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파 보고서 (마지막)

Chapter-5 유로파 보고서

by 옥광



Chapter-5 유로파 보고서


그루이트들은 평균 19시간마다 한 번씩 기지 앞으로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운드를 최대한 줄이고 홀로그램 스크린으로 모니터링만 하고 있다.


재시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요리를 하고 있다. 중간중간 민수를 불러 요리의 맛을 보게 하는데 솔직히 할은 그런 재시가 이해가 안 갔다. 염분과 당분, 온도와 농도가 이미 모니터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쓸데없는 짓을 굳이 왜 하는지 그 이유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이미 며칠 전에 물어봤었고 그 때, 할의 질문을 받은 재시는 잠시 후 할 몫의 고기를 태웠다. 재시는 크게 미소 지으며 실수라고 했지만 할은 알았다. 이것은 재시의 대화법이다. 만일 할이 재시가 하고 있는 쓸데없는 짓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면 재시가 고깃덩어리를 태우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할은 이제 안다. 입조심만 하면 재시가 만든 근사한 요리를 손쉽게 얻어먹을 수 있다. 그 요리들도 이제 얼마 안 남았지만.


“재료가 아깝다.”

“할, 왜?”

“민수 말이야, 방금 토하러 갔잖아. 먹자마자 다시 게워내는 게, 그럴 거면 아예 먹지 말아야 하는 거 아냐? 재료가 너무 아깝다고. 이제 재료도 거의 소진돼 가는 중이잖아.”


할은 아차 싶었다.


“맞아, 할! 그래서 이제부터 요리는 72시간마다 할까 하는데 어때? 합리적이지?”


아, 재시의 심기를 건드렸구나. 하지만 할은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불편해진 재시의 심기를 돌리는 방법도 알기 때문이다. 재시의 심기가 안 좋을 땐 재시의 아이들 이야기를 물어보면 된다. 게다가 할은 재시가 [블라디미르 3rd 스페이스 콜로니]에 지내고 있는 재시의 아이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즐겼다.


1형문명 이전의 휴먼은 77%의 인구수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1형문명에 도달했다. 살아남은 23% 중 20%는 지구를 버리고 구세대 콜로니로 향했고 지구에는 3%가 남겨졌다. 당시 지구는 3%를 유지하기에도 가혹한 환경이었다. 결국 3%의 휴먼이 얼마 안 남은 지구 자원으로 버티기 위해 택한 방법은 휴먼의 개체수를 제한하는 것이었고 철저한 인공수정을 통한 세포 발아로 환경에 맞추어 휴먼의 개체수를 조절했다.

구세대 콜로니로 떠난 휴먼은 콜로니에서 개체수를 늘려가며 오랜 세월 눈부신 발달을 이룩해 2형문명으로 도약했다. 3%의 휴먼에서 시작된 ‘지구 유니언’은 3%를 꾸준히 유지하며 밤하늘의 콜로니 별을 바라보는 어린 휴먼들을 공평과 평등이라는 이름의 교육으로 통제했다. 어린 시절의 할은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아이들과 똑같은 말만 듣고 똑같은 말만 했다. 그래서 재시가 스스로 ‘엄마’라는 단어를 부여하고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생경했고 흥미로웠다. 세 아이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각각 아이 개별적으로 세 가지 이야기가 존재했다. 세상에, 같은 자궁에서 나온 세 아이가 전혀 다른 생각과 다른 선택,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니!


재시와 민수는 유로파를 마지막으로 은퇴와 함께 블라디미르 연금으로 남은 시간을 보낼 거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있는 [블라디미르 3rd 스페이스 콜로니]로 돌아갈 때 하게 될 동면이 그들의 마지막 동면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그들은 오랜 은하계 탐사 생활로 아이들의 많은 시간을 놓친것에 미안해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은하계 탐사 생활로 아이들이 풍요로운 콜로니에서 늙어가고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콜로니 속도로 에이징 된 그들의 아이들은 셋 다 재시와 민수보다 신체 나이가 많다. 그중 두 번째 아이는 조만간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둘째 아이의 아이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재시는 앞으로 태어날지도 모를 둘째 아이의 손주가 될 아이에게 자신이라는 존재가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호언장담하고 있다. 그래서 이왕 돌아갈 거면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콜로니로 돌아가면 민수도 어떻게든 나아질 거란 희망도 가지고 있다. 약에 취해 잠만 재우고 있는 미하르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재시도 할의 보고서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할, 답신이 왔어?”


