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두 번째 이야기
“어디 사과 깎는 솜씨 좀 볼까?”
다들 식사를 마친 직후였다. 분명히 반공기만 담아 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공기 꽉꽉 눌러 담겼던 나의 밥공기엔 김칫국물이 너덜너덜 묻은 밥이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밥 먹는 내내 내가 무슨 반찬을 집어 먹는지 관심이 많았던 남자 친구의 부모님은 내가 남긴 밥을 두고 지옥을 들먹였다. 먹을 걸 남기면 죽어서 지옥엘 가고 거기서 살아생전 남긴 음식을 다 먹어야 된다나 뭐라나. 불특정 다수 어른들로부터 사후세계를 담보로 이런 유의 협박을 듣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에 웃어넘겼다.
“아… 지옥 가서 굶을 일은 없겠어요. 하~ 하~ 하~”
그래서 그들이 왜 국에는 손도 안 대냐며 물었을 때는 ‘지옥 가서 먹으려구요’ 라고 나만 알게 속으로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국을 안 먹던 습관에 대해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식사를 마친 밥상을 남자 친구 어머님이 치우기 시작하며 자꾸 나를 쳐다보길래 나는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있었다. 속으로는 ‘뭐 어쩌라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인 나의 남자 친구가 당신을 도우려 손에 그릇 몇 개를 들어 올리자 그 그릇 들을 잽싸게 낚아채며 너는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말이었다. 내 사과 깎는 솜씨를 보고 싶다고.
왠지 올 것이 좀 빨리 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예상 못 한 일은 아니기에 나는 예의 바르게 “네”라고 대답한 후 그의 어머니가 밥상을 정리할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려주었다.
밥상을 다 치운 어머니는 쟁반에 사과와 과도를 챙겨 가져왔다. 1인 1사과인가. 사과 4개가 놓인 쟁반이 내 앞에 놓였다. 막 씻어서 내온 사과는 물기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과도는 과일 껍질을 벗기는 용도로 쓰이기엔 지나치게 날이 서 보였다. 손 잡는 부분에 새 그림이 조각된 이쑤시개만 한 포크도 있었다. 너무 작았다.
나는 왼손에 사과를 든 채로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고 부엌으로 갔다.
개수대 안, 설거지통엔 물과 함께 방금 치운 그릇들이 담겨 있었다. 그 옆엔 건조대가 있었고 건조대엔 그릇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바로 그릇을 닦아 정리하시는 듯했다. 깨끗한 행주, 깨끗한 가스레인지, 깔끔한 부엌이었다. 칼 거치대에도 여러 개의 부엌칼들이 크기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가지러 간 것은 '감자 깎는 칼'이었는데 수저통에 꽂혀 있었다. 길쭉한 스텐레이스 색 수저들 사이에서 빨간색 '감자 깎는 칼' 혼자 넙적하게 있었다. 우리 집에 있는 건 연두색인데 우리 집에선 이걸 '사과 깎는 칼'이라고 부른다.
나를 키워준 외할머니는 내 사과에 대한 기억의 시작부터 감자 깎는 칼로 사과를 깎아 주었다. 사과 껍질의 낭비도 없고 사과 껍질을 길게 늘어트리기 위한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었다. 지금의 남자 친구도 동거를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난 아침, 밥 대신 사과를 먹으려고 감자 깎는 칼로 껍질을 벗겨내는 나를 보고 진짜 좋은 아이디어라고 감탄을 했었다. 벗겨진 사과 껍질이 짤막 짤막해서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기도 편하다며 좋아했다. 이후로 그도 감자 깎는 칼로 사과 껍질을 벗겨냈다.
그래서 지금, 한 손에 사과를 다른 한 손엔 감자 깎는 칼을 든 나를 눈이 동그래져서 보는 그가 이상했지만 뭐, 무시했다. 내가 쓰던 감자 깎는 칼은 그 모서리에 찌든 때가 조금씩 껴 있었는데 이 집 칼은 모서리까지 깨끗했다. 역시 ‘이 집 어머니 살림 꽤 하시네’ 속으로 칭찬을 했다.
“아니 도대체 집에서 어떻게 배운 거야? 집에서 사과 깎는 거 안 가르쳐줬니?””
순간, 속으로 욕이 나올 뻔했다. ‘뭐래? 이 씨!’
그렇다. 안 가르쳐줬다. 나는 직장 나가는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우리 외할머니는 여자가 부엌일 잘해봤자 부엌일만 하게 된다며 말 그대로 설거지 한번 안 시키셨다. 나는 엄청 곱게 자란 여자였다.
