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첫 번째 이야기
“자, 이거 드시면서 하시고”
옆 자리 미영씨가 내 책상에 뜨거운 김이 서린 테이크 아웃 종이컵 한 잔을 내려놓았다. 아, 내가 너무 좋아하는 향이다. 회사 맞은편 건물 1층에 있는 작은 카페의 핸드드립 커피. 향은 고소하면서 달콤한데 맛은 산미가 높아 입안에 들어가면 산뜻하게 넘어간다. 빨리 맛보고 싶은데 지금은 너무 뜨거워 벌컥 들이킬 순 없고 데이지 않게 살짝 맛만 보고 내려놨다. 거의 향만 맡은 것 같다.
“저는 먼저 들어갑니다!!” 미영씨가 맛있는 커피만 남기고 퇴근한다. 이미 일곱 명이 게임을 클리어해 집에 갔고 이제 나를 포함해 여덟이 남았다.
현재 개발 중인, 다섯 번째 베타 버전 게임을 테스트 중인데 왜 같은 게임 같은 정보로 하고 있는데 나는 클리어가 더딘 건지 발견되는 버그도 딱히 없는데 영 진도가 안 나간다. 이 게임 개발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이거 너무 재미없다. 내일 있을 전체 회의만 아니면 이 따위 게임 안 하고 칼퇴해서 양재역 포차에서 대구탕에 소주나 마시고 있을 텐데 참 지겹다.
마우스패드 옆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하니 9시 10분이다. 9와 10중 10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10이 11로 바뀌는 걸 보고 싶어서다. 적어도 1분 동안은 게임을 안 하고 싶었다. 다른 손에는 방금 들어간 동료가 주고 간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는데,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면서 후후 불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숫자에 집중하느라 그러지도 못했다. 내가 본 10이 몇 초짜리 10인지 모르므로 11로 바뀌는 정확한 타이밍은 알 수 없다. 이 시간이 1분짜리인지 32초, 혹은 9초짜리인지 알 게 뭐람. 그냥 뚫어지게 본다.
이윽고 기다리던 “11"을 발견한 순간,
"여보세요~” 전화가 왔다. “강희동? 또 왜?”
6시 이전 일하는 시간이면 안 받고 부재중으로 돌렸겠지만 지금처럼 야근을 할 때는 오는 전화는 다 받는다. 야근 중에는 일할 때 충분히 방해받고 싶다. 강희동 이 오빠와는 이미 약 한 시간 전에 한차례 통화를 한 바 있다. 희동이 오빠와는 대학 때 잠시 어울렸는데 지금 말로 썸이라고 부르기에도 좀 애매한 지저분한 사이였다. 아니 더러웠다. 지금으로부터 약 8여 년 전으로 현재 몸 담고 있는 게임회사 근처 강남역 주변에서 주로 놀았는데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고 한번 술을 마시면 아무 데나 토를 갈기던 때였다. 오로지 수직과 수평, 멀쩡하거나 뻗어 있거나. 중간은 없었다.
한 번은 이 오빠와 또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강남역 CGV 뒤편 골목에서 닭갈비를 안주 삼아 소주로 달렸는데 내가 매장 안에서 그대로 토를 해버리는 바람에 주인한테 쫓겨난 적이 있었다. 대낮 같은 눈부신 오후 5시, 해가 긴 여름이었다. 지금이었으면 ‘닭갈비 오바이트녀 어쩌고 저쩌고’라고 각종 SNS에 얼굴이 팔려 망신살이 뻗힐 일이다. 그때 희동이 오빠가 머리며 얼굴이며 옷이며 정신줄이며 엉망이 된 나를 인근 모텔로 데려갔다. 당연히 남녀 사이 별 일이 벌어졌고 이후로 나는 취하기만 하면 이 오빠와 단 둘이 사라졌다. 이 오빠와는 단 둘이 맨 정신으로 있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대화다운 대화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던 중 드디어 서로 맨 정신으로 어울릴 사람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었는데… 그런데 한 시간 전쯤, 정말 뜬금없이 전화가 온 것이다. 그리고 정말 너무나도 생뚱맞게 희동이 오빠 입에서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리운 다른 이름이 나왔었다.
