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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Mar 13.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8. 비상금



8. 비상금



* 7화와 동일한 등장인물입니다.


귀멸의 칼날 극장판, 인연의 기적 합동강화훈련이 개봉했다. 한 달 전부터 아들과 나는 두근두근했다. 첫 개봉일은 지난 수요일이지만 서로 회사와 학교라는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 둘 다 여유로운 일요일 표를 예매했다. 14시 40분에 시작한다.


“엄마 늦었어! 빨리 가야 돼!”

“그러니까 내가 빨리 먹으라고 했지.”

“나는 빨리 먹었어. 엄마가 잠을 더 자서 그런 거잖아.”

“나는 다 준비하고 잠깐 눈만 붙인 거야. 네가 밥 다 먹고 또 더 먹었잖아.”

“엄마가 자니까 더 먹은 거지.”

 

현재 시각 14시 30분. 극장까지 버스를 타고 가려면 최소 30분 전에는 나와야 안전빵이다. 지금의 최선은 택시다.


“안녕하세요. 롯데시네마요.”, “안녕하세요. 롯데백화점이요.”

 

다행히 단지 앞에 택시가 한 대 서 있어 신속하게 탈 수 있었다.


“정하준, 어차피 극장이 백화점 안에 있잖아.”

“그래. 그런데 극장은 몇 층이야?.”

“8층인가? 8층.”

“그래. 그런데 택시가 8층으로 가? 아니지, 택시는 몇 층 앞에 서?”

“뭐 굳이 따지자면… 1층?”

“그럼, 1층에는 뭐가 있어? 극장이야, 백화점이야? 백화점이지.”

“...”

“그러니까 백화점 가자고 하는 게 맞지. 엄마는 그런 것도 몰라? 정말 나 없으면 큰일 나겠다, 큰일 나겠어.”

“... 말을 말자. 말을 말어.”

“어떻게 말을 말어?”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꾹 다물자 아들은 양손을 번갈아가며 신나게 돌린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말을 말 수 있는 거냐며 둥글게 둥글게 돌린다. 하아, 아들과 말 몇 마디 나눈 것밖에 없는데 벌써 피곤해지려고 한다.


“엄마는 귀칼 개봉하는 것도 나 때문에 알았잖아. 이것도 나 아니었으면 몰랐을 걸.”

 

아들이 귀멸의 칼날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작년 5월 아니 4월 즈음? 그냥 어느 날부터 물의 호흡, 달의 호흡, 해의 호흡 어쩌고 저쩌고 번갈아 외치면서 다 쓴 키친타월 심을 길게 이어 붙인 걸 주인공 탄지로의 검이라며 소파 위를 뛰어다녔다. 이럴 땐 아파트 1층에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몰라? 귀멸의 칼날은 원래 엄마가 먼저 좋아했거든.”

“맞아, 엄마 귀칼 무한의 열차편도 나 빼고 혼자만 보러 갔지. 정말 치사한 엄마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너는 귀칼을 몰랐잖아. 엄마가 예고편 동영상 보여주면서 같이 보러 가자고 했었는데 네가 모르는 거라고 싫다고 그래잖아.”

 

귀멸의 칼날은 자신은 특별할 거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주인공이 거악을 만나 가족을 잃고 고난과 역경을 딛고 수련을 통해 강해지면서 복수를 하면서도 도덕은 지키려는 그런 내용의 전형적인 일본풍 소년 만화다. 확실히 2, 3년 전의 아들이 관심 가질 내용은 아니다. 그때의 아들에겐 포켓몬스터가 전부였다.

 

“그래도 지금은 엄마보다 내가 귀칼에 대해서 더 잘 안다.”

“너는 만화책은 안 봤잖아. 자기도 유튜브로 본 게 다면서. 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유튜브 좀 작작 봐. 핸드폰으로 못 보니까 대놓고 TV로 보더라.”

“엄마가 나한테 재밌는 거 찾아 달라고 시키는 게 더 많거든.”

“그러니까 네가 유튜브를 보니까 내가 찾아 달라고 하는 거잖아.”

“아니지. 엄마가 찾아 달라고 하니까 내가 보는 거지.”

 

이건 아들 말이 조금 맞다. 어깨너머로 같이 보다 연관 영상이 재밌어 보여 재생해 달라고 조른 적도 많으니. 허허, 참 할 말이 없네. 괜히 멋쩍어 먼 산을 바라보니 목적지인 백화점이 보인다.


“하준아, 큰일 났다!”

“왜…? 혹시 설마…?”

“어, 그 설마가 맞는 듯.”

 

지갑을 가지고 나오질 않았다. 나오기 전 화장실에 들르면서 손에 들고 있던 걸 휴지걸이 선반에 올려놨던 것 같은데… 그대로 두었나 보다. 그 지갑 ㄴ밑엔 핸드폰이 놓여 있을 것이다. 지갑과 함께 핸드폰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면 자동이체도 못 하는데.”


요금을 지불할 방법이 없다. 택시아저씨를 생각하면 집으로 다시 가자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여기서 택시를 집으로 돌리면 영화도 제대로 못 보면서 택시비는 배로 든다. 영화 티켓은 이미 환불도 안 되고. 이래저래 영화를 못 보게 된다면 아들은 엄청난 실망을 할 테고. 유난히 과묵한 택시아저씨가 백미러로 조용히 상황을 살피는 게 느껴진다.