나는 속에서 나오는 욕이 밖으로 샐까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자코 그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주었다. 그의 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 가정교육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내 건강문제, 식습관까지 들먹이기 시작했다. 밥 먹을 때 국을 안 먹는 것이 내 변비의 이유란다. 이건 처음 듣는 변비에 관한 정보였다. 오늘 처음 본 분들이 나의 배변 상황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지적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들에게 나의 정보를 흘렸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 남자 친구에게 이 당황스러움을 눈빛으로 말할 때,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젓가락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내 엑스자 젓가락 잡는 법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허공에 대고 자신이 젓가락질을 얼마나 잘하는지 자랑하기 시작했다. 자랑질에는 어머니까지 가담했다. 날파리가 보인다면 날아다니는 날파리라도 잡을 기세였다. 맞다. 나는 젓가락을 '십일' 자 모양으로 잡지 못 한다. 그렇다고 이걸로 집에서 뭐라고 지적받은 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집에서 젓가락 쥐는 법을 배운 기억이 없다.
꼬마 시절, 집에서는 포크로 먹게 해 주었고 젓가락을 엑스자로 쥐게 된 것은 친구네 집에서 라면을 얻어먹으며 자연스레 터득한 것이었다. 무엇을 먹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치를 반으로 가를 땐 젓가락을 양손에 쥐고 가르면 되었다. 그런데 이 부모님들은 식사 중에 김치를 두 손으로 가르는 것도 애 같다며 웃어댔다. 나는 그렇게 웃긴 일인지 모르겠는데 그들은 잘도 웃으며 감자 깎는 칼로 깔끔하게 벗겨내고 과도로 8등분을 한 내가 깎은 사과를 잘도 먹어댔다.
이쑤시개 만한 포크는 사용되지 못하고 관상용으로로 사과 조각에 꽂혀 있기만 했다. 사과를 들어 올리기엔 너무 약했다. 대신 포크처럼 젓가락에 사과를 꿰어 먹었다. 아니 그렇게 젓가락질을 잘하면 젓가락으로 잡아서 먹지 왜 저러나 싶었지만 나는 공식적으로 그저 실실 웃기만 했다. 한 껏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젠장, 그렇다. 이게 내가 받은 가정교육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가정교육은 제대로 못 받았지만 대신 소위 웃어른이란 분들이 나에 대해서 무례하게 행동할 때, 특히 남자 친구관계에 얽힌 어른들이 무례한 행동을 할 때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어주는 것, 심지어 웃어주면서, 이렇게 교육받아져 있었다.
왜인지 나의 부모님이 나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말을 하면 단 한 번도 그냥 넘기고 참아 본 적이 없으면서, 왜 남의 부모님, 특히 남자 친구관계의 부모님이 무례할 땐 왜 찍소리도 한번 안 하고 다 참아보려고 하는지. 어릴 때부터 보던 우리 엄마, 옆 집 엄마, 친척들, 이웃들, 내 주변, 텔레비전 그리고 다시 나의 가정 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이렇게 학습되어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국을 안 먹는 나를 두고 나중에 가정교육 잘 받은 당신네 아들이 밥 먹을 때 국 한 그릇 얻어먹기 힘들겠다며 걱정을 했다. 가정교육을 중요시 여기는 그들은 아들이 자기가 먹고 싶은 국 한 그릇 스스로 끓이는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남의 집 자식으로부터 그의 아들이 먹고 싶은 끼니를 얻어먹을 수 있을 까에만 관심이 있었다. 특히 아침밥. 그들은 당신들의 아들에게 아침밥은 꼭 먹여야 한다며 강조를 해댔다. 그러나 같이 살고 있는 나는 그가 아침을 제대로 먹는 꼬라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또 아무 말도 못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네 번째 사과를 깎으려고 하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런 나를 말렸다. 배가 부르다나 뭐라나. 남겨진 사과 조각 몇 개는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사과가 변비에 좋다고 들먹이며 색이 변한 사과 조각들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밥을 반공기밖에 안 먹고 국에는 한 입도 안 댄 나도 배가 불러서 도저히 못 먹겠다고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그의 어머니는 남은 사과 조각을 그냥 버려야 하냐며 웃는 타박과 함께 굳이 한 번 더 나에게 권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웃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무는 걸로 거절의 의사를 한번 더 표현했다. 그녀는 왜인지 그 버리기 아까운 사과를 당신 아들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그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의 부모님 댁에서 가진 긴장감이 피곤함으로 몰려왔다. 단잠이었다. 집 앞, 오는 내내 푹 자고 눈을 떴더니 개운 했다. 빨리 집에 들어가 바닥에 널브러져 누워 TV나 보고 싶었다. 그는 차 트렁크에서 그의 집에서 싸준 반찬통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는 중이었다. 양손 가득 반찬통을 들고 나머지는 나더러 들라며 눈치를 보냈다. 이 전에도 그가 혼자 집에 다녀올 때마다 이만큼씩 반찬을 들고 왔었는데 항상 반 이상은 버렸다. 그는 집에서 밥을 잘 안 먹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다시 피곤이 몰려왔다. 들어가면 TV는 무슨, 잠이나 푹 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을 때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자기야, 너 사과 깎는 법 좀 제대로 배워야겠어. ㅋㅋㅋ”
하! 씨이... 이 자식과 헤어져야겠다.
사과 깎는 칼.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