃속이 훤히 보인다고. 그러니까 진정해.”
할이 예민해진 재시를 달래 주었다. 재시는 그런 할을 거들떠도 안 보고 원래의 동선으로 돌아가 푸짐한 고깃덩어리를 들고 왔다. 재시는 고깃덩어리를 미하르에게만 들이밀었다. 민수에게는 고깃덩어리를 주는 대신 뚫어지게 쏘아보기만 했다. “민수.” 나지막이 민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재시, 나는 진짜 밖에서 방생하면서 본 것뿐이야. 그것 말고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진짜 풀어만 줬어. 그때는 스캇이, 스캇이 없었잖아. 스캇이… 아… 스캇…”
민수가 화제를 바꾸어 어색하게 스캇의 애도를 하고 그를 추억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미하르도 스캇은 정말 좋은 녀석이었다며 그만한 친구는 구하기 힘들 거라고 이야기하고 큼지막한 고깃 조각을 씹었다. 민수가 그런 미하르를 위로하고 싶었는지 자신이 스캇 대신 좋은 친구가 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미하르는 스캇 같은 친구가 되어 준다면 대환영이라며 자신만 받은 고깃덩어리를 민수에게 조금 떼주었다. 재시는 입술을 움찔움찔하며 허공만 바라봤다.
“아, 맞다. 스캇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스캇의 사망 시각을 대충 계산해 봤거든.”
할은 다소 복잡한 ‘트램 단축 이동 계산법’을 이용해 스캇의 사망 시각을 유로파 시간으로 도출했었다.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여러 명이 동시 다발적으로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며 아파하는 건 할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재시는 눈치는 없는데 똑똑한 휴먼을 자신이 싫어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스캇의 사망 시각이 미하르가 아팠을 때랑 일치해.”
“뭐라고? 내가 아팠을 때? 내가 언제 아팠을 때? 끄어억!” 미하르가 트림을 했다. 지독한 냄새.
할은 손으로 코를 막고 대답을 이어갔다. “그게, 내가 젤 평야에서 그루이트들과 있을 때야. 정확하게는 어떤 때 냐면 말이야.”
할은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조사기록을 몇 가지 더 확인하더니 더 흥미로운 게 있다며 이야기 이어갔다.
“맞네, 맞네. 그때, 바로 그 시간에 노랑빛 발광 나노칩이 성기 깊숙이 심어진 그루이트는 새끼를 낳았어. 봐봐.” 할은 기록 몇 개를 자신의 개인 홀로그램 스크린에 띄워 모두에게 공유했다. “여기 새끼 머리가 나오는 거 보여? 그리고 여기 이 주변을 봐봐.” 할은 기록에서 주변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홀로그램 스크린의 방향을 회전시켰다. “새끼가 나오려고, 그러니까 출산이 시작될 때 노랑빛 그루이트가 거느린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마구 뒹구는 게 보이지? 저 몸 뒤틀리는 것 좀 봐봐. 경기를 일으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다들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니까. 바로 이 시간에 미하르가 아파했고, 스캇은 우주에서 죽었지. 아마 스캇도 죽기 전엔 엄청 아파했을 거야.” 할이 잠시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 미하르를 제외한 민수와 스캇의 이야기에 재시의 얼굴빛이 어둡게 깔렸지만 계속 말을 이어가고 싶었다. 정말 신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흥미로웠어.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은 몇몇 지구의 휴먼 여성처럼 임신과 출산을 해. 하지만 거기에 따른 고통과 신체적 부담은 그것들이 거느린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대신 떠안지. 고통의 전가? 대리 고통. 이런 거라고 볼 수 있어. 그런데 어떤 알고리즘으로 거느리는 노예들만 일괄적으로 아픈 걸까?”
할이 아파하는 그루이트들을 유심히 보며 “아까 아팠던 민수의 증상과 이것들의 아파하는 증상이 참 비슷하지.”
재시가 참지 못 하고 할의 말을 끊었다.
“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음… 그렇지만 재시, 그렇다고 보이는 걸 외면해도 안되지.”
할은 단호했다.
기록을 보던 민수가 반문했다.
