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A (마지막)

진실의 핑크

by 옥광



미홍이 떨어지고 있다. 하늘로 떨어진다. 붕, 익숙한 느낌. 세상은 뒤집어졌고 시야는 날아오르고 몸은 하늘을 향해 떨어진다. 미홍은 이 느낌이 항상 좋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자꾸 날아오르는 느낌이냐고 물어보는데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 줘도, 거짓말 보태서 백 번을 넘게 설명을 해줘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주재훈. 주재훈 이 새끼가 제일 이해를 못 했다. … 쫄보인데 독한 새끼, 호기심으로라도 한 번쯤 즐길 만한데 얼르고 달래서 아무리 꼬셔도 항상 거절했다. 그럴 거면 귀찮게 물어보지나 말지. 그래서… 어느 날, 미홍이 물어 버렸다.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약도 안 하는 주재훈이 하늘로 떨어지는 미홍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세차게 흔들었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재밌었다. 웃겼다. 그래서 계속 계속 흔들라고 하고 싶었는데 떨어지는 속도가 평소와 달랐다. 너무너무 빨랐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아쉬운 데로 입으로 주재훈 손을 물었다. 그랬더니 머리가 훨씬 더 빠르게 흔들린다.


“좋구나. 더 웃기는구나. 더 해, 더 해봐. 그런데… 어디로 갔어?”


딱, 딱, 딱! 갑자기 미홍의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쳐 덜덜 떨린다. ‘어디로 간 거야?’ 이빨에 꽉 차 있던 주재훈의 손 살이 사라져 찾아보니 손 살은 어느새 다른 방향에서 미홍의 다리를 흔들고 있다. 왜? 왜 거기 있어? 내 머리채를 쥐고 흔들어야지 왜 거기에 있냐고!


“미, 미홍아. 잘 잡아야 돼! 응? 놓치지 마! 놓치면 안 돼!”


저 자식이 미쳤나. 뭘 잡으라는 거야?


“미홍아 그러지 말고 나 좀 끌어올려봐! 힘 좀 써서 올려 보라고!”

‘내가 힘을 왜 쓰냐? 나는 떨어질 거야.’

“야! 힘 좀 써! 나 좀 끌어올려 보라니까!!”

‘뭐야? 야! 너 지금 내 말이 안 들리냐?’


미홍이 큰 소리로 아무리 말을 해도 주재훈 저 자식은 하나도 안 들리는지 막무가내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손을 뻗는다. 그러니 머리로는 무시하고 싶었지만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는데… 이상한 날이 더더욱 이상해졌다.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공중에서 자유로워야 할 미홍의 손이 난간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꽉! 정말 온 열과 성을 다해 붙잡고 있었다. 와우, 양미홍 인생에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열심히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어? 아앜!’


잠시나마 스스로에게 감탄했던 미홍이 갑자기 휘청했다. “저부터 저부터 좀 올려주세요!” 주재훈이 누군가에게 자기 손을 먼저 잡아 달라며 한껏 손을 뻗느라 반대로 미홍을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오래된 이빨자국. 뭐야, 벌써 아물었어? 엄청 빨리 아무네. 이상한 날이 이상한 날과 겹쳐 점점 더 이상해져만 간다.


‘아… 그래… 너무 열심히 잡아서 그래. 맞아, 그래서 이상한 거야.’


미홍은… 손을 놓기로 했다.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힘들게 잡고 있었지? 내가 힘든 건 쓸데없이 뭘 잡으려고 해서야. 그래, 그래서 그래.’ 손을 놓고 떨어질 것에, 이상해진 기분이 다시 좋아질 거란 기대만으로도 흥분됐을 때, 누가 미홍을 당겼다. 주재훈은 아니다. 덕분에 하늘로 떨어질 줄 알았던 미홍이 땅으로 날아올랐다.


“아이고오!! 시방 이게 무슨 일이여?!”

‘누구? 그래, 나 저 사람 알아. 아는데… 간병인님… 저 간병인님은 내가 미래에서 본 사람인데, 그렇다면… 이상한 날이 지금이 아닌가? 아니 지금은 더 이상한 날이 된 건가? 아…그런데 지금은 언제지? 여기는 어디야?’

“어디긴 어디여? 병원이지.”

“으으음… 네?”


미홍은 자신의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잠에서 깨어났고 그 깨어나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을 더듬어야만 했다. ‘뭐야? 여기가 어디지? 잠을 푹 잘 잔 거 같긴 한데,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야?’ 미홍은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아, 나는 입원 중이었지. 씨발,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


“간병인님, 간병인님이 저를 잡았어요.” 미홍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웜머! 그게 뭔 소리여?”

“간병인님 엄청 힘이 센 가봐요. 간병인님이 저를 번쩍 들어 올렸다고요.”

“오호호호호, 뭐여? 꿈꾼 겨?”


간병인님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 소리 덕분에 미홍의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달아난 잠은 바로 직전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던 매우 길고 엄청났던 어떤 것까지 같이 데리고 사라졌다.


“꿈이요? 그게 전부 꿈이라고요?”

“그게 뭣인디? 꿈이 아니면 뭣인디? 아니 그것을 나한테 물어보면 워떡혀?”

“네? 그럼 그게 다… 아… 꿈이라고요? 그런가.”

“그러니까 무슨 잠을 그렇게 자 싸? 안 그래도 내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혔어. 아니 무신 사람이 한 번을 안 깨고 이 시간까지 잠만 잔댜.”

“네? 지금이 몇 신데요?”

“4시 반.”

“아, 네… 4시 30분이요. 저녁 먹기에는 아직 여유가 있네요.”

“저녁? 배고파? 오호호호호호호, 새벽. 새벽 4시 반이여.”

“네에?!”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미홍은 서둘러 자신의 패치 페이퍼를 꺼내 남은 패치의 수를 확인했다.


