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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오뎅바

<식은 연애> 세 번째 이야기

by 옥광



합정동 신혼집에서 아이를 낳고 바로 연남동으로 이사를 왔다. 아직 경의선 숲길, 연트럴 파크라 불리는 공원이 들어서기 전, 한참 공사 중인 때였다. 나와 남편은 백일이 막 지난 아이를 데리고 공사 중인 기찻길 주변, 높다란 가벽을 배회하며 이 곳 공사가 다 끝나면 애 키우기 끝판왕일 거라며 좋아했다.


합정역 주차장 길에 있던 ‘피오니’ 도 이 곳의 가치를 알아보고 일찌감치 크게 2호점을 열었다. 연남동 우리 집 같은 골목이었다. ‘피오니’는 생크림 케이크만 파는 가게로 그 생크림 케이크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역시 우리의 이사는 옳았다.


냉장고에는 오늘 아침, 세수도 안 하고 아기띠에 아이를 매고 사다 놓은 이 '피오니' 생크림 케이크 2호가 있었다. 아이가 잠깐 놀이에 집중을 하거나 낮잠을 잘 때마다 냉장고 문을 열고 그대로 서서 케이크를 수저로 퍼 먹었다. 케이크는 그 유명 새만큼 맛있고 부드러웠다. 마침 아이가 낮잠에 자고 있어 홀케이크 하나를 다 먹어버렸다. 케이크를 살 때 받은 플라스틱 컷팅 칼은 케이크 케이스에 처음 받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사용할 일이 없었다. 냉장고 안은 수저로 퍼 올리다 흘린 생크림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지저분했다. 어제도 이렇게 케이크를 퍼 먹어서 냉장고엔 빈 케이크 상자가 더 있었다. 버려야 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낮잠을 자던 아이가 깨는 소리가 들려 그대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맛있는 케이크를 먹은 나는 기운이 나서 이제 막 기분 좋게 낮잠을 잔 아이와 집을 나섰다. 공원 공사 중인 기찻길을 빙 돌아서 동진시장으로 향했다. 우리 집은 경성고등학교 뒤편이었다. 코롱 아파트를 가로질러 가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그 길을 다 가로막고 공사 중이어서 동교동 삼거리까지 내려가야 동진시장 쪽으로 갈 수 있었다.


동진시장에는 ‘커피리브레’라는 유명한 카페가 있었고 그 골목에 친구가 ‘연남동 오뎅바’를 오픈했다. 평소 ‘커피리브레’를 자주 가던 친구는 이 골목에 가게 자리가 나오자마자 덥석 계약을 했다. 육아로 술 한잔 제대로 못 하는 나는 이렇게 친구 가게라도 찾아가 테이블을 차지하고 생맥주잔에 얼음물 한잔 마시는 것이 소소한 재미였다. 아이는 생 미구엘생맥주 호스를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낮에는 친구의 와이프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 와이프에게 밤 사이에 다녀가는 다른 친구들의 근황을 들었다. 내가 결혼 전, 어울리던 친구들이다. 지금은 간신히 톡만 주고받거나 전화통화만 종종 하는 친구들. 외상을 잘하던 오빠는 어젯밤에는 외상에다가 돈까지 빌려갔다고 하고 또, 아직 애가 없는 친구 부부는 둘 다 술에 취해 부부싸움을 크게 해서 경찰을 부를 뻔했다고 했다. 우리는 사람 참 안 변한다며 시시덕거렸다.


“언니! 원호 오빠는 또 싸움 날뻔했잖아”


원호는 술이 들어가면 잘 욱하는 친구였다. 맨 정신에는 남 약 올리길 잘하는데 술만 들어가면 자기가 남의 약 올림에 넘어간다. 그 친구가 어제 옆 테이블 손님과 시비가 붙었다는 것이다. 옆 테이블 손님이 자꾸 족발을 시켜서 먹겠다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고 원호는 족발을 먹으려면 족발집으로 가라고,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시비가 붙었다가 그 테이블에서 정신 말짱한 친구가 일행을 데리고 나가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했다. 원호는 자기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는 듯 의기양양했다는데 그냥 놔두면 진상 부리다가 그냥 갈 거 같은 손님들을 원호가 쓸데없이 불을 지핀다며 친구 와이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지 원호가 그런 애지’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또 싸워? 언제 또 싸웠는데?”


분명 또 싸움이라는 말을 들어서 또 언제 싸웠냐고 물어봤다. 나는 나 없는 친구들이 노는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응?” 친구 와이프가 갑자기 눈알을 굴렸다.

“왜? 진짜 제대로 싸운 거였어? 원호 뭔 사고 쳤어? 또 싸웠대매?”

“아… 그게 말이지 언니…”


갑자기 친구 와이프가 말 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사건이길래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나, 매일 이 곳에 오다시피 하는 나는 보통 어제 있었던 일을 오늘 다 듣는데 왜 어제 이전의 싸움 이야기는 놓친 건지 괜히 조바심이 났다.


“왜? 왜? 왜? 무슨 일인데?”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둥가둥가를 하면서 계속 물어봤다.

“음… 그게 언니… 형승 씨랑… 싸움이….”

“음? 형승?”