“하지만 할, 지금 노랑빛 그루이트가 새끼를 낳을 때 도망가는 저 그루이트는 보랏빛 그루이트가 거느린 노예 아니야? 이러면 대장 그루이트가 출산을 할 때 그 노예들이 대신 아프다는 결과는 근거가 부족하다 싶은데.”
지적한 민수의 얼굴은 불안했고 지적당한 할의 눈빛은 빛났다.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서 보자. 내가 보충 설명을 해 줄게.”
할은 젤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혹은 자신을 포획한) 저 초록빛 그루이트가 보랏빛 그루이트가 거느린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를 갖고 싶어 하는 걸 봤다. 초록빛 그루이트는 보랏빛 그루이트가 내놓은 (상품을 진열해 놓은)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과 두루두루 성교를 해 본 후, (마치 원하는 상품을 고르려고 테스트해본 후) 그것들 중 세 마리를 골라냈고 그중 두 마리의 성기를 쥐고 놓지 못했다(두 마리 모두 갖고 싶다). 뭔가 고집을 피우는 듯(거래가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 듯) 초록빛 그루이트는 성기를 잡은 손을 여러 번 세게 쥐었다 풀었다 했다. 그때마다 성기를 잡힌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 댔고. 그러던 중 할이 보랏빛 그루이트 앞으로 던져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순간, 나도 상품의 일부 취급을 받았던 게 아닐까 싶어. 내 가랑이 사이를 툭툭 뒤져가며 나한테서 돌출 성기를 찾는 것 같았거든. 나의 키가 남성형성기 그루이트와 더 비슷해서 그랬을까... 내 키가 그루이트들한테는 애매하지.”
할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이후의 일은 노랑빛 그루이트가 출산을 했고 (같은 시각 미하르가 아프고 스캇은 죽었고) 다시 초록빛 그루이트와 보랏빛 그루이트가 돌고래 소리를 몇 번 주고받더니 결국 한 마리씩 교환했다. 그 자리에서 보랏빛 그루이트는 초록빛 그루이트에게 넘겨받은 것과 성교를 진행했고 초록빛 그루이트도 최종 결정된 것과 성교를 진행했다. 그것은 여성형성기 대장 그루이트가 지금부터 이것은 나의 노예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테스트로 하던 성교와는 달리 대장그루이트 몸속 젤이 들락날락거리는 남성형성기에 마구 휘감겼다.
이후, 할은 남성형성기 그루이트 노예들이 젤에 잠기지 않도록 떠받들어줘 편하게 기지로 돌아왔다.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돌고래 소리로 그것들에게 몇 마디 소리를 내니 할을 그렇게 운반해 줬다. 이 부분을, 할이 어떻게 기지로 무사히 돌아왔는지… 바로 이 부분을 민수, 재시, 미하르는 가장 건성으로 들었다.
“보랏빛이 거느린 노예 그루이트는 원래 노랑빛이 소유하던걸 이전에 거래로 넘겨받은 거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말이 돼! 많이 거래될수록 그만큼 자주 아프게 된다는 가혹한 결말이지만 말이야. 자, 이제 알겠지? 어때?”
할의 설명이 끝났다. 이제 마지막 한 문장만 남았다.
“유로파 그루이트에게는 거래의 문화가 있어.”
할의 눈빛이 확신으로 꽉 찼다. 재시는 이 눈빛이 못마땅했다.
“하하, 고작 자기들끼리 바꿔가며 성교를 하는 게 거래의 문화라니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안 그래, 민수? 아니야, 미하르? 다들 뭐라고 말 좀 해 봐! 거래의 문화라니! 할,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민수는 고장 난 구형 로봇의 얼굴이 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고 미하르는 무슨 생각인지 약에 취한 것처럼 웃기만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할은 계속 생각했다. 그루이트들은 할이 처음 본 휴먼 여성이었을 것이다. 기지 내에서 재시는 그루이트 근처에도 안 갔고 그 오랜 시간, 기지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할의 가랑이 사이에 돌출 성기를 찾아볼 생각을 했던 걸까? 그것들은 어떻게 휴먼 남성이 가진 돌출 성기의 존재를 알고 있던 걸까?