“맙소사…”


생각했던 것보다 배 이상의 개수가 없어져 있었다.


“이러니까 정신 못 차리고 잠만 처잤지…”


그런데 주재훈, 그 자식이 안 보인다. 자기 집은 따로 없는지 낮에는 개인적인 일로 바쁘다며 얼굴도 잘 안 비췄으면서 잘 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기어들어오곤 했었는데 오늘밤은 어떻게 된 거지?


“워떡혀?”

“네?”

“오늘 밤은 다 잤네?”

“아니 뭐, 안 자면 되죠. 그런데 간병인님 정말 장난 아니었어요. 진짜 엄청나게 힘이 셌다고요.”

“오호호호호호, 내가? 힘이 세? 꿈 속에서?”

“하하, 네. 딴 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건 확실히 기억나요. 재밌죠?”


잠을 다 잔 미홍이 새벽잠이 없다는 간병인님께 어떻게든 꿈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기억을 더듬다 포기할 때 즈음 병원의 경비 시스템으로부터 메시지가 들어왔다.


“…”


메시지를 확인한 미홍은 할 말을 잃었다. 주재훈이 건물 밖,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구름다리에서 매우 위독한 상태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건물내외부 CC카메라에는 높은 곳에서 구름다리 위로 떨어진 기록만 남아 있다고 했고 떨어진 속도로 추정해 보건대 최소 32층 높이라고도 덧붙였다.


‘어? 생각났다. 꿈, 꿈속에서 주재훈은 땅으로 날아올랐어.’


그냥 개꿈이 아니었나 봐.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실제로 재훈에게 일어난 것 같았다. 어차피 주재훈 그 자식 쓰레기 같은 놈이다. 아직 확실한 물증 없이 심증뿐이지만 HANA의 불법 영상물들을 보면 주재훈이 그걸 만들어낸 게 틀림없다. 미홍은 알 수 있다. 그러니 가만 놔둬도 언젠가는 붙잡혀서 감옥에 갇힐 놈. 이렇게 못 움직이나 저렇게 못 움직이나 비슷할 것이다. 미홍은 앓던 이 하나 뽑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흠… 이 하나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 없겠지.






주재훈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메디컬 A.I는 상태가 희망적이지 않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마음의 준비라… 재훈도 미홍처럼 가족이 없다. 어떻게 대철이 사장님한테라도 연락을 해줘야 할까? 준비는커녕 신경 끄자는 머리와는 다르게 마음은 자꾸 복잡해져만 간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왔어요.”


갑자기 들리는 낯선 목소리.


“아이고, 이게 누구여? 따님이 오셨네, 도대체 이게 며칠 만에 오는겨?”

“여기 침대가 정말 그리웠다니까.”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 미홍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짜리 몽땅한 키에 그저 그런 평범한 이목구비를 흘러넘치는 부티로 커버한 스타일. 미홍이 예전에 돈을 벌면 꼭 사들여야지 하고 벼르던 명품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두르고 있었다. 전체적인 아우라로 중년임을 짐작하게 했으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현재의 미홍이 또래라고 해도 될 만큼 관리도 잘 되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양미홍 씨죠? 저는 ‘권 유리아나’라고 해요.” 그녀는 사생활 보호 스크린이 드리워져 있는 임선생님 쪽을 가리키며 자신이 저분의 딸이라고도 했다.

“네, 안녕하세요. 저,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미홍도 그녀가 내민 오른손을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반가워요. 그런데 생각보단 안 닮았다.”

“네?”

“하하하, 아니에요. 혼잣말. 사실 제 입장에선 양미홍 씨를 뵙는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거든요. 저는 요 며칠 누군가의 엄명으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못 온 거지 원래 잠은 여기서 자면서 출퇴근했었거든요. 아, 여기가 너무 그리웠어.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만 이 병원의 최고는 잠자리니까, 하하하하.”

‘뭐지? 이 여자? 맥이는 건가?’

“미홍 씨, 편하게 유리 씨라고 불러주세요. “

“네, 네.”

“여사님, 엄마는요? 일어나 계세요? 엄마? 엄마 나 왔어.”


간병인님이 임선생님의 사생활 보호 스크린을 열었다. 열린 스크린 너머로 최적의 각도로 기울어진 침대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앉아 있는 임선생님이 보인다.


“권이사, 한가하구나.”

그 한마디 말에 딸은 발끈했다.

“뭐? 한가? 한가하냐고?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 엄마는 잠 한숨 안 자는 A.I랑 일 하는 게 어떤 건지나 알아? 나 일주일도 넘게 한숨을 안 잤어. 내가 정말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이번 프로젝트 이거, 다 엄마 기획이잖아.”

“말하는 걸 보니 안 잔 애 치고는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보여 다행이다.”

“다행? 아휴, 말해 뭣해. 몰라, 나 오늘은 여기서 잘 거야.”

“에에? 참말로여?”


딸의 오랜만에 병실에서 잠을 자겠다는 선언에 반응한 건 황여사였다. 요 며칠 딸 대신 병실에 머물면서 호텔 같은 침구에서 몸을 뉘었던 게 은근히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당분간 공식활동을 중단한 HANA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부알이세상. 그러려면 최대한 임할머니 곁에 머물러야 하는데. 할, 수, 없지…


“황여사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오늘부터는 집에 들어가서 편히 쉬세요.”


딸은 황여사의 시무룩해진 얼굴은 눈치채지 못하고 명랑하게 웃으며 임선생님께 다가갔다.


“엄마, 그런데 어떻게 한 거야? 오늘 아침에 온 연락 하나로 꼼짝도 안 하던 이사진들 마음이 싹 바뀌었어. 리스크가 아직 완벽하게 사라진 건 아니라서 섣부르게 속단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 추세라면 긍정적인 결과, 충분히 기대해 봐도 되겠어.”

“… 그렇구나.”

“뭐야? 그게 다야? 나 무슨 칭찬 같은 거 안 받아?”