콜로니 아이들 이야기로 기분이 한결 나아진 재시가 할에게 보고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아직…”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그러게 말이야… 그러고 보니 민수는 좀 괜찮아? 한 동안 괜찮았잖아? 혹시…?

“혹시 뭐?”

“아니, 그러니까. 혹시…”

“민수는 괜찮아. 그냥 가벼운 구토에 소화불량이라고.”

“… 미하르는?”

“미하르가 왜?”

“계속 저대로 둘 거야?”


재시가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깔았다. 그리고 할을 똑바로 쳐다봤다. 자신의 말에 토 달지 말란 뜻이다.


“저대로가, 어때서? 할, 너는 다른 방법이 있니?”

“… 없어.”


미하르는 어느 시점부터 재시가 증상 완화를 목적으로 주는 약에 취해 감금되어 있다.


감금 전, 미하르는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를 잡아오라며 민수를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재시가 치료를 해주고 약을 주면서 진정시켰다. 한 번은 구토에 설사에 엉망진창인 몰골로 미하르가 졸라대니 민수는 그가 너무 불쌍했었나 보다. 재시에게 그냥 한 마리만 잡아오는 게 어떨까 물어봤다. 재시는 바로 입을 닫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인지 민수도 똑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재시는 민수가 필요로 하는 약도 안 주고 미하르의 약도 끊어 버렸다. 민수는 가벼운 소화불량만 호소했지만 재시의 약효가 완전히 떨어진 미하르는 얼마 안 가 폭주했다.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를 찾아내라며 포획유닛만 입고 난동을 부렸다. 그는 자신의 성기를 내놓은 채 기지 내 집기를 부술 듯이 돌아다녔다. 민수가 빠르게 포획유닛을 입고 나와 재시가 건네준 주사기로 미하르를 겨우 진정시킨 후 바로 재시에게 사과했다. 이 날부터 미하르는 쭉 감금상태다. 나중에 할은 이 날의 미하르가 단순히 여성형성기 그루이트와 성적인 접촉을 하지 못 한 것 때문에 난동을 부린 건지 아니면 재시가 조금씩 투약해온 약물에 의한 부작용으로 난동을 부린 것인지 재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재시는 할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만 날렸다. 현재 미하르는 298시간째 감금 중이다.


할은 똑똑한 아이였다. 지구 유니언은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발아된 세포 단계에서 DNA 분석을 한다. 이를 통해 필요 범주 이하의 재능 미달이 나오면 폐기처분하고 또, 필요 범주 이상의 재능 가능성이 보여도 폐기처분한다. 이것은 계속 이어졌다. 태어난 아이가 필요 범주 이하의 학습능력을 보이면 제거했고 필요 범주 이상의 뛰어난 학습능력을 보여도 제거했다. 할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똑똑했다. 어린 할은 정확한 이유를 가늠해내진 못했지만 옆의 친구와 똑같이 말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야 옆의 친구와 똑같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제거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공평과 평등의 통제 속에서 살아남으려던 할은 어느 날, 자살을 시도했다. 뭐가 먼저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똑같이 말하기 싫어서였던가? 똑같은 말을 듣기 싫어서였던가? 이 날, 지구 유니언이 그토록 염원하던 블라디미르 그룹과의 우주개발 협약이 체결되었고 자살시도 때문에 그대로 제거될 예정이었던 할은 ‘블라디미르 우주 협약 교육’ 참여자 명단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할은 지구유니언의 공평과 평등이라는 교육 때문에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통제에서 벗어난 ‘블라디미르 우주 협약 교육’에는 목숨을 걸고 임했다. 동면 실습에서 몇몇이 정신을 잃을까 두려워 끝까지 못 버틸 때도 할은 끝까지 해내고 정신을 잃었다.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을 배울 때는 전혀 다른 것을 물어보고 옆 사람과 완전히 의견을 제시했다. 할은 이 모든 것을 제거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함께 했다. 당연히 제거될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할은 점점 제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안정감도 느꼈다. 이 안정감을 주는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이 할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할, 네가 만들어야 할 보고서에서 몇 가지만 빼 줘.”