테이블에서 유로파의 홀로그램 지도가 나타났다. 풍만하고 아름다운 핑크색 구체에 다채로운 색들의 점이 하나씩 하나씩 반짝반짝 나타났다. 그런데 그 위치가 놀라웠다. 바로 탐사기지 앞이다.
민수가 다른 홀로그램 스크린에 외부 상황을 띄웠다. 성기에서 각각의 아름다운 색의 빛을 뿜어내는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젤에 정강이까지만 담근 채 곧게 서 있었다. 저 위치는 저만큼 얕은 곳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자기들이 거느린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 중 몇 마리를 젤 속에 담가 놓고 그것들을 밟고 그 위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다른 몇 마리들은 그보다 얕은 젤 위에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아까 할 혼자 보았을 때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는데 돌아와서 다시 찾아본 스캇의 ‘그루이트 보고서’, 생활 섹션을 다시 보고 이렇게 마주하니 거기 묘사된 그대로다. 대장(주인), 노예들(소유물), 무리 생활, 철저한 상명하복이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할이 처음 보았을 때도 느낀 거지만 저 여성형성기 대장 그루이트들은 진짜 근사하고 아름답다. 거기다 성기의 위치에서 빛까지 뿜어내게 하다니. 하, 분하지만 스캇은 정말 천재다.
“저 초록빛 성기 그루이트. 그 사이 새끼를 낳았네. 동그란 배가 쏙 들어갔어.”
할이 지난 첫 탐사 때, 성기 안 화려한 초록빛 조명 속, 뱃속에 있던 새끼 그루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노랑빛 그루이트가 낳은 새끼 그루이트의 크기와 비교 짐작하건대 초록빛 그루이트도 곧 새끼를 낳을 것 같긴 했다. 빠르게 시간을 추정해 보니 대략 몇 시간 전, 민수와 미하르가 몸이 뒤틀어지며 아파했을 때와 일치한다.
“저 예쁜이들이 나를 찾아온 거야. 다 내가 좋아하는 애들이야.”
약물 때문인지 미하르가 콧구멍을 잔뜩 확장시킨 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홀로그램 스크린으로 뛰어들 기세다.
보랏빛 그루이트가 젤 속에서 한 남성형성기 그루이트의 카틀레야의 수술 같은 그것의 성기를 손에 쥐어 젤 밖으로 꺼내 올렸다. 보랏빛 그루이트가 거느리고 다니는 것들 중 제법 체격이 있어 보였다. 손에 쥐어진 성기도 엄청 통통했다. 그렇게 손에 쥔 채로 기지를 향해 알 수 없는 돌고래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일제히 다른 그루이트들도 젤 속에서 한 마리씩 꺼내어 똑같이 행동했다. 재시는 불쾌함을 숨기고 민수는 작은 반가움을 숨기고 미하르만 숨김없이 기쁨을 표현하고 흥분했다.
할이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야! 저게 내가 말 한 거래의 문화야! 저것들 우리에게 거래를 하자고 온 거라고. 자기 소유물, 자기가 가진 것과 우리의 어떤 것과 거래하기를 원하고 있어.”
이상하다. 다들 대답이 없다. 너무 놀라운 발견이라 할 말을 잃었나 보다.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 이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의 -지적 생명체 기준에 관한 조항-에 의거, 거래의 개념을 가진 저것들은 지적 생명체로 볼 수 있다고. 2형문명으로 도약한 우리 휴먼이 드디어 다른 은하계의 지적 생명체를 발견한 거야! 물론 생물학적인 진화, 에너지 활용법, 그리고 기본적인 소통 방법 등 여러 가지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나, 아니 우리가 진짜 엄청난 발견을 한 거라고! 드디어 외계 문명과의 문화교류 시작이라고!”
이쯤이면 다들 크게 감탄하며 할의 대단한 발견을 높이 추켜 세워줘야 마땅한데 다들 말이 없었다.
“자, 어때?”
할이 리액션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스타일로 침묵을 이어갔다. 고요한 룸 안, 스피커로 그루이트들이 기지를 향해 외치는 돌고래 소리만 메아리쳤다.
이윽고 메아리에 미하르가 끼어들었다. 미하르가 꼬인 혀로 입을 열었다.