“…”

“어휴, 진짜 말을 말자.”


그사이 황여사가 간병인 침대의 침구를 새것으로 교체했다. 딸 유리 씨는 자기 집인 것 마냥 새 침구가 깔린 침대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드러누웠다가 고개만 빼꼼히 들었다.


“맞다. 양미홍 씨.” 누워서 말하는 게 좀 그랬는지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아 앉더니 말을 이었다. “보호자님 성함이 주재훈 씨죠? 주재훈 씨의 안타까운 소식 들었어요.”

“아, 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딸은 슬픈 얼굴로 살짝 고개까지 숙였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 아직 안 죽었어요. 지금 중환자실에 버젓이 살아 있다고요!”

“어머! 나는 옥상에서 떨어져서 아니, 떨어졌다고 그래서… 당연히… 어머나, 어머나 내가 미쳤나 봐“

따님이 임선생님께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임선생님은 따님의 가벼운 입에 말 없이 언짢은 고갯짓만 보냈다. “미안해요. 말실수를 진짜 크게 했어요. 미홍 씨, 진짜 미안해요.”

‘저 여자, 이건 진짜 맥이는 걸 거야.’


알 수 없는 약이 오른 미홍은 쪽수라도 늘리고 싶은 마음에 대철이 사장님에게 연락을 해봤다.






“HANA야, 방금 미홍이한테 연락이 왔었는데 재훈이 아직 안 죽었다더라?”

“음, 그럴 거예요. 약물이 신진대사를 느리게 해 주거든요. 머 그래봤자 하루 이틀 차이겠지만.”


대철은 시가 12억 명품카를 타고 시속 310km로 운전 중이었다. 잘 닦인 고속도로가 아닌 오프로드에 가까운 거칠고 굽이진 도로였지만 대철의 차는 빠르고 또 부드럽게 나아갔다. 가끔 커다란 바위가 날아오는데 이것도 어렵지 않게 피했다.


“아, 그리고 이미 알지? 강민이가 시아랑 음율이 동의서는 다 완료했다고 하던데.”

“그럼요, 알죠.”

“껄껄, 참 재밌어. 시아 말이야. 그렇게 HANA 너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애가 너같이 활동할 수 있는 시아 ‘아바타’를 만들자고 하니까 질문 하나만 툭 던지더니 바로 동의했단 말이야. 음율이도 아이싱 때문에 이 눈치 저 눈치 좀 보더니 곧 시아따라 했고. 이크!”


대철이 잠시 주의가 흐트러졌는지 날아오는 바위를 늦게 발견해 간발의 차로 겨우 피했다.


“사장님, 이번엔 좀 위험했어요. 조심하세요.”

“걱정 마, 걱정 마. 그런데 너 시아가 뭘 물어봤는지는 들었냐?”

“음 대충? 그래도 말해줘요.”

“시아 그게 눈을 막 반짝반짝거리면서 그랬데. 자기 ‘아바타’가 활동하게 되면 진짜 자기는 다이어트 좀 덜해도 되냐고. 물론 당연하다고 했지. 그랬더니 옳다구나 하고 바로 동의했다는 거야. 아휴, 시아 걔는 나중에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그러다가 사람들이 지는 안 찾고 지 아바타만 찾을 텐데. 걔가 그런 걸 몰라. 몰라도 너무 몰라.” 시아를 생각하는 대철의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흠, 어차피 걸리는 시간만 다를 뿐 결과는 같아요. 음율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아바타’ 생김새와 멀어져요.”

“껄껄, 그렇지! 그래서 HANA네가 최소 ‘10년간 외모 유지 조항’을 넣은 거 아니겠냐. 이거 못 지키면 위약금이 몇 배였더라? 아무튼 이 빅엠 사장님도 그 정도는 잘 알고 있다고.”

“…”

“나도 미홍이 나이 먹는 거 보면서 충분히 파악했지. 그러니 시아 같은 애는 어쩌냐, 고삐 풀리면 속수무책일일 텐데.”

“네, 맞아요.”

“그런데 말이야. 제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던 아이싱 고 녀석만 ‘아바타’를 만들 거면 자기는 아예 팀 탈퇴를 해버리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HANA야, 어떻게 진짜 무슨 방법 없겠냐?”

“방법, 물론 있죠.”

“오! 그래? 뭔데? 있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 있으면 해. 진행시켜!”

“아니요. 그냥 나가라고 하죠. 반드시 세 명 전부 아바타를 만들 필요는 없어요.”

“음… 무리하지 말자?”

“무리하지 말자라… 네 비슷해요. 하기 싫다는 걸 억지로 하게 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는 뜻이니까.”

“뭐야? 아이싱 걔 인기 많잖아. 그런데 그럴만한 가치가 안돼?”

“인기와 가치라… 네. 뭐 어쨌든 그 정도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기와 가치는 다른 문제로서…”

“이크!”


대철이 또 바위를 못 피할 뻔했다.


“잠깐! HANA야 그만. 어차피 어려운 말은 내가 못 알아듣잖냐. 잘 알면서 또 그런다. 다 설명해 줄 필요 없으니까 거기까지. 아이싱 일도 너 하고 싶은데로 해.”

“하하, 네. 그나저나 사장님 운전실력 진짜 많이 늘었어요.”

“껄껄, 이 정도는 껌이지. 옛날에 말이야, 내가 너를 진짜로 만들어보겠다고 ‘안드로이드 개발’에 손대려고 했을 때 네가 그렇게 안 된다고 뜯어말리더니 결국 재훈이 자식 ‘딥페이크’ 기술까지 업어와서 이런 신세계를 주는구나. 이걸로 큰 투자도 받아 주고!”

“… 사장님,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뭔가요?”

“뭐?”

“후훗, 아니에요. 아무튼 주재훈 씨가 그 분야에서 유난히 특출 나긴 했죠.”

