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집에 도착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기 직전 딱 생각났다.
‘참치 베이컨 마요 삼각김밥!’
10살 아들이 어젯밤 잠드는 순간까지 노래로 불렀던 이름이다. 내일, 그러니까 오늘 학원에 다녀와서 반드시 먹어야 하니 퇴근길에 꼭 사다 놔 달라고. 오늘 아침에 학교에 가면서도 말했고, 오후에 학원차를 기다린다고 통화를 하면서도 말했다. 꼭 먹고 싶다고. 그러니 집에 들어가 벌러덩 눕고 싶은 마음이 대수냐, 편의점을 향해 발길을 돌릴 수밖에. 매대에는 ‘참치 베이컨 마요 삼각김밥’이 두 개 남아 있었고 내가 다 쓸었다.
워낙 인기가 많은 삼각김밥이라 조금만 늦었으면 한 개도 못 건질 뻔했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현관문 앞으로 돌아오니 아까는 없던 큰 택배상자가 놓여 있었다.
“오! 마이 갓, 갓, 갓!! 오예!!!”
이틀 전, 주문한 LED모니터가 도착해 있었다. 10년째 써오던 32인치 모니터는 하나만 있어도 그래픽 작업을 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으나, 대신 작업을 하며 동시에 넷플, 디플, 티빙에서 각종 영화, 드라마, 예능을 보려니 매우 큰 불편이 있었다. 모니터를 하나 더 갖춰야만 할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게임을 하진 않지만 잠시 고사양 게임 유저로 빙의하여 주사율 144hz에 3000:1의 명암비, 1ms응답속도를 가지고도 40만 원 초반대인 가성비 쩌는 중소 브랜드 제품으로 심사숙고해 고른 모니터가 도착한 것이다. 신났다. 삼각 김밥을 냉장고에 대충 던져 놓고 얼른 모니터 택배박스 앞에 다소곳이 앉아 무릎을 꿇었다.
먼저 택배 박스 안에 있을 제품 상자에 작은 기스 하나 나지 않도록 커터칼을 푹푹 찔러 대지 않고 살짝살짝 칼집을 내어 조심스레 봉인에 사용됐던 테이프를 뜯어냈다. 봉인 해제 후 제품 상자가 찌그러지지 않도록 중간중간 깊은 호흡을 하며 밖으로 꺼냈고, 커터칼로 더 미세한 칼집을 내가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빈틈없이 꽉 들어찬 하얀 스티로폼이 보인다.
이 스티로폼을 2,3cm가량 꺼내 준다. 여기서 손가락 힘조절을 잘해야 한다. 안 그러면 스티로폼 모서리가 부서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후, 상자의 위아래를 거꾸로 뒤집어 아래로 내려온 튀어나온 스티로폼을 발가락으로 단단히 붙잡고 상자를 위로 들어 올린다. 이때도 중요한 건 힘 조절! 비로소 스티로폼 갑옷을 두른 모니터가 제품 상자 밖으로 나왔다.
스티로폼과 제품상자, 택배상자는 줄을 세워 반듯하게 옆으로 밀어 두고 모니터에 전원 케이블과 HDMI케이블을 차근차근 연결했다. 미리 치워 둔 책상 위에 32인치 모니터 두 대를 나란히 두니 불끈불끈 솟아나는 ‘책상을 더 큰 걸로 바꿔야겠구나.’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데스크탑의 전원을 켰다. 두근두근!
“이런, 씨풀!!”
혼잣말로 하는 쌍욕인데도 절었다. 전원이 켜진 모니터를 보고 그만큼 놀랬기 때문이다. 파란색 브랜드명이 보이는 첫 화면부터 말도 안 되는 불량화소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로그인하여 넘어가니 배경 화면으로 설정해 놓은 대보름달엔 여기저기 곰팡이가 펴 있고 자기 맘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일찍이 이런 대보름달은 지난 10년간 어디 가서도 본 적이 없다. 쿵쾅거리며 걸어가 제품상자 안에 고이 넣어둔 예의상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모니터 사용설명서’를 우악스럽게 찾아들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듯 스티로폼을 거칠게 패대기쳤고 깨진 모서리에서 떨어져 나온 스티로폼 가루가 공중에 떠 올랐다. 이 가루들이 땅에 닿을 때 즈음, 가성비 쩔었다고 생각한 중소기업 사무실의 누군가는 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기요. 저는 모니터를 구입한 사람인데요. 액정 불량이 왔거든요! 이거 바로 새 제품으로 맞교환 가능하죠? 빨리 처리해 주시면 내일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오후 5시 40분에 다다른 시각, 안양에 사는 나는 사무실이 어딘지도 모르는 핸드폰 너머 직원에게 당당히 맞교환을 요구했다.
