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광 Jun 23. 2023

주홍 글씨

<식은 연애>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그냥 던진 돌 하나가 알지도 못하는 개구리를 죽이고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는 검정보다 짙은 주홍글씨를 새긴다.


“오~ 장순규! 거 봐. 너는 가을 웜톤이라 브라운 계열이 잘 어울릴 거라고 했잖아. 역시 내 말 듣길 잘했지? 오늘 완전 고급스러워 보여. 너 지난번 진성이 형 결혼식 때 입은 봄나물 같았던 그 그린톤은 정말…”

“정말? 정말 뭐? 그래서 너는 그날 하루종일 내 얼굴이 똥빛이라고 말했던 거니?”

“아니, 나는 그냥 그 그린톤이 네 예쁜 얼굴빛을 칙칙하게 만든다는 그런 의미로...”

“아, 그래서 애들이 나 변비 있냐고 놀릴 때까지 계속 말한 거야? 애들 앞에서 너는 꼭 그래야만 했니?” 순규에게 잊혔던 섭섭함이 밀려왔고,

“아… 진짜 그건 미안하다고 했잖아. 정말 미안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어.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뜻도 없이 한 말이야. 그러니까 미안해. 응? 미안해 순규야.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라.” 선웅은 아랫입술 밑으로 귀여운 호두 알을 만들고선 순규를 달랜다.

“원래 개구리가 그런 돌에 맞아 죽는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그런 돌.”

“아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색이 개구리색인 건가?”

“야! 김선웅!”

 

선웅이는 좋은 남자다. 고등학교 3년을 바짝 말려 지낸 옥수수 알갱이들이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라는 불판 위에 와르르 쏟아진 날이었다. 처음엔 쭈뼛쭈뼛 어색하게 달그락거리기만 하더니 술로 불판이 달궈지자 하나 둘 우당탕탕 튀기 시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술에 취해 튀어 올라 마구 뒤엉키는 팝콘들. 물론 순규도 술에 튀겨진 팝콘 중 하나였고 다음 날 아침, 뇌가 쪼개지는 숙취 속에서 끝까지 맨질맨질한 옥수수 알갱이로 남아 있던 선웅을 기억해 냈다. 마신 술을 토해내겠다며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애꿎은 눈물, 콧물, 침만 질질 흘리던 순규를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것도 선웅이었다. 그렇게 만난 선웅이는 좋은 남자다.


187cm의 보기 좋은 키. 축구며 농구 등 팀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내는 뛰어난 운동 신경. 그래서 헬스장 근육과는 근본이 다른, 생활 체육으로 생성된 군살 하나 없는 다부진 근육들. 거의 모든 야외활동에 빠짐없이 참여함에도 변함없이 건강하면서 하얀 피부. 누가 봐도 호를 외칠 좋은 인상, 잘생김.

이뿐만이 아니다.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 조별 과제를 할 때는 같은 조원이 되고 싶은 학우 1순위. 그런 선웅이 입대를 하루 앞둔 밤, 순규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고 순규는 선웅의 뜻에 따라 18개월 후 선웅이 제대한 낮, 고백에 대한 대답을 했다.


그때부터 순규는 과에서 가장 유명한 여학우가 되었다. ‘김선웅의 여자친구.’ 살면서 이만큼의 관심을 받아봤던 적이 있던가?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18개월 동안 수없이 시뮬레이션해 봤던 시기와 질투. 충분히 예상 가능한 힐끗거림과 수군거림. 또 예상 밖의 모함과 몇몇 참신하기까지 했던 험담. 김선웅의 여자친구로서 감당해야 할 후폭풍은 상당했다. 그러나 순규는 무섭지 않았다. 이 또한 선웅이 있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지적능력에 성격도 좋은 데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친구 김선웅. 선웅은 순규의 곁에서 여자 친구가 감당해야 할 후폭풍을 충실히 막아냈다. 덕분에 순규는 항상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고 신입생때와는 달리 점점 친구들이 늘어났으며 성공적인 다이어트까지 해냈다. 마침내 누가 봐도 이의 제기를 하기 힘들, 선웅에게 어울리는 예쁘고 세련된 여자친구가 된 것이다. 비로소 폭풍이 지나갔다.


“헐, 순규야, 이 건강한 대장에서 나온 듯한 황금변색 블라우스는 뭐니?”

 

진성이 오빠다.


‘뭐? 건강한 대장이라니…’ “오빠 안녕하세요.”