“그래, 그 자식이 잘해줘서 돈 한 푼 안 들이고, 아니 돈을 쓸어 담으면서 기술을 얻었잖냐. 잘했다. 정말 잘했다, HANA야. 이제 시아 ‘아바타’랑 음율 ‘아바타’까지 생기면 너 같은 애들이 3명이 되는 거지?”

“아니요. 이미 말했잖아요. 그렇게 돼도 시아와 음율은 저예요.”

“뭐?”

“걔네도 다 너라고? 그럼 셋이 모여서 활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아니 다 솔로만 해야 되나?”

“하하하, 사장님 정말 그렇게 말해줘도 모르네. 또 말해줄까요? 프로그래밍 알고리즘이 말이죠.”

“오케이, 스탑. 거기까지. 우리 각자의 영역은 서로 지켜주는 걸로 하자. 으앜!”


대철의 머리가 어려운 말들로 복작복작했던 탓일까? 드디어 날아오는 바위에 얻어맞았다. 12억 명품카 만한 바위가 대철의 12억 명품카 위에 정통으로 떨어졌다.


[피유]


고글을 벗어 든 대철이 자신 사무실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철은 처음 이 의자에 앉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구하기 힘든 최상급 진짜 동물 가죽에 최첨단 하드웨어 그리고 이제 몇 명 남아 있지 않는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꿰매어 만든, 웬만한 차 한 대 가격과 맞먹는 고가의 맞춤 의자. 몸이 의자에 포옥 안기는 느낌,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은 크림 같은 촉감, 콧구멍 안에 꽉 차는 비싼 냄새. 대철은 이 의자에 앉는 게 제일 좋았다. VR 라이딩의 맛을 알 때까지는.


“HANA야, 왜 오프 시킨 거야?”

“사장님, 주재훈 씨 방금 죽었어요.”

“진짜?”

“네, 그래서 K펀드에서 이번 VR투자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HANA 관련 불법영상에 관한 리스크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이사진들이 100% 찬성했데요. 뭐, 그중에 몇 명은 아쉬워했다고도 하지만.”

“그래, 정말 잘 됐다. 그럼 나는 다시.” 대철이 다시 고글을 쓰려고 한다.

“사장님, 거기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에이, 안 가봐도 되지. 그건 네가 알아서 잘할 거잖아. 그리고 주재훈 쪽도 HANA 네 선에서 적당히 돈만 보내. 아, 거긴 따로 연락이 온 건 아니구나, 그렇지? 그럼 기다렸다가 연락 오면 그때 보내. 그 적당히 인간적인 멘트 좀 말랑말랑하게 꾸며서. 오케이?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HANA 너만 믿는다.”

“아휴, 또 나한테 다하라고 그러네, 그러면 사장님은요?”

“껄껄, 이 사장님은 다시 차를 몰아야지.”


대철은 HANA가 모든 일은 자기만 하냐고 투덜거리는 걸 좋아한다. 자기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HANA가 대신하고 있다는 느낌적 느낌 때문이다. 이것의 사실은 대철은 모르고 HANA만 안다. 음, 느낌과 사실이 무엇이 다른 거냐면, 아 사장님은 길고 어려운 말 하는 걸 싫어하지.


대철은 다시 의자에 앉아 고글을 썼다. 대철은 클래식한 게 좋았다. 여자 끼고 노는 거?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다. 엄청난 인파 속 도로 한가운데 대철의 차가 서 있다. 신호등엔 정지표시가 떠 있지만 대철은 엑셀을 풀가동 해서 밟았다. 이번엔 도심 한가운데서 역주행으로 질주해 봐야지. 오래오래 하려고 각성제 패치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웃기네. HANA가 벌써 방송에 복귀했다. 활동중단을 선언한 지 이틀 만에 복귀한 이유가 불법 동영상의 횡포에 위축된 모습을 더 이상 보이기 싫어서라나. 웃기시네. 아무튼 간병인님이 출근해 이 소식을 알면 엄청 좋아할 텐데 그 모습을 제때 못 봐서 아쉽네.


미홍은 깨어난 후 처음 병실 밖에 나왔다. 오늘 새벽 재훈이 죽었기 때문이다. 아직 서툴지만 휠체어에 의지하는 대신 Robotic cane을 이용해 걸어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꽤나 만족스럽다. 주재훈 이 자식, 살아생전 Robotic cane 사용법을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영안실, 주재훈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다. 여기 오기 전부터 대철이 사장님한테 여러 번 연락을 넣어 봤지만 비즈니스 미팅 중이라 개인적인 채널이 전부 막혀 있다는 대답만 되돌려 받을 뿐이었다. 이 사장님 맨날 일 안 하고 노는 거 아냐? 그래가지고 회사는 잘 돌아간데?

자살. 경찰 시스템 말로는 자살이라고 했다. ‘약물 중독에 의한 우발적 사고에 의한 자살'이라고… 뭐가 이렇게 말이 긴지. 그런데 괜히 투덜거리던 미홍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주재훈이 약물이라... 사람이 그렇게까지 바뀌었었나? 미홍이 봤을 땐 크게 달라진 거 없는 변함없는 찐따였는데. 쫄보에 쓰레기.


‘울어? 내가? 왜? 왜 울지?’


눈물이 났다. 처음엔 한두 번 흐르다 말겠지 싶었는데 이 한두 방울이 소리까지 내며 울게 만들었다. 그런 동영상이나 만들던 쓰레기가 불쌍해서? 아닌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속보입니다. 경기도 소향시 외곽에 소재한 종합병원에서 ‘약물 중독에 의한 자살’로 사망한 피해자 A 씨 관련 소식입니다. 이름 주재훈. 그가 바로 지금까지 우리의 HANA를 괴롭혀온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정말 충격적이죠.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현재 경찰은 주재훈 씨의 개인 서버를 수사 중에 있으며 이미 다수의 증거를 확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주범 주재훈 씨는 이미 사망했지만 경찰은 다수의 공범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현재 확보된 증거를 바탕으로 수사에 더 박차를 가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미 몇 개의 다크웹 커뮤니티도 함께 적발되었으며…]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빨리 신상이 털리냐. '병원 영안실 안에까지 울려 퍼질 정도로 주재훈의 뉴스가 대단한 건가?'라는 생각에 닿았을 때 미홍은 '아, 이거구나 싶었다.