내가 둥가둥가를 멈추지 않아서 아이는 계속 꺄르륵 웃었고 그 웃음소리만 가게에 울렸다. 둘 다 순간 조용해졌다. 형승은 내 남편이자 아이 아빠다. 그는 아이를 낳고 처음 몇 주는 집에 일찍 들어오나 싶더니 이후, 한 달이 지날 무렵 다시 결혼 전처럼 놀기 시작했다. 클럽에 가고 친구들과 3차, 4차, 5차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에 옷만 갈아입으러 들어왔다. 아이 육아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나는 그에게 안방을 내주고 아이와 거실에서 지냈다. 내 옷가지 물건들도 안방에서 작은방으로 다 옮겨놔서 나는 그가 없는 시간에도 안방 문을 아예 열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와 아이는 그가 출근한 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아침에도 그와 얼굴 볼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깨어나 보니 세탁기 앞에 이불더미가 놓여 있었다. 냄새가 심했다. 코를 막고 조심스레 이불을 들춰보니 술을 잔뜩 먹고 토해놓은 토사물이 만두소처럼 들어 있었다. 나는 비닐장갑을 끼고 그 이불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도로 안방에 처넣고 문을 닫았다. 그 날 새벽에 집에 돌아온 그는 아침에 나가서 며칠 있다가 집에 들어왔다. 새 이불을 사 들고.


그런 그가 며칠 전, 새벽 2시쯤 여기 오뎅바에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는 형님이 하는데라며 왁자지껄 왔다는데 그때 원호가 여기에 있었다고 했다. 첨엔 웃으며 안부를 묻고 합석도 했다가 또 따로 마시다가 즐거운 분위기였다는데 취기가 점점 오른 원호가 결국 한마디 했다고 한다.


“야 그런데 넌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냐?”


친구들과 함께 온 형승이는 첨엔 웃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원호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질 못 하고 집요하게 추궁했다고 했다. 이 시간에!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를!


누구보다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내 친구는 혼자 애 본다고 아무것도 못 하고 집에 있는데 넌 왜 여기 있느냐?로 점점 언성이 높아져갔고 결국 서로 밀쳐내고 테이블 하나, 의자 몇 개가 엎어지는 큰 소리가 나고 나서야 형승이 친구들이 형승이를 끌고 나가서 그 싸움이 끝났다고 했다. 그가 새벽에 들어오는 그 많은 밤들 중 한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확하게 며칠 전인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언니… 그래도 난 언니한테 말해서 속이 시원하다. 우리 오빠는 언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뎅바 주인인 친구가 와이프에게 입단속을 시켰다고 했다. 내가 알면 속상하기만 할 테니 원호한테도 자기가 입단속시키겠다고, 너도 말하지 말라고.


“언니한테 말하면 내 세 치 혀를 뽑아버린다고 했다니까”

“풉~ 너 세 치 혀 이제 어떻게 하냐?”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의 세 치 혀를 걱정하는데 아이가 찡얼대기 시작했다. 배고프다는 신호다. 가방에서 이유식을 꺼내 먹였다. 요리라곤 라면도 하나 안 끓이던 내가 한우만 사 와서 열심히 육수 내고 채소 다지고 끓이고 해서 만든 이유식이었다. 간이 하나도 안되어 있어서 내 입맛엔 안 맞았지만 아이는 정말 잘 먹었다. 원호와 형승의 싸움은 이미 싸운 거고 나는 내 아이의 허기짐을 채워주는 게 지금은 더 중요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했다. 아직 모유수유 중이라 집에 가면 젖도 물려야 한다. 이유식을 다 비운 후에 집으로 향했고 평상시처럼 집으로 가는 길에 ‘피오니’에 들러 생크림 케이크를 샀다. 냉장고에 케이크를 넣어 두고 젖을 물린 후,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성심성의껏 아이와 놀아주고 잘 논 아이가 완전히 졸려하기 전에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재웠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아이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 원호에게 전화를 했다.


“어? 뭐야?”

내 전화를 받은 원호는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는다.

“뭐긴 뭐야? 너! 나 다 들었다. 알아버렸지. 형승이랑 오뎅바~”


나는 그 싸움에 대해 들었다고, 그냥 그 말하려고 전화한 거라고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원호는 자기 때문에 혹시 형승이와 큰 싸움이 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다가 그걸 왜 오뎅바에서 들었냐며 형승이가 말 안 해주더냐고 물었다.


“응, 형승이한테도 별 말 들은 거 없어."

"나는 강식이가 아무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다. 뭐~ 잘 있냐?"

"응! 잘 있지. 그리고 나 이혼 할라구.”


원호는 잠시 아무 말 안 하다가


“그래. 그거 뭐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영광인 줄 알아 이 자식아! 내 이혼 결정을 네가 제일 처음으로 들은 거야”

“아 뭐래~ㅋㅋㅋ”


그렇게 원호와 통화를 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대로 문을 연 채로 냉장고 안, 오는 길에 산 케이크를 퍼 먹으려다가 문득 내 체중이 생각났다. 이렇게 하루에 케이크를 1개, 2개 통으로 먹었던 나는 일주일새에 4킬로가 찐 상태였다. 냉장고에 있던 빈 케이크 상자와 새 케이크 상자를 다 꺼냈다. 아직 먹지 못 한 케이크는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상자는 재활용에 내놓아야 했지만 빨리 버리고 싶은 마음에 그냥 일반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았다.


이제 냉장고 청소를 해야겠다.











연남동 오뎅바. by 옥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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