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네 번째 이야기
초등학교 2학년, 9살 여자애는 아침을 먹는다. 맛있는 반찬이 너무 많다. 콩자반, 김치, 햄, 계란말이, 고사리나물. 항상 그렇듯 최대한 잠을 자고 일어나서 등교 시간이 빠듯하지만 아침은 꼭 먹는다. 먹고 싶으니까.
외할머니는 당신의 요리를 맛나게 먹고 있는 손녀딸의 머리를 양갈래로 따준다. 9살 여자애는 외할머니의 손길에 따라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려도 익숙하게 반찬 하나 떨어트리지 않고 잘 먹는다. 반찬들이 은근히 간이 세지만 중간중간 아무 맛도 안 나는 짠맛 없는 밥을 먹어주면 충분히 먹을 만하다. 먼저 출근한 아빠가 항상 국그릇에 밥을 말고 밥그릇에 3분의 1 정도 밥을 남기는데 그것까지 싹싹 다 먹으면 얼추 밥상의 반찬 그릇을 깨끗이 비울 수 있다.
외할머니의 머리손질이 끝나고 시간이 더 지나야, 여자애의 아침식사가 끝난다. 아침 밥상엔 항상 여자애 혼자다. 여자애가 일어나 밥을 먹을 때엔 엄마도 이미 출근하고 집에 없다. 그래서 아침밥을 먹고 나면 일어나는 전쟁도 외할머니의 몫이다. 전쟁의 이유는 여자애가 입어야 할 옷 때문이다.
거실 한편에 여자애가 입어야 할 옷이 놓여있다. 여자애의 엄마는 출근 전, 여자애가 입을 옷만은 꼭 꺼내놓고 나가는데 이게 여자애 마음에 들어본 적이 없다. 여자애는 바지가 입고 싶다. 잘 늘어나고 허리도 고무줄로 되어 있어 배부르게 먹은 아침밥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바지. 그리고 배부른 배를 편안하게 감싸줄 큼지막한 티셔츠. 이게 여자애가 원하는 옷이다. 색도 짙은 색이어서 어지간한 때가 묻어도 티가 안 나는 그런 옷. 그러나 여자애의 아침에 이런 옷이 놓여본 적은 없다.
거실에 놓여 있는 오늘의 옷은 소매는 퍼프소매로 한 껏 부풀려진 연두색 상의에 치맛단은 무지개색으로 알록달록한 원피스이다. 점입가경으로 허리에는 리본으로 만들어진 꽃이 붙어 있는데 이게 앞, 정중앙에 붙어 있다. 입고 나면 배 한가운데로 와서 꽃동산에 나무가 자라 있는 느낌이다. 너무 싫다. 그래서 전쟁이다.
“아!! 이거 안 입어!! 안 가!!! 학교 안 가!!!!”
외할머니는 어린 손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또 이 옷을 꺼내 놓고 간 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이 옷을 입혀서 보내지 않으면 딸이 엄청난 히스테리를 부리기 때문이다. 매일 출근하는 딸은 엄마로서 하나 하는 게 아침에 옷을 골라놓는 일인데 만약 이 미션이 실패하면 오롯이 외할머니의 의지박약으로 몰아세운다. 외할머니는 이게 싫으니 여자애의 고집을 꺾기 위해 당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어떤 때는 지각을 불사할 정도로 전쟁을 치러서 반드시 옷을 입힌다.
아직 9살밖에 안 된 여자애는 결석은 하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결국 이 등교 전쟁에서 패한다. 이겨본 적이 없다. 사실 옷장에 여자애가 원하는 옷도 없다. 여자애가 이 집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옷은 내복인데 9살 여자애는 내복을 입고 나가기엔 이제 나이가 많다.
또래보다 잘 먹고, 또 잘 먹어서인지 또래보다 크고, 또래보다 뚱뚱한 여자애는 결국 전쟁에 져서 배에 꽃동산을 만들어 등교한다. 뒤에서 외할머니는 연신 이쁘다고 너무 이쁘다고 하나도 안 뚱뚱해 보인다고 큰소리로 외쳐주는데 저게 더 싫다. 빨리 저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뛰어가자니 꽃동산의 나무가 더 튈까 봐 뛰지도 못하겠고 그저 잔뜩 웅크리고 걸어갈 뿐이다. 눈물이 안 통하는 걸 알기 때문에 우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 한지 오래다. 웅크린 배는 더 나오고 꽃동산의 나무는 더 커 보인다.
엄마는 명동의 전화국에서 근무하신다. 길만 건너가면 신세계 백화점이 있고 롯데 백화점이 있는 곳이다. 당시엔 몰랐는데 여자애의 집은 이미 상당한 빚을 짊어지고 시작한 상황이어서 두 분이 함께 버셔도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다. 엄마도 아빠도 직장이 모두 서울이었지만 서울에 살지 못하고 수도권 왕복 두세 시간이 걸리는 과천에 살았다.