“할, 이건 기회야!”
“그래, 미하르 맞아. 이건 기회야!”
“아니 내 말은 그 ‘기회’가 아니고 그 ‘기회’라고! 할, 당장 나가서 한 마리 잡아와!”
“뭐?”
“저 초록색 이후로 잡아온 게 없었잖아. 지금 저렇게 코 앞에 있을 때 잡아오라고. 꼭 여성형성기 여야만 해! 나는… 나는 저 보랏빛이 좋아. 제일 좋았어. 보라색 저걸로 잡아와!”
“그건 안되지, 미하르. 저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은 이미 포획됐던 애들이야. 성기에서 나오는 빛이 이미 그 증거잖아. 잡아오려면 저 남성형성기 것들 중 하나를 포획해야지.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에 생명 윤리에 관한 조항에 의하면…”
“크크, 지겨워. 그놈의 어쩌고 저쩌고 보호법… 할, 잡아오라면 잡아와!”
미하르가 비웃으며 할의 말을 잘랐다. 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싫어? 그럼, 민수가 나가줘. 나의 좋은 친구가 돼 준다고 했잖아.”
“미하르, 일단 진정 먼저 하자. 필요 이상으로 흥분상태야, 지금.”
“왜? 민수! 민수가 부탁이니 나가!”
같은 팀원끼리 명령이라니! 거기다 대장인 민수에게까지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건 미하르가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을 우습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흥분한 미하르는 포획유닛을 입힐 기세로 민수에게 달려들어 완력으로 그를 깔아뭉개고 올라탔다. 그리고 그의 둔부 쪽에 위치한 팀슈트의 후크를 쥐어뜯었다. 민수는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미하르에게 깔린 체 꼼짝을 못 했다.
“미하르 그만해! 재시가 외쳤다. “아까 주사한 약을 더 줄게. 가서 투약하고 좀 쉬자. 안 그러면 또 구토를 하게 될 거야. 응, 미하르!”
“약?” 순간 미하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민수의 맨엉덩이가 뽀얗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재시가 미하르를 진정시키고 일으켜 세웠다.
“재시, 그냥 약을 한꺼번에 왕창 주면 안 될까? 내가 알아서 필요할 때마다 투약할게. 그게 서로 편하잖아. 민수! 민수, 언제 나갈 거야? 꼭 잡아와야 해. 나 급하다고! 화려한 조명 속 알지?”
자기 성기를 주물럭거리는 미하르를 재시가 달래서 데리고 나갔다. 할은 미하르를 데리고 나가는 재시도, 말없이 맨 엉덩이를 급하게 손으로 가리고 수습만 하는 민수도 이해가 안 갔다. 모든 게 이해가 안 갔다.
“민수,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명백히 미하르가 하극상을 저질렀잖아. 거기다 은하계 탐사 팀원으로서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에 대해 저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규칙 위반이야! 팀원 자격 박탈이라고!”
민수가 팀슈트를 고쳐 입느라 뜸을 들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할. 네가 꼭 좀 숙지해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할은 ‘지구유니언’에선 없어진 콜로니에서는 계속 사용 중인 풀네임이라는 것에 관해 배웠지? 혹시 미하르의 풀네임이 뭔지 알아?”
“풀네임?”
“그래 풀네임. 이름 말고 그 사람의 출신과 가문을 나타내는 이름의 일부인 성 말이야. 윗세대로부터 물려받는 이름.”
“음… 민수,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지?”
“알아야 해.”
“꼭?”
“응! 미하르의 풀네임이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울리치 미하르’니까.”
할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블라디미르그룹의 블라디미르?”
“응.”
할의 얼굴이 더 진지해졌다.
“그중에서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을 만든 블라디미로비치의 블라디미르?”
“응!”
할은 미하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쉽게 되진 않았지만.
미하르를 데리고 나갔던 재시가 돌아왔다.
“그리고 할… 알아야 할 게 또 있어.”
“또??”
할은 큰 이슈이긴 하지만 이 유로파에서의 발견에 직접적이지 않은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말하는 민수와 재시가 의아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져 갔다.