“아! 형! 제 여자친구한테 황금변이라뇨? 이 형은 이런 센스로 언론사 기자는 어떻게 하는 거야? 순규 퍼스널 컬러에 입각해 심사숙고해서 고른 컬러예요.  이게.”

순규를 위해 당연히 선웅이 나섰다. “뭐야? 역시 김선웅.”, “야, 니네는 몇 년을 사귀는데도 아직도 그대로냐?”, “선웅이는 아직도 자기 여자 친구 과잉보호 중이야?”, “장순규는 좋겠어.”

 

다들 선웅 순규 커플을 칭찬했고 순규는 언제나처럼 입을 꼭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형! 누나는? 세화 누나는 왜 안 보여? 왜 없는 거야?”

“그래, 결혼식 때도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세화 누나를 내놓으라고.”

“우리는 세화 누나가 보고 싶다고!”

“애들아, 세화는 바빠. 세화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세화는 니들 같은 월급루팡이 아니라 글로벌 G기업의 핵심 멤버야. 알겠니?”

 

동아리에서 만난 3학번 위 선배인 세화와 진성은 순규와 선웅이처럼 동갑내기 CC였고 꽤 오랜 연애 끝에 두 달 전 소박하지만 예쁜 결혼식을 올렸다. 오늘은 그들의 신혼집 집들이 날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남자애들이 우격다짐으로 약속을 잡은 것 같긴 하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주말인데도 출근을 한다고? 이거 이거 글로벌 G기업 워라밸은 밸붕이 고만!”

“우리도 이제 사회인인데 또 언제 이렇게 모이겠냐고. 누나는 그 스케줄 하나를 못 바꾸냐? 정말 너무 섭섭하다.”

 

배달 음식에 맥주로 배를 채우는 것에 참석한 동기들이 한 마디씩 투덜거린다.


“야야, 왜들 그래? 우리가 아무리 섭섭하다 한들 진성이 형만 하겠어?” 선웅이 그들을 진정시키려 나섰다.

“나? 아닌데? 나는 한 개도 섭섭하지가 않은데 니들이 뭔데 섭섭하다고 난리냐?” 애초에 세화는 집들이를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진성이 목소리를 키워 한 소리 하려는데 뒤늦게 도착한 커플로 인해 사그라들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야, 누구셔?”

“응?”

“너는 인마, 소개부터 시켜줘야지. 빨리 인사시켜 줘.” 다들 익숙한 얼굴 너머 새로운 얼굴의 등장을 반겼다.

“아?! 인사해, 인사해. 내 여자 친구. 저번에 말했던 그…”

“이 자식… 그때 그 소개팅?”

“응.”

 

다들 몇 년을 함께한 과동기이자 선배이긴 해도 남자들뿐이라 뭔가 불편했는데 같은 여자가 한 명이라도 생기니 순규는 뭔가 편안해졌다. 남자 동기의 새로운 여자 친구는 아직 대학생이라고 했는데, 23살? 어리고 예뻤다.


“선웅아, 이제 순규도 빡세게 관리 좀 시켜야겠다. 이렇게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데 방심하면 안 돼.”

“그래 훅 가는 건 한 방이야.”

“야, 야! 니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것들이 기강이 해이해졌구먼. 그리고 순규는 그냥 순규가 아니야. 니들한테는 형수님이라고. 앞으로 말 조심해라.”

 

순규는 기분이 나빠질 뻔했지만 선웅이 있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진성이 오빠?”

“응? 순규 왜?”

“저기… 오빠네 언론사 이번에 그 인턴십 공고 났던데… 저 그거 지원해 보고 싶어서요…”

“오~ 순규? 언론고시 결심 선거야?”

“... 네!”

 

얼마 전까지 막연했던 취준생 순규의 꿈은 최근에 와서 선명해졌다. 적극적으로 티 내지는 못 했지만 충분히 관심 있던 직업, 정치부 기자. 경영학 전공자인 순규는 얼떨결에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까지 복수전공을 이수했고 다들 선웅의 도움이 컸다며 그를 칭찬했었다. 순규에게는 공이 누구에게 가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질러보고 싶을 뿐이었다.


“기자? 순규가 기자를 한다고? 선웅이 말로는 아나운서 준비 중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니야?” 동기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 김선웅. 기자하고 아나운서 하고 같은 거였냐?”

“음… 글쎄.”