[“야, 너 한태훈이라고 알아?”] 핸드폰 너머 시끄러운 호프 안에서 그가 큰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어?! 오빠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놀러서 나도 모르게 똑같이 큰소리로 되물었다.
[“어떻게 알긴~ 야! 우리 같이 일해~ 같은 회사.”]
이 오빠와 그 오빠가 현재 같은 회사 동료고, 지금 회식 중인데 옛날이야기, 출신 학교 등 이런저런 말이 오가다 우연히 내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네가 알고 내가 아는 그 사람이라는 게 신기해서 전화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몇 년 만에 걸려온 희동이 오빠의 전화보다 두 사람이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된 우연의 일치보다 이 오빠 입에서 ‘한태훈’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 가장 놀라웠다. 어떻게 저 입에서 그 이름이.
‘한태훈’은 나의 공식적인 고등학교 짝사랑이자 첫사랑인 오빠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광팬, 요샛말로 덕후였고, 어느 포털사이트 ‘일본 애니메이션 동호회’의 정회원이었다. 동호회 활동이라는 게 그냥 AV시스템이 잘 갖춰진 카페에서 모여 일본 애니메이션 한편 혹은 여러 편을 감상하고 ‘와 좋다’ 하고 감탄하는 게 다였던 때였다. 지금은 입에 달고 사는 없으면 큰 일 날 것만 같은 블랙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이들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단 음료만 마실 때였다. 아, 조금씩 술맛도 볼 때였는데 좋다고 술 마시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때이기도 했다. 아무튼 8년 전과는 달랐고 지금과도 달랐다.
당시 군입대를 앞두고 대학교 휴학 중, 동호회 활동을 하던 태훈 오빠는 교복을 입고 동호회 모임을 나온 나와 내 친구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주로 어른들(?) 성년들 위주의 모임에서 고작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내 친구는 많이 쫄아 있었는데 이때 친절하게 대해준 태훈이 오빠를 나는 안 좋아할 재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 오빠 잘생겼기 때문이다. 얼굴에서 빛이 났었다.
한 번은 나와 태훈이 오빠, 그리고 동호회 활동을 같이 하는 나의 고등학교 친구 선희, 이렇게 셋이서 다른 영화 동호회 모임으로 <쇼생크 탈출>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영화 중반 ‘팀 로빈스’가 연기한 주인공 앤디가 어느 교관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고 다른 죄수들에게 맥주를 쏘는 장면에서 눈물이 터졌다. 이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엉엉 울었다. 태훈 오빠는 내가 그냥 감수성 터지는 사춘기 고교생이라서 그러려니 했을 텐데, 사실은 좋아하는 오빠랑 영화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벅차올라 너무 좋아서 그랬다. 현재로선 상상할 수 없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수성이 마구 터지는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폭탄 같은 감수성이 눈물로 터지면 가지고 있던 수분을 다 빼내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그만큼 오빠를 짝사랑했고 태훈 오빠 군입대 전까지 친구 선희와 셋이 종종 만났다.
오빠가 군입대를 한 이후에는 편지를 정말 자주 보냈고 어느 것 한 장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항상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려 넣어 보냈다. 오빠를 의식한 이미지 관리를 위해 귀엽고 착한 캐릭터만 그렸다. 어느 크리스마스 때는 산타 옷을 입힌 <이웃집 토토로>의 토토로 카드를 만들어 보냈는데 옛날 아날로그 방식으로 투명한 OHP 필름에 선 하나까지 아크릴화로 채색해 레이어로 쌓아 올린 그림을 그려냈다. 덕분에 태훈 오빠는 그 해 제일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다는 이유로 겨울 포상휴가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나 아쉽게도 그 휴가 중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섭섭해하지 않았다. 연말 가족 모임과 교회 행사로 바쁘다고 했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태훈 오빠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사적인 욕심을 내선 안 되는 순수한 짝사랑 상대였다. 고백해 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나의 순수한 시대의 태훈 오빠가 더러운 시대의 희동이 오빠와 함께 있다니! 자칫 일급수 맑은 물이 오염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더러운 시대의 첫 번째 전화로 다분히 신경이 쓰이던 중 9시 11분, 더러운 시대의 두 번째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왜? 왜? 나는 야근 중이라고, 바쁘다고.” 나는 태훈 오빠가 궁금하면서도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는 왜 계속 짜증이냐? 그러지 말고 여기 한태훈 씨가 너한테 할 말이 있데.”]