미하르를 감금시키고 29시간이 되었을 무렵이다. 재시가 보고서 작성 중인 할에게 몇 가지 누락시킬 것을 요구했다. 민수는 침묵으로 재시를 응원했다. 할은 당황했다. 몇 가지 누락이라는 뜻은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에 크게 거슬리는 걸 빼라는 말이다.


“일단 미하르의 성접촉 이야기는 꼭 빼!”


할은 재시와 민수가 해준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죽은 스캇이 그렇게까지 미하르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점에도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 음, 글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


재시는 스캇이 떠나고 난 후, 민수를 통해 미하르의 입장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미하르의 작은 아버지 ‘블라디미르 게레로’에게 미하르는 눈에 가시다. 블라디미르 그룹의 입지를 위해 블라디미르 일원의 개체수 유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기에는 미하르가 자신의 [블라디미르 1st 콜로니]에서 벌이는 짓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통제불능일 경우가 많았다. 이게 블라디미르 그룹 질서 유지에 오히려 독이 되어 궁여지책으로 그를 가끔 탐사팀에 끼워 다른 은하계로 보내는 이유가 됐다. 콜로니의 에이징과 트램을 통한 탐사팀의 에이징은 다르니 그 사이 미하르가 저지른 짓들이 정리되고 잊혀져야 하는데 그러기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


“미하르의 위법 행위가 공식화되면 미하르는 강제 소환될 수밖에 없어. 그러면 더 복잡해진다고. 그러니까 꼭 빼 줘.”

“뭐가? 뭐가 복잡해지는데, 재시?”

“흠, 할 너는 거기까진 알 것 없어. 그냥 빼주기만 하면 돼.”

“하지만 재시, 그루이트가 성교를 통해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에 관한 근거를 제시하려면 많은 예시가 필요해. 게다가 이 경우에는…”

“민수도 빼!”

“아, 민수…”


최근 반복된 초록빛 그루이트의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발생한 미하르와 민수, 특히 민수의 증상과 겹치는 발현 시간으로 재시도 할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여성형성기를 가진 대장그루이트가 자신의 노예가 되었음에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 재시는 이걸 인정하고 나니 민수와 미하르를 위한 대처가 한결 수월해졌다. 미하르가 돌봤던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보내오는 정보를 통해 재시는 아파올 시간을 미리 파악해 치료에 들어갔다. 그러고 나니 감금된 미하르는 거의 약에 취해 있거나 진통제와 마취제와 잠들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민수는 재시의 인정 이후 제대로 재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할, 왜 그래? 그냥 다 빼 달라고. 너한테 거짓말을 해달라는 게 아니잖아. 나와 민수가 겨우 이런 일 한 번으로 [블라디미르 3rd 콜로니]의 아이들을 못 만나야 속이 시원하겠니?”

“그렇지… 아니, 시원하다는 게 아니고.”


하… 겨우 이런 일 한 번이라니…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는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 서문에 1형문명 도약 이전부터 횡행한 휴먼과 휴먼의 정복전쟁에서 보여줬던 비도덕적 성교를 반성해 새로운 우주를 만날 때는 이를 금한다고 밝혔다. 지구에서 발생한 휴먼의 무차별한 자원 획득이 야기시킨 다른 종의 멸종을 반성해 이도 함께 금한다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강제로 한 것도 아니랬어. 민수는 오히려 그 그루이트가 억지로 한 거라고 했다고.”


할이 결정을 쉽게 못 내리자 재시가 재촉했다. 이 보고서는 중요하다. 재시와 민수의 말대로 이 보고서가 인정을 받는다면 할은 ‘블라디미르 그룹’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구 유니언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재시가 작은 고깃덩어리와 감자구이를 가지고 왔다.


“할, 이거 네가 다 먹어.”

“어? 재시, 이거… 우리 마지막 감자 아니야? 나 혼자 이 3개를 다 먹으라고?”

“할이 감자를 잘 먹더라. 우린 자주 먹던 거니까. 이건 할이 다 먹어.”

“지, 진짜? 내가 감자를… 이걸 내가 다 먹어도 된다고? 민수도, 민수도 동의했어?”

“당연하지, 할. 민수도 그러라고 했어. 그러니까 할이 다 먹어.”