“야! 니들은 순규가 하겠다는데 왜 그걸 선웅이한테 물어보냐? 그런 건 당사자한테 물어봐야지. 니들 맥락 못 잡는 건 여전하구나, 여전해.”

“아니, 형님! 우리말은 그런 게 아니고요.”

 

다들 당사자인 순규를 제쳐 두고 선웅이를 거쳐 이번엔 진성에게로 달려든다.


“하하하, 좀 시끄럽죠? 우리끼리 모이면 애들이 원래 이래요.” 순규는 친구의 새로운 여자친구에게 친절하고 싶었다.

“네?”

“애들이 좀 원래 시끄럽다고요. 철이 안 들어요, 철이.”

“아… 네. 저기…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아, 그럼요.”

“언니는 이 오빠들 오래 보셨나 봐요?”

“네?”

“아니, 언니는 저 오빠 여자 친구시라고 들었는데… 저 오빠랑 사귄 지 오래되셨나 봐요. 다른 오빠들도 잘 아는 것처럼 보여서.”

“네? 그게 무슨… 쟤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거야? 저는 그냥 여자 친구가 아니라, 아니 내가 왜 이런 말을 해야 되지? 저기요, 저도 같은 과 동기예요.”

“아, 저도 그건 알아요. 그래서 그럼 언니도 친구인 거예요?”

“네?!”

 

순규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녀의 남자 동기를 쳐다봤다. 그러나 쳐다만 볼 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물쩡거렸고 괜히 애꿎은 빈 그릇만 정리했다.


“순규야, 손님이면 손님답게 얌전히 있자.”

 

화장실에 가던 진성이 그런 순규에게 한 소리 하자 선웅이 조용히 순규의 손에서 빈 그릇을 받아내며

 

“기자라… 우리 순규는 기자는 힘들 건데… 특히 정치부 같은 데는 진짜 어렵지. 왜냐면 말이야…” 무슨 재밌는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선웅은 그린톤과 브라운톤의 차이를 설명했던 그때처럼 천천히 운을 뗀다.

“뭐야? 김선웅. 뭔데 뜸을 들여?” 나머지 동기들이 호기심을 보이니,

“순규가 기자에 관심 보이는 게 아마 이준석 때문일 거야. 그런데 안돼 안돼. 장순규, 그건 내가 허락 못 한다. 남자는 나 하나로 만족해 줘라, 부탁이다.”

“이준석? 그 국힘 파이 당한 이준석? 이준석이 왜? 순규랑, 너랑, 이준석이 왜?”


순규는 설마설마했다. 몇 년 전 생각나는 데로 아무렇게나 말 한 그 몇 마디가 이제 와서 왜?!


“야, 김선웅.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순규는 선웅의 소매를 잡고 조용히 흔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니들도 알다시피 순규가 좀 생긴 거에 약하잖아. 순규가 저번에 이준석이 동글동글 귀엽다고 괜찮다고 했었거든.”

“뭐?! 아니, 순규야. 너 도대체 왜 그랬니?”

“순규가 그때부터 그런 거에 관심을 좀 갖더라고. 너 이준석 관련 짤도 많이 찾아봤었지, 아마?”

 

선웅의 선한 미소가 담긴 눈이 순규의 당황한 눈과 마주했고 순간 순규의 얼굴이 빨개졌다. 취기가 오른 걸까? 아니면…


“그때, 순규가 국힘 당대표 누가 되냐 했을 때 이준석이 더 잘 생겼다고 이준석이 돼야 된다고, 안철수는 못생겨서 안 된다며 강력한 논리를 펼쳤었지.”

“아니, 순규! 누가 얼빠 아니랄까 봐. 정치인을 오로지 외모로만 평가했어?”

 

그랬었다. 그때는 정말 외모만 보고 일본 거북이 요괴 소보루빵 같은 안철수보다는 젊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이준석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말도 이준석이 훨씬 잘하는 걸로 보였다. 그런데 그때만 잠깐 그랬을 뿐인데. “이준석이 더 잘 생겼잖아.” 이 말 한마디가 이런 주홍글씨가 되어 돌처럼 날아들 줄은 몰랐다. 얼빠 장순규. 선웅은 그때의 순규가 몹시 귀여웠다고 추억하며, “우리 순규 귀엽지?” 지금도 귀엽다고만 한다.


“아아, 알겠다. 순규가 그래서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거구나. 이준석 보려고? 아니다. 지금은 더 어린 정치인 잘생긴 애들 있을 텐데. 순규야 우리가 찾아봐 줄까?”