“응? 태훈이 오빠가 그래?” 갑자기 목이 메어 눈앞에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려는데 아직 뜨거워 겨우 넘겼다.
”그럼 그 오빠 좀 바꿔줘 봐.”
태훈이 오빠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니 그와의 사이에서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심장이 콩닥 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내 목소리는 애써 무심해지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말랑해졌다. 게임을 빨리 끝내고 집에 가려던 나는 핸드폰을 목에 끼고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훈이 오빠가 하려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예전에 스모킹 존으로 사용했던 복도 끝, 휴게실엔 바라던 대로 아무도 없었으니. 곧 수화기 너머에서 순수한 시대의 잘 생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훈이 오빠의 목소리는 한 시간 전보다 조금 더 풀려 있었지만 여전히 다정하다.
“태훈이 오빠, 괜찮으세요? 오빠 술 많이 마신 거 같아요…”
[“아 그럼… 나보다 희동 씨가 많이 마셨어.”] 태훈이 오빠 목소리 너머로 익숙한 강희동의 소음이 들린다.
“뭐, 그 인간이야 술만 먹었다 하면 길바닥이 지네집 안방!” 순간적으로 나의 언성이 높아졌으나 곧 진정시켰다. 희동이오빠가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어떻게 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입으로 더러운 시대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오빠가 옅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데…
[“선희… 선희는 잘 지내니?”]
“네?”
선희라… 순수한 그 시절 태훈이 오빠와 <쇼생크 탈출>을 보며 눈물을 흘릴 때 같이 있었던, 나와 같이 ‘일본 애니메이션 동호회’를 했던 그 친구다. 당시 서로의 관심사가 맞아 나름 단짝이었는데 대학교를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한 후로 연락이 뜸해진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건너 건너 근황은 알아낼 수 있는, 지금은 그런 친구다.
내가 평균보다 키도 크고 체중도 많이 나가는 엄청 덩치 큰, <이웃집 토토로>의 큰 회색 토토로까지 태울 수 있는 덩치 큰 고양이 버스 같았다면 이 친구는 평균보다 자그마한 파란색 작은 토토로 같은 친구였다. 아마 난 이 친구 옆에 서 있으면 더 거대해 보였을 거다. 거기에 나는 치아 교정기까지 끼고 있었으니 진격의 터미네이터처럼 보였을 수도.
[“아… 너도 선희랑 연락이 안 되는구나.”] 태훈 오빠의 실망감이 전해졌다.
나는 뭔가가 쎄함을 느꼈다. 태훈 오빠가 선희의 안부를 물어오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닐진대 그런데도 뭔가 쎄했다. 아까와는 달리 간간이 들리던 강희동 소음이 들리질 않았다. 이 오빠, 나에게 선희 이야기를 물어보면서 통화 장소를 조용한 곳으로 옮겼나 보다. 오빠는 조용했다. 손에 있던 아메리카노를 두어 모금 마셨다. 아까보다 식어서 삼키기 수월했다.
“… 저기 그럼 저는 이만?” 나는 나도 모르게 통화를 끝내고 싶었는데,
[“내가 음…, 나 선희랑 만났었는데…, 알았니? 너는 몰랐지?”]
“네? 만나요? 만나다니 그게 뭔 말이에요?”