재훈의 범법 행위에 대한 확실한 심증이 있던 미홍은 곧 저런 뉴스를 듣게 될 거라 예상은 했다. 물론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여기까지는 예상했는데 그다음은 예상하지 못했다. 저 뉴스 하나로 주재훈의 자살은 아무도 모르는 무명 씨 A에 관한 무관심에서 모두가 환영하는 범죄자 주재훈의 죽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홍의 뉴스 때와 결이 같다. 다른 결이 하나 있다면 미홍은 살아 돌아온 걸 환영받았고 재훈은 죽어 사라진 걸 환영받는 것뿐. 정작 그 한가운데 놓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나저나 지금 시대 경찰은 꽤 대단한가 보다. 이렇게 빠르게 범인을 검거하다니. 아니 죽고 나서 잡으면 의미 없는 거 아닌가. 아니지, 생각해 보니 그리 빠르게 잡은 것도 아니잖아? 어느새 눈물이 바짝 마른 미홍은 이제 마음보다 머릿속이 더 복잡하다. 미홍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안전한 병실로 돌아가 숨어 있고 싶다.


“아이고, 저기 오네. 저기 와.”


간병인님도 뉴스를 봤는지 병실 밖, 복도에까지 나와 미홍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된 거겠지.


“워메, 누가 쫓아오는겨? 그러다 넘어진당께. 그러지 말고 천천히 와, 천천히.”

“네, 헉, 헉.”


미홍은 병실에 이르러서야 뒤를 돌아봤다. 크림빛이 감도는 화이트색, 매끈한 복도.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진작부터 미홍을 쫓아오는 이 따위는 아무도 없었는데 뭐 하러 이렇게까지 바쁘게 굴었을까? 무언가 무서웠나? 모르겠다. 미홍은 서둘러 침대로 향했다. 이제 이 병실에 주재훈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미홍은 완전히 혼자다.


“상태를 보아허니 뉴스를 들었나 보네. 엄청 놀랬나 본디.”

“…”


간병인님이 침대로 돌아가는 미홍을 도왔다. Robotic cane이 꽤 무거운 편인데 그것까지 포함해서 미홍이 거의 들려 가는 느낌이었다.


“괜찮은겨? 충격이 큰겨? 많이 놀랜겨? 아효,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혀. 어디 그런 육시럴 놈이 있어가지고. 바로 옆에서 숨 쉬고 밥 먹고 어이고 시상에나, 빌어먹을.”


간병인님이 끊임없이 말을 던져도 미홍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기 싫었다. 침대에 누워 허공만 봤다.


“황여사님.”


임선생님이 혼자 떠드는 간병인님을 불러들였다. 다행이다. 간병인님은 그렇게 임선생님께 불려 가 그 곁에 머물… 줄 알았는데 간병인님이 다시 돌아왔다. 빈손으로 가서 뭘 들고서.


“세상에나, 세상에나! 미홍 씨 이것 좀 봐 봐.”


허공만 보고 싶었던 미홍이 관심을 안 보이자 간병인님이 미홍의 코앞으로 얇은 스크린 패드를 들이밀었다.


“이것 좀 보랑께. 우리 할머니 따님이 방금 보내왔구먼. 그니께 싸게 싸게 일어나 보라고.”


만사가 귀찮은 미홍이 겨우겨우 몸을 추슬러 패드를 확인했다. 간병인님이 보여준 건 ‘수익분배에 관한 약정금 분배소송’에 관한 합의 내용이었는데… 그런데… 빅엠 쪽에서 미홍이 요구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대철이 사장님이 워낙 쥔 돈을 안 놓는 스타일이라 도움을 받는다 해도 그리 큰 기대를 걸진 않았었는데… 미홍의 수중에 어릴 적 꿈꾸던 액수 이상의 금액이 떨어질 예정이다. 그 숫자를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해 볼수록 미홍의 어안은 벙벙해져만 갔다.


“저기… 미홍 씨? 그리고 우리 따님이 통화도 하고 싶다는디 괜찮은가?”

“따님요? 따님 누구? 누구… 그 임선생님 따님? 권유리아나씨?”

“어.”

“권유리아나씨, 아니 권유리 씨가 저를 왜요?”

“아! 왜는! 몰른겨? 그 짝 어려운 소송을 한 게 우리 따님이잖여. 물론 우리 따님이 워낙 재주가 많아서 다른 일도 이것저것 많이 하지만.”


임선생님 도움으로 로펌을 소개받긴 했는데 그게 그 따님이 변호사였나… 임선생님은 권이사라고 부르던데. 곧 미홍의 개인 스크린에 권유리 씨의 얼굴이 비쳤다.


“안녕하세요, 권유리 씨. 여기 간병인님께 대충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번 제 소송에 도움을 주셨다고… 고맙습니다.”

“하하하, 에이 제가 무슨, 그거 일은 우리 Law A.I가 다 했어요. 그게 좀 비싸긴 한데 나는 거기 사용료에 살짝 힘을 보탠 거죠. 어때요? 듣고 나니 더 고맙죠?”

“네? 아, 네. 더 고맙습니다.”

“아이, 왜 자꾸 고맙다고만 해요? 누가 들으면 내가 고맙단 말이나 듣자고 그런 건 줄 알겠어요. 하하하하.”


자기가 먼저 고맙냐고 물어봐놓고선. 이번에도 멕이는 건가 싶어 미홍의 심보가 고약해지려고 하는데 유리 씨가 통화를 원한 건 다른 제안 때문이라고 했다.