“아, 고객님. 죄송하지만 어느 사이트를 통해서 구입하셨는지 알아야 해서요. 핸드폰 번호 뒷자리를 먼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분노 버튼이 살짝 눌린 내 목소리와 달리 지나치게 상냥한 중소기업 직원의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알려줄 건 알려줘야 했기에 호흡을 가다듬고 나의 정보를 넘기니 한다는 소리가…
“알겠습니다, 고객님. 저희 쪽에서 구입한 제품 맞으시고요. 그런데 저희가 오늘 택배 업무가 끝난 상황이라 당장 회수는 어렵고요. 또 저희가 제품을 받아보고 모니터 상태를 확인해 봐야 하는 절차가 있어서,”
“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는 거예요?”
살짝만 눌려 있던 분노버튼이 꾹 눌렸다.
“오늘 받아서 바로 확인한 제품이 불량이라고요!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줘야 아시겠어요?!!”
“아니, 고객님 그게 아니라 저희는 본사가 중국에 있어서 먼저 불량이 맞는지, 불량이 맞다면 원인지 무엇인지 상태를 확인해서 보고하고 하는, 그런 교환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게 있어서요.”
“와, 본사가 중국에 있던, 한국에 있던, 강원도에 있던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한 번 봐보라고요! 어떻게… 이메일로 사진 보내드리면 되겠어요?!”
본사가 중국에 있는 중소기업 직원은 이메일 대신 어떤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고 나는 여러 장의 스틸컷에 12초짜리 동영상까지 정성스럽게 제작하여 문자를 전송했다. 10년을 사용해도 멀쩡한 기존 모니터와 비교샷까지 만드는 수고도 더했다. 보내고 나니 그 핸드폰 번호가 바로 전화를 해왔다.
“고객님, 제가 방금 보내주신 내용 다 확인했고요. 일단 저희가 그게 HDMI케이블 불량일 수도 있고, 그래픽카드 불량일 수도 있어서요, 고객님. 그래서 일단 저희 쪽에서 받아보고,”
“아니, 뭘 일단 받아보겠다는 거예요? 기가 막히네! 모니터가 불량이잖아요!! 안 보여요? 제가 멀쩡한 거랑 듀얼로 연결한 거까지 찍어서도 보내줬잖아요. 근데 뭐가 더 필요하다고 이러는 거예요?!!”
“아, 그럼 고객님 혹시 기존에 쓰시던 모니터랑 케이블을 바꿔서 연결을 해보시는 방법이 있는데요.”
“뭔 소리예요? 그걸 뭐 하러 바꿔보라는 거예요?!!”
“케이블을 바꿔서 연결해 보면 그게 케이블 불량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기도 해서 그렇거든요.”
“아니! 제가 봤을 땐 케이블 불량이 절대 아니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꾹 참고 케이블을 바꾸어 켜보았다. 그래도 혹시나 했건만… 역시 내 생각이 옳았다. 새로 구입한 모니터의 불량 화소는 기존 모니터의 RGB케이블로 연결해 봐도 똑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블랙 부분은 온통 푸른색 줄무늬가 생겨 있어 옛날 640x480 화질의 주사선 텔레비전 같았다.
“고객님 그게 케이블 불량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픽카드 불량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먼저 저희 쪽에서 제품을 확인해 보고,”
“어머! 정말 자꾸 왜 그러세요? 진짜 어이가 없네! 똑같은 말을 몇 번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아, 고객님 제가 드리는 말씀은 다 이런 사례가 있어서 예로 들어 말씀드리는 거고요. 실제로 지난달에 어떤 고객님이 알고 보니, 그래픽카드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픽카드를 교체하셨던 분도 있어서 그렇거든요.”
“대에박! 이젠 그래픽 카드 핑계예요? 저 컴퓨터 바꾼 지 1년도 안 됐거든요!!! 그리고 막말로 제가 이거 보냈는데 그쪽에서 모니터는 문제없고 제 케이블문제나 그래픽카드 문제라고 하면 저는 그냥 당하는 거잖아요?!! 그쪽이 안 그런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요!”