“야 미쳤어? 니네가 그런 걸 왜 찾아?”

 

선웅은 순규가 귀엽다는 발언을 끝으로 그의 친구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뒤로 빠졌다.


“순규야, 정치부 기자는 그런 게 아니야. 너 그렇게 얼굴만 보고 지지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정치는 번지르르한 겉만 보면 안 돼.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지.  안 그러냐? 선웅아.” 어느새 주종은 와인으로 바뀌어 있었고 동기들이 빠르게 와인잔을 비워내자 선웅은 능숙하게 빈 잔을 채우기만 한다. 친구들의 발언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순규는 아직 멀었어. 선웅이한테 더 배우고 와야 돼.”

“그래, 순규가 나이만 먹었지, 아직 어리지 어려. 차라리 기자를 할 거면 연예부가 낫지 않나?”

“지금도 봐 봐, 술 좀 들어갔다고 볼 빨개진 거. 기자가 술을 얼마나 먹어 대는데. 순규야, 그냥 선웅이가 추천한 아나운서가 낫지 싶다.”

 

한 번 닳아 오른 순규의 얼굴이 좀처럼 식지 않는다.

 

“야, 내가 언제 얼굴만 봤다고 그래? 그리고 나 지금은 이준석 안 좋아해! 하나도 안 좋아한다고!”

“뭐? 왜? 살쪄서? 하긴 이제 옛날 같지 않지.”

“아니!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런 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 기준에 이준석이 뱉는 말들이 하나하나가 다 편협해서, 동의할 수 없어서 안 좋아하는 거라고!” 순규는 목소리가 조금 커졌고 이따금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런 목소리 상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얼굴은 더 빨개져만 갔다.


“어... 순규야, 네가 자극적인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만 보고,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는 건 아닐까?” 비로소 선웅이 스스로에게 발언권을 줬나 보다. 선웅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순규는 그만큼 친절하지 못했다. “김선웅, 헤드라인만 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뉴스 다 읽어! 그래서 나도 다 안다고!”

“순규야,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은 네가 뭘 모른다는 게 아니라 사람을 판단할 때 그렇게 단편적으로 보는 건 옳지 않다는 걸, 그걸 말하려는 거야.”

“선웅아, 내가 뭐가 단편적이라서 무슨 판단을 어떻게 했다는 거야?”

“하, 안 되겠다. 우리 순규 취했나 보다. 평소 너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그러네… 괜찮아? 아이스크림 사다 줄까?”

“갑자기 무슨 아이스크림이 타령이야? 됐어!”

“이런, 어떡하지? 순규 진짜 삐졌나 보다.”

 

걱정스러운 눈빛의 선웅이 입술을 삐죽 내미니 턱에 호두알이 생겼다. 순규는 저 호두알을 잘 알고 있다. 저 호두알은 제발 삐지지 말아 달라는 딱 거기까지만 하라는  부탁이자 신호다.


“야, 애들아. 이준석이 왜? 뭐가 문젠데? 그건 나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이준석이랑 시사 꼭지 여러 번 진행했잖아. 자 무엇이든 저한테 물어보세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진성이 이야기의 주제를 다시 이준석으로 잡는다.

“아, 맞네 이준석이 형이 막내였다던 프로에 자주 나왔었잖아. 어때요? 술도 잘하나?”

“술이라… 술을 잘한다기보다… 술을 열심히 하지. 일단 빼는 법이 없어. 그리고 결정 적으로 사람이 성실해.”

“성실하다고?!”

“응. 성실해. 방송에 관련된 스케줄은 거의 빼는 법이 없어. 토크에 임하는 자세도 적극적이라서 작가들이 아주 좋아하지. 사운드에 마가 끼는 법이 없거든. 심지어 잠수 탄 게스트 대신하는 땜빵도 잘해준다니까. 그런 건 아주 훌륭해.”


순규는 성실과 훌륭이라는 말에 발끈했다.


“아니?! 그래 뭐… 성실은, 할 수 있다고 쳐요. 그래도 훌륭은… 본인이 청년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그게 언제 적이야? 아니 자기는 나이 안 먹나?! 이준석도 꼰대야. 게다가 깊이도 모르겠고."