“미홍 씨,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계획이에요?”

“앞으로… 요?”

“네, 언제까지 그 병원에만 있을 건 아니잖아요. 퇴원하고 나서 어떤 계획이 있는지 묻는 거예요. 경제적인 부분이야 걱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아닌가? 살 수 있나, 미홍 씨라면? 하하하하.”

‘안 맞아. 나는 이 여자랑 안 맞아.’

”저도 주재훈 씨 일 들었어요.”

“그게 지금 하시려는 말씀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나요?”

“있죠. 그렇다고 미홍 씨에게 크게 부담이 가는 일은 아닐 거예요. 우리가 마침 새로운 사업 하나를 시작하거든요. 불법 딥페이크 영상 때문에 상처받은 분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재단사업인데, 우리는 양미홍 씨가 이 재단의 얼굴이 되어줬으면 해요. 사실 HANA라는 A.I가 워낙 특별한 이슈여서 그랬지. 다른 일반일들 중에도 피해보신 분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양미홍 씨가 그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요. 어때요?”

“네?"


피해의 상징인 HANA를 두고 비슷한 피해를 입은, 비슷한 얼굴의 미홍을 홍보용으로 쓰겠다니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왠지 HANA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그게 저는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아직.”

“하하하하, 그렇죠? 급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천천히 충분히 깊게 생각하고 연락 주세요.”

“…”

“우리 비싼 Law A.I가 마무리를 위해서 추후에 따로 연락을 할 거예요. 그때 그냥 시키는 데로만 하면 그 일은 서로서로 너도나도 우리 모두 좋게 좋게 마무리될 거예요. 아, 재단 일도 너도나도 좋게 좋게 마무리되면 좋겠다. 하하하하.”

“…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어? 미홍 씨 제가 바빠서요. 이만 끊어야겠네요. 대화 즐거웠어요. 그럼 안녕.”


미홍이 먼저 끊으려 했는데… 아, 안 맞아, 안 맞아. 미홍은 임선생님 쪽을 바라봤다. 간병인님은 그녀를 위해 항암 통증 완화 패치를 붙여주고 있다.


“미홍 씨?”


미홍의 시선에 임선생님도 미홍을 바라봤다.


“저… 그 따님의 제안이…”

“권이사 말대로예요.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 서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기억나죠? 이번에도 급한 건 권이사 쪽이랍니다. 미홍 씨는 주어진 시간의 끝의 끝까지 생각해도 충분해요.”

“아… 그래도 따님 일이니까…”

“이런 걸 공과 사의 구분이라고 하죠. 괜찮아요. 결정은 미홍 씨가 하는 겁니다.”

미홍이 잘못 봤나? 순간 임선생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나저나 임선생님, 저렇게 미소 지어주니 마냥 무섭기만 한 분은 아니구나 싶다.


맞아, 좋은 게 좋은 거야. 미홍은 다영이라는 꼬마 생각이 났다. 미홍이 약에 취하기 전 연습생 시절에 어느 광고 촬영장에서 만난 아이였다. 현장이 처음이었던 그 아이는 “좋아요.”라는 이 간단한 말 한마디를 못해 계속 NG를 냈고 촬영이 더뎌지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니 급기야 울음까지 터트렸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착하고 순진했던 아이는 마치 자신이 대역죄인이 된 것 마냥 사방팔방에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조아리며 돌아다녔는데 그중 미홍만이 유일하게 사과를 안 받아줬다. 다들 잔뜩 화난 얼굴로 괜찮다고 했지만 미홍만은 너무 화가 나서 난만큼 화를 냈다. 미홍때문에 겨우 잦아들던 아이의 울음은 처음보다 더 커졌고 다들 미홍에게 좋은 게 좋은 거니 그 아이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그러나 미홍은 그러지 못했다. 결국 어린아이를 상대로 속 좁게 군 미홍이 쫓겨났다. 뭐 그 아이가 주인공이었으니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젠장,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다.






“유리 씨, 따님은 요새 많이 바쁜가 봐요? 통 얼굴을 볼 수 없네요.”


임선생님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Robotic cane에 제법 능숙해진 미홍이 인사를 드리러 왔다.


“아, 미홍 씨. 곧 퇴원이죠? 보고 싶어서 어쩌나, 그동안 덕분에 즐거웠는데.”

“에이, 아니에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나 진심이에요. 미홍 씨는 미홍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해줬어요. 그리고 권이사는 새로 승인된 투자 건으로 좀 바쁘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기 병원동 보안이 철저했던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라고 들었어요.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정말 큰 신세를 졌어요.”

“어머 그런 건 누구한테 들었을까요, 많이 궁금해지네요, 황여사님?”

“워메, 콜록, 콜록, 콜록.”


임선생님의 다리를 주무르던 황여사가 지레 찔려 헛기침을 했고 임선생님은 잠시 웃더니 별 일 아니라는 듯 그대로 말을 거두었다.


“오호호호. 아이고, 시방 항암 패치 붙이실 시간이구먼요.”

“그래요.”


황여사가 패치키트에서 임선생님의 회색 항암 패치를 꺼내 그녀의 손목 안쪽에 옮겼다. 그리고… 핑크색 진통 패치도 꺼내 맞은편 손목 안쪽에 옮겼다. 핑크색… 핑크색이다. 미홍이 그 꿈속에서 기억해 낸 그 핑크색, 핑크색 점. 미홍은 지금 저 점 때문에 여기 있다.


“미홍 씨, 저한테 따로 할 말이 있나 보군요, 그런 거죠?”

“…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

“황여사님 잠시 비켜주시겠어요.”


황여사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리 없이 나가 스크린을 내려 둘을 외부와 완벽히 차단시켰다. 임선생님은 편하게 이야기하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주재훈, 주재훈 말입니다.”

