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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Mar 08.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6. 흰머리



6. 흰머리


 

“성공, 성공. 오늘 드디어 자를 수 있겠네요.”

“아, 진짜요?”

 

4년간의 방치가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


현재 나이 45살에서 4년 전 여름, 지겹게 내리는 여름비에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새치머리를 감추려 뿌염을 하러 가서 방치는 시작됐다. 물론 새치머리와 여름비는 상관없다.

 

“이십칠… 이십구, 우와 너 30cm야.”

“우와, 진짜? 너는?”

“나? 네가 재 줘야 알지.”

“OK, 오예! 너… 28cm. 야호, 내가 이겼다. 떡볶이, 떡볶이.”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하하하. 선생님, 저희 가위 좀 빌려도 되죠?”

 

선생님 혼자 운영하는 작은 미용실, 손님용 작은 소파에서 동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 명이 재잘재잘 떠들며 서로의 머리카락 길이를 재고 있었다. 아직 초등학생 티가 남아 있지만 언니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청소년, 성장의 불균형이 폭발하는 시기의 아이들이었다. 참 예뻤다.


“오늘 뿌염도 한다고 했죠?”

 

미용실 선생님은 내 머리카락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오늘 내려야 할 조치를 되새기고 있었다. 머리 길이는 항상 하던 대로 목 중간쯤으로 잘라 줄 거고, 약 3cm 자란 뿌리 쪽 새머리는 그 아래 염색모와의 색상차를 없애고 하얗게 드러난 새치머리를 가리기 위해 뿌염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선생님, 그런데 쟤네는 뭐 하는 거예요?”

“누구? 쟤네?”

“네, 왜 머리를 묶고 잘라요?”

 

숨만 쉬어도 즐거워 보이는 학생들이 이미 고무줄로 묶여 있던 걸 다시 풀어 정성스레 빗질을 하더니 더 단단히 묶고서 서로의 꽁지머리를 잘라주고 있었다. 긴 꽁지머리를 자르니 숱 많은 머리카락들이 와르르 퍼지면서 삼각김밥 같은 단발머리가 되었다. “깔깔깔깔.” 둘의 웃음보가 터졌다. 서로의 모습이 웃겨 죽겠다며 눈물까지  닦아가며 웃는다.


저 정말 예쁘고 귀여운 학생들 손에 들려 있는 숱이 많은, 윤기 나는 건강한 머리카락은 누구의 머리카락과는 엄청 달랐다. 괜스레 푸석푸석하기만 한 내 머리카락을 흘깃거리게 된다.

 

“아, 쟤네? 쟤네들 좋은 일 하는 거예요. ‘어머나 운동’이라고, 소아암 걸린 ‘어’ 린이 한 테 가발 하라고 ‘머’ 리카락 기부(‘나’ 눔)하는 거. 쟤는 세 번 째고 쟤는 이번이 처음일걸요, 아마?”

 

‘어머나’? 우와, 듣자마자 본전생각부터 났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머리카락 좀 팔아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니! 지금 머리끝이 대략 견갑골 위깨에 닿아 있으니 몇 달만 참으면 되겠는걸. 간단하군. 공짜로 좋은 일 하고 허세 부릴 수 있다. 꽤 괜찮은데.


“그래요? 선생님, 그럼 저도 해볼까요?”

“하하하, 손님도 좋은 일이 하고 싶구나?”

“네. 음, 안 될라나? 제 머리카락은 너무 가늘고, 또 새치도 많고. 나이 많은 머리는 안 받아줄라나?”

 

가르마 중심으로 새로 돋은 빽빽이 보이는 새치머리가 더 눈에 띈다.

 

“역시, 어렵겠죠?”

“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흰머리, 나이 다 상관없어요. 그렇지?”

 

선생님이 잘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학생 중 한 명이 끼어들었다. 머리카락 기부를 3번 했다는 친구가 나와 선생님의 대화를 들었나 보다. 아니 처음 한 친구인가? 그런데 학생, 이거 흰머리 아니고 새치머리인데.

 

“그래. 서진아, 여기 손님한테 네가 잘 좀 설명해 드려라. 그냥 너희만큼 기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네, 그럼요. 길이 25cm 이상만 되면 OK에요.”

“야아, 방서진. 그것도 말해야지, 염색.”

“아, 맞다! 선생님, 대신에 염색머리는 안 돼요. 그거 가발 만들 때 머리카락 후가공 해야 돼서 염색모는 안 받아줘요.”