"아니지. 우리는 사회생활 해 봐서 알잖아. 순규야, 네가 아직 회사를 안 다녀봐서 모를 수도 있는데 성실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야. 게다가 이준석이 가끔 합리적인 말을 할 때가 있었어. 무리수를 좀 둬서 그렇지. 지금은 짠하다만 정부가 바뀌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함부로 단정 짓는 건 금물이야. 멀리 봐야 된다고."

"아니야, 이준석 문제는 사람이 너무 정치적라는 거라고!"

"아니, 우리 순규는 도대체 무슨 짤들을 본 거냐?"

“어머, 오빠 정치인은 정치적이니까 정치인 아니에요?”, "오~ 맞네, 맞아. 하하하."갑자기 동기의 어린 여자 친구가 끼어들었고 다들 대단한 유머라도 발견한 듯 크게 웃는데 순규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 그게 그 말이 아니잖아. 내 말은! 깊지 못한 정치적인, 얄팍한 정치인들이 관심 갖는 주제는 자극적인 데에만 국한되어 있어서, 서로 싸움 붙이기 쉬운 혐오 조장에 용이한 문제에만 목소리에 힘을 낸다고! 그러니 자꾸 사탕에 꼬인 파리떼마냥 앵앵거리지. 파리는 절대로 사탕을 갖지 못해. 사람들은 그런 파리떼는 쫓아낸다고! 정치는 다수가, 혹은 특정 이익집단이 좋아할 것 같은 생각을 맞추는 눈치게임이 아니야. 그런데 정치인들이 자꾸 그런 게임만 하려고 들잖아. 또 사람들은 쓸데없는 그런 게 공정한 건 줄 알고!”

 

순규는 씩씩거렸다. 중간중간 목소리도 뒤집어졌고 여기저기 침도 튀었다. 몇 번 발음도 꼬인 것 같았는데…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아 바로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뱉은 말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와… 순규, 옛날 세화 보는 것 같다.” 진성 외엔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좋은 남자친구 선웅마저 순규를 돕지 못하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 침묵을 깬 건 예의 그녀였다. 이번엔 작은 속삭임으로.


“오빠… 저 언니 취한 거야? 왜 이렇게 무서워?”

 

친구라고 생각했던 동기의 어린 여자 친구의 속삭임은 분명 속삭였음에도 모두에게 들렸다. 순규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저기요! 다 들리거든요! 저 취한 거 아니거든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사실 혹시라도 취한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아니 순규야! 너 내 여자 친구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오늘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러면 안 되지!”

“뭐? 그럼 두 번째 만난 자리에선 괜찮니?” 아… 결국 순규는 자신이 취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순규야, 나가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자. 응?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선웅이 얼른 순규를 일으켜 세웠고 선웅에게 의지해 겨우 일어선 순규는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출렁이는 걸 느꼈다.


“오빠, 나 재밌는 이야기 해주라. 나는 정치 얘기는 싫단 말이야. 어렵기만 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어잉.”

“그래그래, 어쩌다 분위기가 이렇게 됐는지… 우리 게임하자, 게임!”

 

순규는 세화 언니가 저 나이의 순규를 바라보며 지금의 순규처럼 생각했을까 덜컥 겁이 났다.


“저기요! 오늘 처음 만난 어린 여자분! 요새는 검색하면 다 나와요. 한글만 알면 여기저기 다 나와서 어렵지도 않아. 뉴스는 또 얼마나 쉬운 줄 알아요? 댁 같은 분들에게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설명을 해준다고. 그러니까 제발 좀, 제발 관심 좀 가지세요!”

“앙... 오빠 무서워...”

 

어린 여자분이 도대체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냐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니 한 때 친구인 줄 알았던 그녀의 남자친구가 버럭 한다.


“야! 장순규! 너는 인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험악한 목소리…

 

그 이후로는 잘 모르겠다. 잠깐 사이 선웅의 손에 이끌려 나온 순규는 아파트 밖 화단 턱에 주저앉아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니 차라리 바닥에 붙어 같은 방향으로 도는 게 낫다 싶어서다. 선웅이 그런 순규의 곁을 지키며 같이 앉아 있다.


“어휴, 이거 손 찬 거봐. 너 오늘 왜 이렇게 마신 거야? 너 내가 모르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몰라…”

 

잠시 까무룩 했었나 보다. 어느새 순규의 손에는 아이스크림 빵빠레가 들려 있었다. 선웅은 순규를 살뜰히 챙겼다. 혹시 오바이트는 하고 싶진 않은지, 더 사 와야 할 필요한 물품은 없는지. 그리고 다음 여러 가지도 친절하고 정성스레 챙겼다.