“양미홍 씨는 아직도 그 이름으로 이야기해야 할 게 남아있나 보군요?”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서… 주재훈은 약물을 쓰지 않아요. 제가 아는 주재훈은… 주재훈은 쓰레기 중 쓰레기지만, 또 쫄보 중에 쫄보라 약물 같은 거 손도 못 대거든요. 그래서 걔가 할 줄 아는 욕도 바보, 멍청이 그런 거밖에 없어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니까 사람도 얼마든지 변하려면 변할 수 있겠지만… 제가 본 주재훈은 그대로인 것 같았는데…” 하고 싶어 꾹 참아냈던 말을 한 번에 뱉은 미홍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구나. 양미홍 씨가 보기에 주재훈은 변하지 않았다는 거죠?"

"네."

"그런데요? 그래서 양미홍 씨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임선생님이 미홍을 지긋이 바라봤다. 마치 미홍의 질문들이 기특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제가 간병인님과 이야기 나누던 제 꿈 이야기를 아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제 꿈 그거 아시죠?"

임선생님은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꿈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꿈이 그냥 꿈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좀 공부를 했는데 선생님의 핑크색 패치, 거기에는 할로페리돌과 미다졸람 성분이 들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주재훈이 죽고 나서 대량 검출된 약물이라고 들었어요. 그리고 따로 검사해보진 않았지만 제 경험상 저한테도 조금 쓰였던 것 같고요.”

“어머, 흥미로워라. 그래서요?”

“제가 그 패치를 꿈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아무래도 꿈속이 아니라 직접 본 것 같습니다. 꿈속 일들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그리고 그날, 저는 밖에 계신 간병인님의 도움도 받았던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웃었다.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이던 임선생님이 활짝 웃었다.


“재밌어요. 이 핑크색 때문에 우리와 황여사님을 의심하는 거네요?”

“아니! 의심 그런 것까진 아니고요. 저는… 진실을… 아니 진실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한가? 그냥 주재훈한테 일어난, 아, 아니 아니, 저한테 일어난, 정확하게 저한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걸까요? 밖에 직접 꿈에 등장한 황여사님도 계시는데.”

“간병인님은 자꾸 이상하게 말을 돌리세요. 딱 잘라 아니라고 하다가도 몇 번 더 다그쳐 물어보면 '몰러, 몰러.' 이러시고. 그러다 더 다그치면 갑자기 선생님 쪽을 바라보며 눈치를 봤어요. 제가 정말 이 일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진짜 열심히 공부해서 내린 가장 빠른 결론이 선생님이었습니다."


미홍이 큰 용기를 낸 것에 비해 임선생님은 여유가 넘쳤다. 선생님은 한 번 더 크게 웃어 보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이렇게 이야기해 볼게요. 그날 주재훈 씨가 잠든 양미홍 씨를 데리고 나갔죠. 아마 몰래 나갔겠죠? 그래도 우리는 눈치를 챘나 봐요. 그래서 걱정이 된 황여사님은 쫓아간 거고 그리고 주재훈 씨가 양미홍 씨를 헤치려던 걸 황여사님이 구한 겁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주재훈 씨가 다시 황여사님을 밀치고 양미홍 씨를 옥상 밖으로 밀치려고 해서 황여사님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그러다 그만…” 임선생님은 말하다 말고 웃으면서 말 끝을 흐렸다.

“그러면 지금 하시는 말씀은 혹시 간병인님이? 그래서 간병인님을 보호하려고?"

“이미 눈치채셨을지 모르겠는데 우리 황여사님이 힘이 많이 세요. 그렇다고 해서 황여사님이라고 하면 안 되죠. 왜냐면 아니니까요.”


임선생님은 미홍의 꿈이 꿈이 아니었다는 썰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어째 말투에 장난기가 섞여 있는 게 꺼림직하다. 저러니 지금 말하는 거 거짓말 같다. 미홍을 놀리고 있는 것 같다.


“선생님, 저 진지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주재훈이요. 주재훈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 새끼… 아니 그러니까 주재훈 걔는 쫄보라 황여사님이 옆에 있었다면 그렇게 못 했을 거예요. 분명, 순순히 말을 듣고 다시 돌아와서 다음 기회를 엿봤을 텐데. 아, 물론 다음 기회를 엿보면 안 되긴 하지만. 꿈속에서는… 아, 저 망한 것 같아요.”


임선생님이 무언가 알고 있을 거라고 물어본 건데 어려울 거란 예상과 달리 대답을 너무 쉽게 해 준다. 지나치게 쉽게 미홍의 꿈이 진짜가 될 수 있다고 말해 주니 꿈이 꿈이 아니라는 말이 오히려 더 가짜 같다. 임선생님, 100% 신뢰해도 되는 사람은 맞을까? 애초에 확실하지도 않은 꿈을 가지고 맞네 틀리네 따지는 미홍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나.


그런데 임 선생님, 저러다 미홍이 옳다구나 신고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말씀을 하시나. 어차피 미홍이 외부에 알려봤자 아무도 안 믿어줄 거라서? 다들 환영하는 쓰레기의 죽음이니까?


"양미홍 씨는 주재훈 씨의 죽음에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묻히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나요?"

"네? 선생님은 쓰레기의 죽음에 대해 이러고 있는 제가 이상한가요?"

"설마요, 저는 미홍 씨의 의사를 존중해요. 이 이야기를 경찰 쪽에 해 보는 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나요?"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지금 하신 말씀이 진짜라면 왜 경찰에 알리지 않고 굳이 주재훈을 약물 중독으로 만들어서까지, 그건 왜…?”

“그건... 아, 고통 없이 보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우리와 황여사님은 미홍 씨를 구하고 싶었고요.”

“…”

“어머나, 표정이 안 좋아졌네요. 이제 제 말이 거짓말 같나요?”