할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조심스럽게 반으로 갈랐다. 마치 안에 연기가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들킨 듯 쪼개진 감자 사이로 큰 김이 수욱 올라왔다. 할은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았다. 그때, 같이 숨어 있다 달려드는 감자의 냄새도 너무 좋았다. 여기에 재시가 조금씩 준 하얗고 반짝이는 가루를 찍어 먹으면 오줌을 쌀 것같이 저릿하다.


“정말 민수가 스캇을 대신할 인원으로 나를 추천해 주는 거지?”

“응, 그렇다니까. 대신 할이 보고서를 아주 훌륭하게 잘 써줘야 해. 그래야 민수도 할 말이 생기지 않겠어?”

“훌륭하게, 잘.”

“그래, 게다가 너를 추천을 해주는 민수가 곤란해지면 어떻게 되겠니?”


대답을 하려던 할의 입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또 깜빡하고 제대로 식히지 않은 감자를 입 안에 넣은 것이다. 재시가 한껏 웃으며 할에게 아주 차가운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말한 것들 다 잘 기억하고 있는 거지? 명심해, 할. 훌륭한 보고서가 나오려면 뺄 건 빼야 한다는 거!”


할은 민수와 미하르의 이야기는 누락시켰다. 최대한 할이 본 그루이트 이야기만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성형성기의 큰 그루이트 주인과 남성형성기의 왜소한 그루이트 노예들, 어떻게 그것들의 주인이 왜소한 것들을 자기 노예로 삼는지, 그들의 생식기 안에서 자라나는 새끼들의 모습, 체내 임신과 출산 과정, 여기에 따르는 노예들의 대리 고통. 그것들이 할에게서 돌출 성기를 찾았던 행위. 이후, 할이 그것들로부터 대장 그루이트 대접을 받으며 기지까지 운반되었던 경험. 계속 기지 앞으로 찾아와 뭔가 거래를 하려는 그루이트들. 이것은 휴먼이 다른 여러 은하계 진출 후 처음 발견한 지적 생명체와의 첫 교류다. 지금 할은 탐사유닛을 착장하고 기지 앞에 나와있다.


[키키키, 끄으, 끅, 끄윽끄, 끼으, 끼, 끼이이이이이, 끼으크오]

“그래그래, 네들은 정말 끊임없이 떠드는구나. 도대체 언어 분석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할 옆에는 성기에서 빛이 나지 않는 여성형성기 그루이트가 서 있었다. 최근에 새로 본 대장 그루이트다.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도는 반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근사한 녀석으로 키가 족히 190cm는 돼 보인다. 발아래, 젤 속에는 이 여성형성기 그루이트의 노예 그루이트들이 떠받쳐 주고 있었다. 할도 마찬가지로 이것의 노예들로 보이는 다른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젤 속에서 떠 받쳐 주고 있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근래에 들어 할을 더 높이 올려주고 이것이나 다른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을 더 낮게 내려 할의 눈높이를 맞춰주고 있다. 이것들 배려도 할 줄 안다. 젤이 할의 발목에서 찰랑거리고 이것은 무릎 위에서 찰랑거린다. 젤 속에선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의 카틀레야 꽃잎이 수줍은 듯 봉오리 져 성기를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젤 표면에 초록색 빛이 어른거린다. 배가 볼록 나온 초록빛 여성형성기 그루이트가 한 노예 것의 성기를 감싸 쥐고 젤 위의 할에게 들이밀었다.


“어허, 자꾸 이러면 곤란해. 나는 우리의 대장이 아니라고. 아직은… 아직은 말이야.”

━━━━ “할, 뭐 해? 그만하고 빨리 들어와.”

“재시? 왜?”

━━━━ “왜는 무슨 왜야? 빨리 들어오기나 해.”

“알았어, 알았다고. 들어갈게.”


할이 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려 탐사유닛에 감싸진 풍선 같은 왼발을 들어 올렸다. 노예 그루이트들이 할을 기지 쪽으로 옮겨주기 시작했다. 이대로 젤 위를 미끄러져 가는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할은 프레쉬 룸에서 필터링하는 내내 그 기분을 상기시켰다.


재시는 할이 그루이트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한다. 그런 재시는 할이 프레쉬 룸 필터링이 충분하지 않으면 썩은 달걀 냄새가 진동한다며 매번 호들갑을 떨었는데 오늘따라 빨리 나오라고 재촉이다.


━━━━ “할,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재시, 자꾸 왜 그러는데? 민수 때문에 그래? 걱정 마. 초록빛 그루이트는 아직 출산 전이야.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지 않아.”