“엄마는 맨날 나 핸드폰 안 챙긴다고 뭐라고 하더니 진짜 둘 다 안 들고 나왔어? 또 장난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너는 내 것도 좀 챙겨 주지. 네 것만 잘 챙겼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기 건 자기가 잘 챙겨야지.”

 

시무룩해지려던 아들의 어깨가 의기양양 치솟는다. 다 빠트리고 나온 나와는 다르게 자신은 핸드폰과 지갑을 잘 챙겨 왔으니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웬일로 핸드폰도 풀충전이 되어 있다. 그리고 지갑.

아들의 지갑은 목에 걸 수 있는 디자인으로 튼튼한 방수천으로 되어 있고 3단으로 접힌다. 접힘을 고정하는 찍찍이가 힘이 세서 지갑을 펼칠 때 제법 번거롭긴 하다. 현금 넣고 빼는 게 귀찮다는 말이 나오는 게 무리는 아니다.


“어?! 너 혹시 천 원짜리 줬던 거 안 썼어?”


진짜 집으로 가자고 해야 하나 마른침을 꿀꺽 삼키려는데 아들의 지갑에서 천 원으로 추정되는 색의 종이 모서리가 살짝 삐져나온 게 보였다.  

 

“응. 엄마가 비상금이라고 했잖아. 그러면 비상상황에만 써야지. 그래서 한 번도 안 쓰고 그대로 있는 건데, 왜?”

 

천 원짜리 일곱 장. 이것은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이다.


“하준아, 택시비 좀 내 주라.”

“안 돼. 이건 비상금이야. 비상상황에만 써야 된다고.”

“그래. 비상상황. 지금이 바로 그 비상상황이야!”

 

택시비는 6천1백 원이 나왔다. 살았다.

영화도? 살았다. 엘리베이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1층에서 맞이해 주었고 입장은 무인셀프체크인이라 좌석 번호만 잘 기억하면 되는데 항상 D열 센터를 예매하므로 문제없었다. 상영관 안에 들어갔을 때는 상영 전에 붙는 광고 덕분에 이미 40분을 넘겼음에도 본영화는 시작 전이었다.


“… 우리 팝콘은?”

“팝콘은… 못 먹지. 나 핸드폰도 없잖아. 우리 지금 전재산 구 백 원… 미안해 나 때문에.”


유구무언.

아, 우리처럼 좀 늦게 들어온 다른 팀들이 보인다. 팀 내에서 더 연령이 높아 보이는 팀원이 팝콘을 사러 다녀오겠다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부럽다. 갈증이 나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지만 집에 돌아갈 걱정을 먼저 해야 한다. 7천 원에서 6천1백 원 쓰고 9백 원만 남았다. 아들은 버스카드가 있다. 내가 문제다. 9백 원으로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없다.


“엄마 놀라지 말고 들어 봐.”

“뭐라고? 잘 안 들려. 너무 속삭였어.”

“안 돼, 작게 말해야지. 엄마가 잘 들어봐.”

“… 응.”

“나 사실은 만 원도 있어. 그런데 이건 진짜 비상금인데.”


지난달 삼촌(나의 사촌동생 아들의 오촌) 결혼식에서 만난 이모(결혼한 사촌동생의 여동생)가 우격다짐으로 넣어 준거랜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지금 생각나서 발견했다며 지폐 넣는 지갑 칸 안 쪽에서 접히고 접혀 있던 만원 짜리를 꺼내 보였다.


“팝콘도 비상상황이라고 할까?”

“그럼! 당연하지!”


아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진짜 살았다. 나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심사숙고하여 대답했고 속전속결 오리걸음으로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아들이 지켜온 비상금으로 2천5백 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1천2백 원짜리 생수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캐러멜 팝콘! 5천5백 원 중자를 샀다. 다 사고 남은 거스름 돈 1천7백 원. 내 버스비 1천5백 원을 쓰고도 2백 원이 남을 수 있다.


무사히 임무를 수행한 나는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남은 귀칼을 여유롭게 관람했다. 귀칼 시작의 상당 부분을 놓쳤지만 이미 만화책을 읽어 알고 있는 내용이니 괜찮다.


“엄마는 안 먹어?”

“응. 나는 괜찮아.”


팝콘은 온전히 아들 몫으로 주었다. 평소 아들은 대자도 혼자 거뜬히 먹을 수 있다. 나도 양심이 있지 저 중자 팝콘을 나눠 먹겠다고 나서는 짓은 양아치나 하는 짓이다. 내가 양아치는 아니라고.


“하준아, 이거 받아. 이백 원 남았어.”

“엄마 왜 이백 원을 줘?”

“거스름돈 남은 거야. 네 거야. 받아 야지.”

“아니 왜? 왜 이백 원만 줘?”


아들 덕분에 안전하게 귀가하던 버스 안, 남은 돈 2 백 원을 돌려주려니 거부당했다. 아차 싶었다. 겨우 팝콘 하나 안 먹었다고 나는 양아치가 아닐 거라 안심했다니. 안일했다.

집에 가자마자 아들 지갑에 1만 7천 원, 아니 3만 원을 넣어주어야겠다. 나도 우격다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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