역시 쎄할 데는 뭔가 다 이유가 있구나. 오빠 말인즉슨, 순수했던 시절 나의 짝사랑 태훈 오빠와 그 시절 내 단짝 친구 선희가 사귀었다는 이야기였다. 나 몰래! 남몰래! 너무나 잘 속여가며 만나서 지금처럼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듣질 못 했다면 평생을 몰랐을 만큼 정말 감쪽같이!
나는 태훈 오빠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반해버려서 친구 선희에게 항상 그 오빠가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 떠들곤 했었다. 태훈 오빠 군입대 후에는 그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는 항상 선희에게 먼저 보여줬다. 오빠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재밌는 이야기들이나 사건들 중 누락된 게 없는지 물어봤고 선희가 빼먹은 걸 말해주면 더 썼고 선희가 재미없다고 하면 그 이야기는 지워버렸다. 오빠를 위해 편지에 그리던 그림도 선희에게 먼저 검수를 받았다. 선희가 여기저기 지적하면 그에 따라 고치고 수정해서 태훈 오빠에게 보냈다. 그랬던 친구였는데 그 선희와 태훈 오빠가 그 나의 순수한 시간들에 나에게는 비밀로 하고 서로 사귀었다고.
태훈 오빠는 이제 와서. 10년, 아니 15년이 지나서 나에게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오빠 스스로, 물론 술에 좀 취해서였겠지만. 그렇다고 만취도 아닌 것 같은데.
[“그때 그 카드는 정말 고마웠어.”]
오빠는 내가 보냈던 토토로 크리스마스 카드 덕분에 포상휴가를 나와 매일 선희를 만날 수 있었다며 많이 늦었지만 그 고마움을 이제라도 말하고 싶다고 했다. 젠장, 그 고마움에 진심이 느껴진다.
[“그때 정말 고마웠어. 덕분에 선희랑 정말 좋은 시간 보냈었어.”]
“아니 뭐… 에… 참 다행입니다. 네…”
속으로 ‘쓸모가 있어서 존나 다행입니다.’라고 외쳤다.
입이 트인 태훈 오빠는 방언 터지듯 선희와의 연애사를 줄줄이 읊었는데, 나는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과거를 수정했다. 내가 이 오빠를 너무나 짝사랑한 나머지 혼자 만나기에 몹시 쑥스러워하니 이를 곁에서 보기에 안타깝게 여긴 자상한 나의 친구가 그저 함께 해준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둘은 이미 만나서 비밀연애를 시작했고 너무 둘이 만나면 자신들의 비밀연애가 들킬까 봐 중간중간 나를 끼워서 만난 거였다. <쇼생크 탈출>을 보러 갔을 때는 선희와 태훈 오빠 사이에 내가 앉아 있었는데 선희랑 오빠가 내 뒤로 손을 잡고 영화를 봤다고도 했다. 태훈이 오빠는 촉촉한 목소리로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나에게 해댔다. 그때의 나는 이 오빠가 순간순간 나의 어깨를 감싸줬던 것 같아 몹시 들떠서 좋아했었고 이걸 상기된 얼굴로 들떠서 선희에게 떠들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선희와의 연락이 뜸해졌던 게 태훈 오빠와도 연락이 끊길 때 즈음인 것 같다.
[“그때 내가 너한테 정말 많이 고마워서, 너를 잊을 수가 없네.”]
“아 네….”
나는 좋아했어서 잊을 수 없어했는데…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식어있었다.
[“너한테는 너무 고맙고 선희한테 너무 미안해…”]
태훈 오빠는 이제 자기가 선희에게 더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떠들기 시작했다. 흐름상 나한테 더 미안해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이 오빠가 애틋하게 여기는 대상은 ‘온리 원 픽’ 선희밖에 없었다. 나는 그냥 좀 신세 진 아는 동생이었다. 아니 호구 동생인가.
나의 짝사랑 이야기에서 나는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제 보니 나는 ‘친구 1’이었다. 그리고 ‘친구 1’인 줄 알았던 선희가 ‘주인공’이었다. 이 사실을 이제야 이렇게 알게 되다니.