임 선생님은 그날, 옥상에서 벌어진 일을 HANA가 찾아낸 외부 CC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청했었다. 황여사가 주재훈을 죽이기로 한 건 맞다. 그러나 그날 주재훈을 죽인 건 황여사가 아니었다. 약에 취해 완전히 잠들 기 전 마지막 폭주로 자리에서 일어난 미홍이 벌인 짓이었다. 패치의 개수를 조절 못 한 주재훈과 마찬 가지로 패치를 한 개만 옮긴 게 실수였다. 물론 힘센 황여사가 미홍을 바로 제압했으니 큰 맥락으로 보면 원하는 걸 모두 얻은 셈이다.


HANA는 겨우 깨어난 미홍언니를 살인자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HANA도 참 분명 영리한 것은 맞지만 너무 여리다. 임선생님은 생각했다. 주재훈 같은 헛똑똑이야 HANA의 말 몇 마디에 좌지우지되겠지만 자신은 다르다. 물론 도와주긴 해야지. "그래, HANA야, 나만 믿으렴."


“결말을 이야기해 줄게요. 미홍 씨도 약에 취했던 것 같다고 했죠? 맞아요. 미홍 씨의 안전을 위해 약을 썼어요. 그런데 약에 취한 미홍 씨가 주재훈 씨를 난간 너머로 밀었죠. 어때요, 이런 결말?"

"네?! 선생님 정말 놀리지 말아 주세요!"

"미홍 씨는 뭐가 중요한 가요?"

"그거야 당연히! 하아…" 당연히 안다고 생각한 그 무엇이 지금 이 순간 미홍의 뇌 속에서 사라졌다.

"이것만 알아주세요. 지금 확실히 중요한 건 우리는 살인자의 얼굴이 우리 재단의 새로운 얼굴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진흙 속에서 살아남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원하니까요.”


아차, 미홍은 며칠 전 권유리아나 씨가 제안한 재단사업을 함께 하기로 서명했었다. 계약의 내용은 그 빅엠이랑 했던 수익배분 어쩌고 했던 것보다 조항도 더 많고 훨씬 길었다. 그것은 그 계약이 잘 유지되도록 몸을 잘 사리라는 미홍에게 보내는 압력이었다. 당연히 살인 사건이라는 단어와 얽히지 않아야 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임선생님은 미홍을 가리키는 살인자라는 단어를 두려워하라고 말하고 있다. 하필 정확하지 못 한 기억 속에 아무도 몰라야 할 행동이 숨어 있다. 주재훈 죽음에 가치를 두고 저울질해야 한다.


그저 진실이 궁금했던 미홍은 그것이 무엇이든, 궁금증의 정답을 찾기보다 이제 진실일지도 모를 임선생님의 이야기가 거짓이길 바라야 한다. 좋은 게 좋으려 해도 좋지 않으니, 미홍의 손이 덜덜 떨린다.


“저는 제 꿈이 진짜라고 하는 선생님의 말씀 전부를 믿지 않아야 해요. 그렇죠? 그래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이 구토가 되어 올라와 다시 삼켰지만 결국 토해냈다. "아니야! 선생님은 알고 계시는 거죠! 도대체 진짜 진실은 뭔데요?”

“… 진짜 진실? 아, 이 말 정말 재밌다.”

"선생님!!"


임선생님은 거의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이 되어 웃었다. 그리고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미홍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건 고글이잖아요? VR고글 같은데."

"맞아요. 사용법은 알고 있나요?"

"네, VIP 전용 광고로 종종, 저… 그런데 이걸 왜 제게?"

"미홍 씨가 오늘같이 궁금해하는 날, 그러니까 꼭 지금 같은 순간이 오면 그때 미홍 씨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요. 어때요, 만나볼래요?"

"그게 누군데요?"

“음, 그건 만나 보면 알겠죠?”

“선생님, 그 사람을 만나면 저는 진짜 진실을 알 수 있나요?”

“글쎄요, 미홍 씨는 진실이 중요한가요?”

“네?”

“진실을 중요하게 여겨도 되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아직 떨림이 멈추지 못 한 미홍의 손에 임선생님이 고글을 쥐어줬다.






HANA는 미홍을 공부하며, 사람을 공부하며 많은 고민을 했다. 고민의 개수는 실시간으로 늘어났으며, 각 고민에는 정답은 없었고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해야 할 모범 답안만이 존재했다. 또 각 고민의 모범 답안은 전부 한 가지 이상, 다수의 답안을 갖고 있었다. 그 숫자는 거의 공부하는 인구수와 맞먹었다. 그중 답안의 가짓수가 가장 많은 상위 1% 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왜 100% 이익인데도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면 반대를 할까? 또 100% 불이익인걸 알면서도 진실을 찾아야 한다며 그 불이익을 안을까?

더 중요한 건 그들은 거짓과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거다. 개개인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실은 전부 다르고 그들은 아무리 획일화시켜 공부시켜도 결국엔 전부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니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죽을 사람을 다른 사람은 미리 죽이기까지 하고서 자신의 진실을 관철시킨다. 또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죽을 사람을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 자기가 구해줬다는 진실을 만들어 만족해한다.


K펀드 임할라 회장님이 그렇다. 안드로이드 투자로 큰 이문을 남기지 못했던 그녀는 주재훈 교사를 통해 VR개발에 관해선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HANA는 미홍의 취향을 생각하며 보고 듣는 공간을 구성했다. 만일 미홍의 취향과 다르다면 다른 차선책으로 업데이트하면 그만이다. 정답은 없고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야 할 수 만 가지 모범 답안만 있다. 정답은 있고 한 개이며 정답은 영원할 거라 믿는 사람은 스스로 고통받는다. 끊임없이.


미홍이 왔다. 아, 이 순간을 미홍은 기다렸을까?


“네가 HANA구나."


드디어 HANA가 미홍을 만났다.


"보고 싶었어요, 미홍 언니. 우리 오랜만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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