지금까지 상냥하기만 했던 직원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고객님! 저희가 절대로 그렇게 하지는 않아요! 단지 저희도 확인을 했다는 절차를 남겨 놔야 새 제품을 보내 드릴 수 있어서 그런 거고요. 저희 그런 짓은 절대 안 합니다. 그리고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불량 교환을 안 해드린다는 게 아니라 단지 회수해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싫어요!! 그 확인 제가 다 해줬잖아요!! 지금 이럴 시간에 택배회사에 연락을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에요?!!”
나는 분노버튼도 모자라 발작버튼까지 꾹 꾹 밟았다. 최근에 내가 낸 소리 중 가장 큰 소리를 내서 대화했다.
“이보세요!!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아니, 고객님 흥분을 조금만 가라앉히시고요. 받으신 제품을 보내주시면 확인하고 새 제품 다시 보내는 데는 반나절도 안 걸리니까요.”
“그러니까!!! 그 반나절도 안 걸리는 일을 굳이 해대는 이유가 뭐냐고요?!!”
“그게 아까 말씀드렸는데 중국 본사에 보고를 해야 하는 절차가 있어서 그런 거라,”
“아 진짜! 일 답답하게 하시네!!”
노래방에서 낼 법한 괴성을 지른 순간이었다.
“아, 잠깐만요, 고객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새 제품 보내드릴 때 시력보호를 위한 보호필름을 함께 보내 드리면 어떨까 하는데요?”
“…”
보, 호, 필, 름. 모니터를 구입하면서 마우스로 깔짝거렸던 6만 원 상당의 그것을 말하는 건가. 빛 반사를 막아줘 눈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블로거들의 찬사를 받은 그것?! 순간 내 목소리에 마가 껴버렸다.
“고객님? 고객님?”
지랄발광하던 내가 침묵하자 그는 나를 애타게 찾았다.
“고객님… 저희 보호필름 반응 좋거든요. 그거 같이 보내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신 가요?”
“아니, 그… 저, 저기, 갑자기 보호가 왜… 필름은 무슨 보호 필름이에요? 저 그런 거 잘 못 붙이거든요. 괜히 이물질이나 끼고…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무슨… 저는 보호필름이 반드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냥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니, 제가 본의 아니게 어떤 오해를 드린 것 같아서요. 고객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 저희 모니터가 너무 필요하 신데 바로 사용을 못하게 된 것이 매우 죄송스러워서도 그렇고요. 그리고 붙이는 게 번거로우시다면 고객님 동의하에 저희가 보호필름을 부착해서 보내 드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니, 보호필름 부착 서비스는 저도 사이트에서 봐서 알거든요.”
아차! 이걸 안다고 말하는 게… 뭔가 말린 기분이다.
“제가 무슨 보호필름 때문에 이러는 줄 아세요? 모니터 말하면서 보호필름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건데요?!”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고요. 모니터는 불량 확인만 하고 새 제품 꼭 교환해드릴 거니까요. 저희가 고객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양아치스러운 짓을 하면 이 일은 못하거든요. 저희 올해로 7년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선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
왜인지 또 말문이 막혔다. 사실… 방금 전 마음의 평화가 왔다. 갑자기 택배에 소요될 시간이 계산되었다. 오늘이 목요일, 택배 회수가 토요일에 된다고 하더라도 주말을 껴도 다음 주 화요일 정도엔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된 거다. 갑자기 모든 게 괜찮아졌다. 어? 이러면 내 꼴이 우스워질 거 같은데…
“저… 고객님?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희가 오늘은 택배 업무가 끝나서요. 죄송하지만 내일 택배사에 회수전달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 네…”
“그래서 내일 못한다고 하더라도 고객님 댁에 토요일에도 회수가 가능하니까요. 조금 번거로우시겠지만 보내주시면 저희가 받아보고 빠른 교환 절차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니 뭐… 제가 원래 택배를 받으면 상자며 스티로폼이며 소중하게 다루는 타입이라서요. 다시 포장하는 게 어렵진 않고요…”
“아, 그런 타입이시구나. 다행입니다. 고객님, 그럼 확인하고 나서 가장 빠른 선에서 새 제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내일 택배사 연결되면 기사님 연락처도 문자로 바로 넣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럼, 제가 통화하신 분 한 번 믿어보고 택배 교환을 하긴 하는데요…”
여기서 입에서 맴도는 이 말을 하면 정말 쪽팔릴 것 같다는 촉이 왔는데, 그래서 망설이고…
“제가 또… 그런데 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교환받은 제품이 불량이 나오면 정말 속이 상할 것 같거든요…”
“그럼요, 고객님! 그 점에 관해선 저희도 꼼꼼히 확인을 잘해서 보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망설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답을 받고 싶었다.