태훈이 오빠는 ‘보고 싶다 ‘, ‘그립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선희가 보고 싶고 그립다고 말하고 있었다. 뭐, 지금 유부남이라서 그런 걸 수도. 이 오빠 교회에서 만난 친구와 결혼해서 다섯 살 딸, 세 살 아들이 있다.
나의 그 시절은 순수한 시절이 아니고 호구한 시절이었구나. 호구, 내가 호구였다니! 나의 그 모든 정성이 남 좋은 일 시켜주기만 한 호구짓이었다니! 그런데 희한하게 괜찮다. 열받기는커녕 점점 시큰둥해져 갔다. 선희와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듣는데도 너무 별 느낌이 없어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것 역시 저 냥반이 유부남이라 그런 걸까. 기분만 묘했다. 분명히 그냥 넘어가야만 하는 사소한 일은 아닌데 사건의 내용에 비해 내가 받은 충격은 너무 미비하다.
만약 태훈이 오빠와 선희의 관계를 몇 년만 전에라도 알았다면 사건의 온도가 지금 같지 않았을 것 같다. 아마 지금보다 훨씬 뜨거운 관심을 보였겠지. 맛있고 향 좋은 뜨거운 커피. 같은 커피인데 뜨거울 때는 코로 커피를 마시려는 듯 그 진한 향을 들이켜고 입천장이 데일 각오를 하고서라도 속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액체를 조심조심 어떻게든 맛보려고 하겠지만 식어버리면 달라진다. 상한 것도 아닌데 침 냄새가 섞인 듯 식어버린 향에는 코를 가까이하지 않고 그 새까만 식은 물은 맛이 없어서 건성으로 벌컥 넘겨버린다. 그냥 버릴 때도 있는데 안 아깝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식은 커피처럼.
“저기… 태훈이 오빠, 이거 강희동 전화로 너무 오래 쓰는 거 아니에요?”
분명히 하자. 더러운 희동이 오빠의 통신비를 위한 게 아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빨리 돌아가서 하던 게임을 끝내고 퇴근하고 싶어졌다. 웃긴 게 태훈 오빠는 아내가 핸드폰에 여자 번호를 저장하는 걸 싫어해서 내 번호를 직접 물아볼 수 없다고 사과했다. 내가 무엇을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미안해서, 대신 우리 언제 술이나 한 잔 할까? 희동 씨가 너 술 되게 잘한다고 하던데. 너 나하고는 술 마셔 본 적 없잖아.“]
태훈이 오빠 목소리 너머로 [“야! 우리 닭갈비 먹어야지! 닭갈비!”] 강희동 소음이 들려왔다.
“아! 아니에요 오빠! 저 술 못 해요. 끊었어요.” 거짓이다.
[“그래? 그럼 밥이라도 한 번 먹자. 어때? 아직도 제육볶음 좋아하니? 선희랑 둘이 많이 먹었잖아.”]
“그게 요새 저희 회사가 너무 바빠서.” 밥도 끊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건 다르게 둘러댔다.
오랜만에 듣게 된 ‘선희’란 이름. 선희는 은평구 어딘가의 새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초대받지 못했던 선희의 결혼식은 2년이 지나서야 나에게 알려졌었다. 태훈 오빠는 선희와의 과거는 추억하면서도 현재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의외로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했고 나는 진하게 만나던 사람이 있었고 결혼까지 했다고 말했다. 곧 강희동에 의해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더러운 시대와 순수한, 아니 호구한 시대가 마구 뒤엉켜 있구나. 뭐, 알 게 뭐람.
다행히 회사가 너무 바빠 밥 한 번 먹기 어렵다는 건 끝까지 주장하고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제때 못 마신, 향이 몹시도 근사했던 커피는 맛없게 식어버렸다. 생수 마시듯 벌컥 들이키다 말고 그냥 버렸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그 새 두 명이 더 집에 갔다. 커피가 식는 동안 쓸데없이 퇴근시간만 늦춰졌다.
식은 커피.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