“할, 휴먼의 2형 문명 도달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블라디미르그룹이 그동안 은하계 여러 생물을 발견해 오면서 그루이트같은, 저 정도 지능의 생명체를 진짜, 한 번도, 못 봤을까? 정말 그랬을까? 너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할은 재시의 말에 민수를 쳐다봤다. 민수는 침묵했다. 그 찰나의 침묵은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알아달라는 의미였다.
할은 복잡한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해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그루이트들이 기지 앞까지 찾아와서까지 우리와 거래를 하려 드는 이유에 대한 답이 생각났다. 그루이트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그에 상응하는 자신의 노예 몇 마리와 맞바꾸고 싶어 한다.
“혹시…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울리치 미하르가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에 명백히 위배되는 비윤리적 폭력 및 학대… 아니 그러니까 그루이트들에게 직접적인 성적 접촉을 행했어? 한동안 기지 내로 포획한 그루이트는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밖에 없었어. 만약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이건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 근거한 지구 유니언과 블라디미르 협약 때문에라도 종신형 감인데…”
할이 이야기를 천천히 이어가는 것에 아무도 뭐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할이 입을 다물면 그만큼의 시간은 침묵의 시간이 됐다.
“… 미하르가… 미하르가 비윤리적 성접촉을 한 거야?”
재시는 여전히 침묵했다.
재시는 침묵을 유지하며 생각했다. 만일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울리치 미하르가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을 위반한 게 밝혀지면 그는 작은 아버지에게 불려 가 몇 마디 잔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러고 나서 자신의 개인 소유 [블라디미르 1st 콜로니]로 돌아가 이전처럼 생활할 것이다. 내키는 대로 휴먼 몇몇을 죽이거나 몇몇에게는 지구가 1형문명에 도달하기 전부터 존재해온 성교를 이용해 그 휴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짓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다 다른 휴먼들의 반발이 거세지면 또 다른 은하계 어디로 보내지겠지… ‘지구 유니언’에선 이런 것까지 알리가 없다. 세포 배양기에서 발아된 근본도 모르는 것 들이니.
“이제 알겠어… 그래서 스캇이… 죽은 스캇이, 그래서 보고서에 자신의 기록을 누락시킨 거구나.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울리치 미하르니까. 저 미하르를 보호하기 위해서.”
할은 스캇의 기록 누락이 미하르의 범법 행위를 눈감아주기 위해 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캇은 그냥 천재이기만 한 게 아니었구나.
한편 재시도 생각했다. 아, 역시 할은 똑똑하기만 하고 눈치는 없구나.
재시는 스캇이 미하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을> 위반한 건지, 아니면 안전하게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을 위반하고 위해 미하르를 끌어들인 것인지는 뭐가 먼저이고 나중인지는 모른다. 관심도 없다. 설사 알고 싶다 하더라도 그걸 말해줄 스캇은 이미 죽었다.
“할, 네 말이 맞아.”
“스캇이 미하르를 보호하려 했다고 한 거?”
“아니, 그게 아니라 스캇이 죽었다고.”
“응. 스캇은 죽었어. 죽었다면서? 재시가 알려준 거잖아. 그래서 죽은 스캇이 왜?”
“그래, 할! 스캇이 죽었다고. 스캇은 없어. 이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어?”
이번엔 할이 침묵했다. 이번에 할은 그냥 아무것도 몰라서 침묵했다.
“할, 스캇이 죽음으로써 블라디미르 그룹에는 생명 연구 팀원 한 명이 공석이 된 거야. 일원의 자리 한 개가 비어 있다고.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만 ‘지구유니언’ 사람인 네가 블라디미르 그룹의 일원이 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야!”
“기회? 내가? 내가 블라디미르 그룹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그래! 될 수 있어!” 재시가 어색하게 웃으며 희망차게 외쳤다.
“그래! 할, 될 수 있어, 충분히.” 그런 재시를 보며 민수도 따라 외쳤다.
“진짜? 내가 블라디미르 그룹의 일원이 돼?”
“맞아, 할! 네가 보고서만 훌륭하게 작성해 준다면!”
재시와 민수가 서로 쳐다봤다. 할은 재시와 민수,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광경을 드디어 보았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