“아까 새 제품 모니터 꼼꼼하게 확인해 본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어설픈 자존심에 지금까지 마구 눌러 댄 분노 및 발작버튼이 겨우 보호 필름 하나로 튕겨져 나온 것 같아 제대로 답을 못 들은 게 마음에 걸렸다. 그 보호 필름 말이다. 때문에 머리를 굴린 것이 지나치게 티 나는 질문을 했다.
“그럼, 보호 필름은 제품 확인할 때, 그때 부착하시면 크게 번거로운… 일은… 아니신 게 그렇죠?”
말까지 절어가며 말을 이었다.
“아, 물론이죠. 고객님, 절대 번거롭지 않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걱정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대신 보호필름 부착을 해서 새로 보내 드릴 제품은 한 번 오픈한 흔적이 남아 있을 거거든요. 그 점만 고객님이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그거야 뭐… 그것도 보호필름 사이트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당연한 거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거든요. 어머! 저 그런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혹시 모르니 고객님 지금 가지고 계신 제품 시리얼 넘버를 촬영해 놓으시고 새 제품 받으시면 시리얼 넘버 비교해서 확인해 보셔도 되고요. 새 제품 교환을 약속드렸으니까요.”
“아, 네 그거야 뭐 굳이 그렇게까지…”
어느 순간, 나는 직원분만큼 상냥한 목소리를 냈고 통화 끝에는 저녁식사 맛있게 하시라는 덕담까지 전했다. 35분! 직원분과 함께 한 통화 시간이다. 이 35분 동안 나는 SNS에서 보며 흉봤던 진상고객의 모든 레파토리를 시전 했다. 말을 자르고, 내 맘대로 오해하고, 무조건 내 생각대로 해달라고 윽박지르고… 하… 보호필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급 현타가 왔다.
‘아이고… 내가 얼굴도 모를 직원의 끼니를 걱정할 게 아니었구나,’
허기가 진 나는 뭘 차려 먹을 기운도 없어 마침 사다 둔 ‘참치 베이컨 마요 삼각김밥’을 데워 먹었다. 뎁혀지는 20초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한 개로는 모자라 두 개 째도 급하게 먹고 있는데 어느새 학원을 마친 아들이 들어와 있었다. 아들은 나를 보고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냉장고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엄마인 나를 쳐다보는데… 아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게 보였다.
“참치 베이컨 마요 삼각김밥, 그거… 나 그거 먹을라고 막 뛰어왔는데...”
오! 마이 갓, 갓, 갓!! 내가 허기에 눈이 멀어 깜빡했다. 아들 먹으라고 사놨던 삼각 김밥인데!
“어… 이게 그러니까 엄마가 일부러 먹으려고 한 게 아니고…”
나 때문에 아들이 먹을 삼각 김밥이 없다! ‘참치 베이컨 마요 삼각김밥’을 먹을 생각에 학원차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열심히 뛰어왔을 아들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아들의 서글픔 버튼이 눌렸다. 어릴 때부터 감정 표현이 확실해 눈물도 많았던 아이는 이제 10살이라고 눈물을 참으려 든다. 아이고… 이러니 더 미안하다!
“나는 어제도 못 먹었는데!”
어제도 늦어서 다 팔린 후에 편의점에 갔기 때문에다.
“어제 어제도 못 먹고!”
어제, 어제인 그제도 늦어서 못 먹었다.
“엄마가 진짜 실수로 먹은 거야! 지금 편의점 가볼까? 혹시 알아? 희망을 가져보자!!”
“아니야… 엄마가 또 깜빡했을까 봐 오는 길에 내가 봤거든. 하나도 없었어.”
입꼬리를 실룩여 흐르는 눈물을 참아낸 아들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 잡았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의연하게 넘기지 못하고 감정 본연에 충실한 저 모습. 도대체 누굴 닮은 것인가!