“순규야, 너 정신 좀 차리면 들어가서 그 친구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거다, 알았지?”

“뭐?”

“아니, 생각해 봐. 그 어린애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검색 어쩌고 그런 말까지 한 거야?”

“뭐?”

“그렇잖아. 오늘 집들이 분위기 솔직히 너 때문에 좀 그랬잖아. 그러니까 마무리는 좋게 좋게 하자고.”

“뭐?”

“응? 좋게, 좋게 알았지? 그리고 이준석 그렇게 말하는 거 하지 마. 요새는 그런 의견 함부로 내는 거 위험해. 특히 아까처럼 감정까지 실려 있으면 더 해. 사람들이 불편해한다고.”

“함부로, 불편... 뭐?”

 

순규는 선웅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취하는 것 같았다. 선웅이는 왜 저럴까? 순규가 이준석에 대해 이야기했던 건 예전 그때 한 번뿐이다. 그 이후로는 선웅의 말대로 여기저기 각종 짤을 찾아보긴 했지만 그것에 대해 선웅이와 특별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것 말고도 둘은 할 이야기가 언제나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선웅은 항상 새로운 이슈를 찾아냈고 순규의 찾아낸 이슈는 껴들 자리가 없었다. 참을 수 없다! 취기가 정수리를 뚫을 기세로 오른 순규는 결판을 내고 싶었다.


“야! 김선웅!”

“응? 왜 순규야 뭐 필요해? 두통? 약 사 올까?”

“아니 그게 아니고!”

 

머리로는 이미 이건 아니라는 결론을 알고 있어도 술에 취한 자의 입은 머리를 따라주지 않는다. 지금이 딱 그렇다. 순규의 입은 그 머리를 따르지 않았다.


“너, 김선웅! 아까는 왜 이준석 편들었어?”

“아휴, 순규야. 내가 무슨 편을 들었다고 그래? 그냥 사람을 쉽게 단정 짓지 말자고 한 거지.”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너는 막 그렇게 하잖아. 그러니까 지금 똑바로 대답해!”

“너도 참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뭐 잘못한 거야?”

“너 나야? 이준석이야?”

“응?”


아, 이 무슨 유아기 때나 종종 듣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급의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이란 말인가! 게다가 선웅이 그렇게 경계하라 일렀던 감정까지 300프로 실려 있다.


“빨리 말해! 나야? 이준석이야?! 선택해!!”

 

순규는 겁도 없이 이준석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니 이준석한테 내민 게 아닌가? 아, 모르겠다. 아무튼 심판은 선웅이다.


“장순규, 아무리 취해도 그렇지. 세상에 그런 질문이 어딨어?”

“어딨긴 어딨어? 여깄지! 빨리 대답해! 나야? 이준석이야?”

선웅은 좀처럼 대답을 못 했고,

“대답해! 나야? 이준석이야? 빨리 결정하라고! 자! 지금부터 너에게 5초의 시간을 줄 거야.”

“순규야. 장순규!”

“답해! 5, 4, 3… 2이… 이르으...”

 

순규는 자신의 카운트에 맞춰 잠이 들었다.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들려 있던 빵빠레가 순규의 황금변색 브라운 셔츠를 스쳐 선웅의 바지 위로 곤두박질쳤다. 순규는 꿈결 같았던 이 장면이 왠지 좋아 한참을 웃었다. 물론 꿈속에서.


5초 안에 결판 나길 바랐던 승부는 10일을 꽉 채우고서야 승패가 가려졌다. 결과는 순규의 완패. 심판을 봤던 공명정대하기로 소문난 선웅은 주변의 여러 참견에도 결과를 번복하지 않았고 순규는 이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동기들은 힘겨운 판결을 내렸다며 패배한 순규보다 선웅을 위로했다.


처음 이 패배는 순규에게 쓰디쓴 고통이었다. 아팠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니 돌처럼 날아들었던 주홍글씨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결국 패배의 만족도는 높아졌다. 좋은 패배다.


원하던 언론사 인턴십을 위해 면접을 보러 가던 날, 순규는 가을 웜톤에 어울리는 컬러의 포멀한 투피스 대신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초록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하찮은 돌에, 그것도 여러 개의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개구리는 부활했다.











주홍 글씨. by 옥광


매거진의 이전글 너는 내 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