엄마는 퇴근할 때 종종 길 건너 백화점에 들렀다 오시곤 했다. 백화점 마감시간에 떨이로 파는 빵을 쓸어올 때는 축제였다. 여자애는 아직도 백화점 빵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옷은 아니다.
지하철도 없었던 당시에 빵 봉지가 아닌 백화점 종이백을 엄마가 힘들게 들고 오는 날엔 여자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저 놈의 백화점 옷! 이번엔 꽃무늬가 더덕더덕 박혀 있는 원피스다. 저 놈의 원피스! 저 빌어먹을 꽃무늬! 여자애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쳤다.
“진짜 싫어! 왜 내가 말했잖아! 바지 입고 싶다고!!”
엄마는 걸어 잠긴 방문을 보면서 쇼핑백을 내려놓고 그냥 씻으러 간다. 엄마는 저런 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 지금 당장은 싫다고 할 수 있지. 그러나 이 옷들은 백화점에서 파는 좋은 옷이다. 세일가로 산 거긴 하지만 정상가는 나름 비싼 옷이다. 백화점에서 파는 빵은 받자마자 홀랑 먹으면서 아니 옷은 왜 싫다고 저러나 싶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좋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백화점 직원, 정확하게 백화점에 있는 한 브랜드의 직원은 분명 9살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옷이라고 했다.
엄마는 백화점에서 꼭 이 브랜드의 옷만 사 왔다. 세일가 옷만 사는 엄마였지만 브랜드 직원은 매우 친절했다. 그리고 엄마는 딸보다 직원을 더 신뢰했다. 엄마에겐 이 알 수 없는 믿음이 몇 년째 있었고 이 알 수 없는 믿음 때문에 딸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끔 이 믿음이 흔들릴 때는 여자애의 양육을 책임지고 있는 외할머니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돌보는지 이 때는 이 두 사람이 전쟁이다. 여자애는 또 생각한다. 저 두 사람의 전쟁을 종식시킬 방법은 결국 저 백화점 옷들을 내가 입어주는 거다. 엄마가 본전 생각에 사이즈가 껴도 악착같이 입히려는 저 옷. 저 빌어먹을 백화점 옷!
여자애는 몇 년이 지나 결국 저 백화점 옷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살을 찌우고 커져서, 또래보다 아주 많이, 위로도 옆으로도 아주 많이 커져서, 저 백화점 옷의 제일 큰 사이즈도 여자애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백화점 옷은 그래 봤자 아동복이었다.
엄마는 백화점의 다른 옷으로 공세를 이어갔지만 덩치만큼 나이도 먹은 여자애는 이제 용돈을 모아 스스로 옷을 사 입었다. 엄마가 사다준 옷들은 옷장 한편에 처박혀 있었고 엄마는 여자애가 거지 같은 옷을 입는 다며 전쟁을 도발했다. 그러나 9살에서 청소년이 된 여자애에게는 엄마와의 전쟁은 껌이었다. 엄마의 화살은 여자애에게서 외할머니로 날아갔지만, 청소년인 여자애는 하루 종일 학교에 묶여 있어서 화살을 보지 못 했다.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에 입학한, 뭐든지 잘 먹었던 여자애는 술도 잘 마셨다. 대학에만 가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술기운으로 이성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빼지 않고 나갔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남자애를 보기 어려웠다. 대부분 다 그녀보다 왜소했다. 그러던 어느 술자리에서, 아마 소주를 한 4병쯤 마셨던 날인 것 같다. 친구가 남자를 소개해준다며 한 명 데려 왔다. 잘 먹어서 키가 큰 여자애보다 10cm는 더 커 보이는 남자애였다. 첫눈에 호감이었다.
마음에 들어 대놓고 관심을 갖고 이름을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김민재'였다.
"김. 민. 재."
어릴 때 여자애 엄마가 죽어라 사다 준 백화점 옷! 그게 ‘김민재 아동복’이었다. 젠장. 여자애는 웃음을 거두고 말없이 연속으로 소주잔을 들이켰다. 여자애보다 키가 큰 '김민재'는 그런 여자애를 멀뚱하니 바라만 보았다. 보면 볼 수록 잘 생겼다. 이윽고 여자애가 눈을 치켜뜨고 '김민재'를 노려 보았다.
“난 너랑 사귈 수 없어!”
여자애는 오늘 처음 만난 '김민재'에게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김민재'는 어릴 때도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제는 내 사랑도 가로막는다.
“빌어먹을 김민재!”
김민재, 빌어먹을!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