아들은 아무것도 안 먹을 거라며 30분째 ‘늦가을’ 레고 유튜브만 보고 있고, 나는 그런 아들의 눈치만 열심히 보며 아들에게 필요한 ‘보호 필름’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러다 생각난 비장의 카드! 꺼내 볼 가치가 있다! 아들이 ‘참치 베이컨 마요 삼각김밥’ 이전에 꽂혀 있던 메뉴.
“그래!! 오랜만에 간짜장에 군만두 시켜 먹을까?”
순간 아까와 다른 방향으로 실룩이는 아들의 입꼬리를 보았다. 깊게 드리워진 슬픔이 저 말 한마디로 사라졌다!! 통했다!!
“너… 웃는 거야?”
“아니… 엄마가 짜장면 말하니까 갑자기 먹고 싶어 져서 그러는 거잖아.”
아들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콧구멍까지 벌룸거린다. 간짜장 한 마디로 기분이 좋아지다니 지가 생각해도 멋쩍었나 보다. 슬픈 얼굴일 땐 나를 그렇게 외면하더니 웃참하는 얼굴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얼른 단골 중국집에 주문전화를 걸고 나서 생각했다. 아, 이 아이 나를 닮았구나!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엄마가 그냥 간짜장 말고 삼선간짜장으로 시켰어. 사장님이 새우도 많이 넣어 준댔다.”
새우라는 말에 완전히 웃상이 된 아들이 계속 나를 응시한다.
“왜? 뭐 할 말 있어?”
“어…”
“뭔데, 왜?”
뭔가 불안하다. 촉이 왔다. 내가 어떤 창피를 느낄 순간이 올 거라는 촉… 촉 중에 이런 촉이 제일 옳다.
“엄마, 아까 말이야… 내가 삼각김밥 못 먹었다고 너무 그래서 미안해…”
“크으으으~”
“내가 막 눈물 나고 그랬잖아. 그래서 미안해.”
아니, 굳이 사과 같은 거 안 해도 나는 다 이해할 수 있는데! 나를 닮았다고 생각한 아들이 이러면… 나를 닮은 게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아들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주며 핸드폰을 찾아 눈알을 굴렸다. 사실 뭐 굴리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핸드폰은 중국집에 전화하면서 내 손에 이미 들려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 핸드폰의 행방을 모르고 싶은 마음이 일렁이는데…
“엄마, 아까 정말 정말 미안해. 나 이제 괜찮아. 간짜장도 고마워.”
“아니야, 아니야. 아들이 뭐가 미안해. 엄마가 진짜 진짜 미안하지.”
아이고야, 이 아들이 나를 닮으려면 나는 입을 싹 닦으면 안 되는 거구나. 나는 전화를 해야만 하는 거구나.
“… 내 아들아. 엄마가 갑자기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방에 들어가서 전화 한 통을 해야 하거든.”
“응.” 아들이 웃으며 대답했다.
“중국집 아저씨, 기다리고 있어. 올 때까지 엄마가 안 나오면 부르고.” 나도 긴장된 마음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방문을 꼭 닫고 방문과 가장 먼 구석에 쪼그려 앉아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통화한 분께 전화를 걸었다. 중소기업 모니터 회사의 이름 모를 그분이 전화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만큼 제발 안 받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연결음만 계속 들리길래 혹시 퇴근 시간이라 바쁜가 싶어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여보세요.”
그가 전화를 받았다. 헙!
“여보세요? 고객님?”
갑자기 목이 메어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큼! 큼! 저기… 안녕하세요. 저 아까 불량 모니터 문의했던… 그 사람인데요… 저기 퇴근 시간이실 거 같은데 제가 전화를 드려서 괜찮은 건지…”
“아, 네 괜찮습니다. 저희 퇴근 늦습니다. 혹시 어떤 문의사항으로 전화하셨는지요?”
“아니… 뭐가 꼭 궁금해서… 그런 문의 사항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고요… 그… 죄송합니다. 아까 제가 좀, 아니 많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어 가지고. 그래서… 저기 죄송합니다. 애초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니 미안함 버튼이 꾹 눌러져 횡설수설 사과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만큼 상냥한 목소리로 괜찮다며 이해한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심지어 모니터 불량을 상품으로 내보낸 중국 본사 흉도 봐줬다. 더 미안해졌다. 휴…
아마도, 내가 아들을 닮아간다.
너는 내 아들.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