━━━━ “나도 알아. 그것의 임신 상황은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그보다 보고서에 관한 답신이 왔어. 빨리 와!”

“정말?”


재시는 그루이트들 거래문화 이야기도, 지적 생명체 가능성 이야기도 다 누락시키라고 했었다. 그러나 할은 이것만은 할 수 없었다. 이 그루이트들은 할을 휴먼들의 대장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장차 할이 블라디미르 그룹에 입성해 거래문화를 가진 그루이트들과 유로파의 젤을 거래할 시 그 선봉장에 할이 서게 될 것이다. 이 젤은 앞으로 더 먼 은하계 연결 트램을 위한 동면 겔(gel)로서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이고 할은 블라디미르 그룹의 임원까지 오를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되면 할은 미하르와 민수 건도 다 바로잡을 것이다.


‘재시, 네가 틀렸어. 두고 봐!’


“할! 너는 진짜! 왜 이렇게 늦어? 빨리 확인해봐!”


할은 크게 심호흡하고 할 혈류 안에 돌고 있을 나노칩을 찾아 스캔했다. 곧 확인 허가 승인이 떨어졌다. 재시가 할보다 더 가까이 할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바짝 붙어 섰다. 할은 재시에게 밀리지 않으려 버티면서 답신을 확인했다.


【지구 유니언 소속, 코스모 바이올로지 13팀 파견 연구원 할의 유로파 행성 생명체 그루이트에 관한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따라서 그루이트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을 다수 가지고 있는 생명체라는 것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에 뿌리를 둔 휴먼으로서 1형문명 이전부터 외형에 따른 인종, 염색체에 따른 성 등 다름에서 오는 차별을 극복하고 모두의 평등을 위해 힘써왔다는 사실을 지난 무구한 역사가 말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한 파견 연구원 할의 편협함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다른 은하계, 다른 행성의 외계 생명체라고 하나 그 생식기 생김새와 쓰임새의 특징을 두고 단순히 지구 휴먼의 것과 비교하여 암컷, 수컷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행위는 파견요원 당사자의 편협하고 얕은 사고 수준이 반영된 결정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암컷이 다수의 수컷을 지배하는 무리 사회라는 표현, 그 시발점부터 큰 문제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기의 모양새와 쓰임새, 몇 가지 생식기 외에는 외형적 크기, 완력 면으로 보자면 대장 그루이트는 휴먼 남성과도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이미 1형문명 이전에 멸종한 ‘아마조네스’라는 문구까지 인용해 가며 그루이트를 표현한 파견 연구원 할에게 깊은 실망감을 전하는 바이며 또, 그루이트에게 거래문화가 존재하고 이것을 이유로 그루이트의 지적 생명체 지정 가능성에 관한 파견 연구원 할의 의견을 신뢰할 수 없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현재 블라디미르 그룹은 유로파 젤 개발에 착수하려는 단계이며 이에 따르는…】


“재시… 이게 무슨 소리야? 왜 신뢰를 못 하겠 다고… 여성형성기를 가졌으니 암컷이라 하고 남성형성기를 가졌으니 수컷이라고 한 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


할은 머리가 띵했다.


“할! 내가 그거 넣지 말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분명히 넣지 말라고 했잖아.”


할은 재시가 내지르는 짜증에 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왜 보이는 그대로 기록한 걸 편협하다고 하는 거지? 내가 무슨 얕은 사고를 반영했다는 거야? 그리고 재시! 저 아마조네스가 어쩌고, 암컷이 수컷을 지배하네 어쩌고 하는 부분은 네가 피력한 의견이잖아. 그렇게 해야 설득력이 있다고 네가 말한 거라고!”

“할, 내가 언제 그랬어? 그냥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한 것뿐이지. 그걸 그대로 따라 적은 건, 할 네가 스스로 한 거잖아!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협박이라도 했니? 너 내가 잘해주니까 이제 아주 만만하구나? 내가 우스워?”

“아니, 그건 아니고, 할.”

“그럼 네가 뭔데 말을 안 들은 거야? 지적 생명체 어쩌고 하는 건 진짜 넣지 말았어야지! 처음부터 넣지 말라고 말했었잖아!”

“왜? 왜, 이게 어때서? 이거야말로 정말 위대한 업적이 될 텐데!”

“허… 위대한 업적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진짜!”


씩씩거리며 질러대던 재시는 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여러 번 되묻지 말라며 딱 한 번만 말할 거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그룹은 곧 유로파 행성의 그루이트들을 멸종시킬 거야.”

“왜?

“되묻지 말라고 했잖아! 하긴 넌 할이지… 왜긴 뭐가 왜야, 걸리적거리니까 그렇지.”


할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깥 상황을 보여주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쳐다봤다. 그루이트들이 무리 별로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어떤 무리는 거래 중인지 노예 그루이트들이 위를 향해 누워 성기의 카틀레야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초록빛 그루이트가 자리를 잡고 앉는 게 보였다. 곧 출산을 시작하려나 보다. 초록빛 그루이트 주변의 노예 그루이트들이 픽, 픽 한 마리씩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뭐? 민수 걱정이라도 하고 싶은 거니, 할? 민수는 이미 조치를 취해 놨어. 동면 캡슐에 들어가 있으니 저게 새끼를 낳는 동안 별일 없을 거야.”


말 그대로였다. 민수는 초록빛 그루이트의 출산이 진행될 동안에는 키핑룸의 죽은 그루이트 옆에서 동면을 취했다. 유로파의 젤을 가공한 겔(gel)로 동면을 하니 수면 중에도 고통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긴 시간 동면은 불가능하지만 짧은 동면에는 문제가 없었다. 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급하게 가공한 겔(gel)이라 동면 후, 프레쉬 룸에서 꽤 오랜 시간 필터링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재시! 블라디미르가 그루이트들을 멸종시킨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할. 저 그루이트들을 싸그리 다 죽여버릴 거야. 씨를 말려버릴 거라고. 그래야 이 행성의 젤을 마음대로 퍼다 쓸 수 있을 테니까.” 재시는 할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할, 너는 하나부터 열까지 꼭 다 말해줘야 알 수 있는 거구나.”

할을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 그럼 이 행성 자,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어. 아니, 파괴돼.”


할의 우려에 재시는 콧방귀를 뀌었다.


“쳇, 그깟 행성 하나 없어지는 거 알게 뭐야. 할, 블라디미르 그룹이 우주에 트램을 건설하면서 파괴한 행성의 숫자가 몇 개일 거 같니? 그리고 내가 말했지. 정말 그 많은 행성들 중에 기준에 부합된 지능을 가진 지적 생명체가 단 한종도 없었을까? 정말 단 한종도?”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는 재시의 기세에 눌려 할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재시는 홀로그램 모니터로 초록빛 그루이트 다리 사이로 머리를 보이는 새끼 그루이트를 보며 말했다.


“대충 돌고래급이라고 했으면 당장 멸종은 면할 수도 있었을 거야. 하긴 어차피 시간만 버는 거지. 언젠간 전부 멸종시켰을 테지만.”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해?”

“누구긴 누구야, 우리 휴먼이라니까.”


할은 믿을 수 없었다. 이미 가질 만큼 가진, 넘칠 만큼 넘치게 가진 게 휴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먼이 휴먼에게 행했던 비도덕적 행위를 이제 다른 행성 생명체에게 반복하고 있다. 할은 스크린을 바라본 채 망연자실, 넋 나간 꼴로 서 있었다.

작은 새끼 그루이트가 초록빛 그루이트의 품에 안겨 있는 게 보였다. 고통을 호소하던 노예 그루이트들도, 다른 대장 그루이트들도 새끼 그루이트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작은 아이 그루이트들도 젤 속에서 나왔다. 노예 그루이트들이 아이 그루이트들 한 마리씩을 소중하게 안아 올리는 게 보였다.


재시는 혀를 차며 마냥 순진한 할을 혼자 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민수와 자신의 콜로니 귀환 계획이 틀어졌으니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행성정리팀’이 도착할 때까지 꼼짝없이 유로파를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민수를 언제까지 저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아가는 길에 잠시 미하르를 살펴보았다. 포획룸에 감금된 미하르는 재시가 준 약에 취해 고통과 흥분을 동시에 발산하고 있었다. 미하르 건으로 어떻게 잘 흥정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미하르를 감금시킨 지 892시간째다. <2형문명 지구환경 보호법>에 휴먼과 관련된 감금 조항은 없다.











끝.


keyword
이전 04화유로파 보고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