“그래? 어떻게, 그러면 우리 손님 뿌염은 하면 안 되겠는데?”

 

선생님의 표정이 나의 결정을 궁금해했고 내 표정은 곤란해졌다. 아, 세상에 완벽한 공짜는 없구나. 염색모가 안 된다는 말은 이 프로젝트가 몇 달만 참으면 되는 간단하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손님 이거 염색모 다 쳐내고 25cm 더 기르려면 한 3, 4년은 걸리겠는데요?”

“에엥? 4년? 그렇게 오래요?”


다시 말하면, 날로 거저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간단하게 여겼던 일이 사실은 4년이나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라는 뜻이 되고, 더 중요한 건 그 기간 동안에는 감추고 싶은 새치머리를 감출 수 없게 된다는 말이 된다. ‘백발마녀전’이라고 저 어린 학생들은 결코 모를 영화 속 주인공 ‘임청하’처럼 흰머리를 휘날려야만 할지도 모른다. 아, 새치머리! 좋은 일은 그냥 포기할까?


“아줌마, 해 보시게요? 꼭 해보세요. 이거 기분 되게 좋아요.”

“응? 뭐라고?”

“기분 되게 좋다고요. 정말 좋아요.”

 

이번에 처음 해봤다고 한 학생인가? 방서진 학생의 친구가 삼각김밥 단발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활짝 웃으며 말한다.

 

“오, 진짜 진짜? 그럼 오늘부터 하시는 거예요?”

“응?”


방서진 학생이 질 수 없다며 자신의 단발머리를 같이 흔들며 거든다. 아니, 얘들아 너희들 그렇게까지 바람을 잡으면 내가 어떡하니.


“그, 그런가? 그, 그럼 해 볼까요? 선생님?

“아유, 그럼 오늘부터 시작이네. 그럼, 염색모 남은 거는 빨리빨리 쳐버려야 편하니까 오늘은 더 짧게 자를게요. 턱선, 귀밑?”

 

견갑골과 어깨 위를 왔다 갔다 하던 머리끝이 그날엔 귀밑까지 올라왔다. 학생들 덕분에 뿌염은 하지 않았다. 3cm 이상 허락받지 못했던 새치머리는 그 이상을 허락받았다. 앞으로 이미 염색된 머리카락 부분을 잘라내고도 25cm 길이의 머리카락을 만들어내려면 열심히 방치해야만 한다.


그리고 드디어 내 나이 45살, 여름의 여운이 덜 가신 초가을.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에 종종 욱하고 올라오던 염색의 유혹을 여러 차례 이겨내니 마침내 머리카락 끝이 허리깨까지 내려왔다. 짙은 흰머리 한 움큼이 길게 드리워진 꽁지머리를 묶고 미용실을 찾았다. 염색을 일절 안 해 드러난 원래 머리카락색은 검은색에 가까워 잘 자란 흰머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


“아이고, 우리 손님. 요새 자주 보네.”

 

머리카락 방치는 열심히 해냈지만 미용실까지 방치하진 않았다.

 

“선생님, 빨리빨리 길이 재보세요. 지난달에 왔을 때 한 달만 더 기르면 될 거 같다고 했잖아요.”


지난달에 왔을 때 24cm였다. 지지난달에 왔을 땐 23cm였고.


항상 하나로 묶는 머리를 했던 터라 어느 정도 긴 머리에는 부담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그게 아니었다. 항상 하던 길이를 넘어선 머리카락은 상상이상으로 거추장스러웠다. 20cm 때 즈음인가? 그때가 고비였다. 정말 다 포기하고 싶었다.


“20cm면 진짜 얼마 안 남았잖아요. 3년도 넘게 참아놓고, 그러지 말고 몇 달만 더 참아봐요.”

선생님의 권유에 거의 우는 소리로 징징거렸다.

“히이잉, 그럴게요.”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생각났다. “맞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이거 염색모도 받아준데요. 원래 그랬던 건지 아니면 최근에 바뀐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염색모도 받아준데요.”

“아아, 그래요?”

“선생님, 염색이라도 할까요?“

 

며칠 전이었나? 아니, 몇 주 됐나? 유난히 내 흰머리가 도드라져 보인다던 친구가 내 사정을 듣더니 아니라고 했다. ‘어머나 운동’에 염색모도 받아준다고. 인터넷으로 확인까지 시켜줬다. 사이트에는 염색뿐만 아니라 펌도 받아준다고 나와 있었다.


“에이, 그래도 하면 안 되지.”

“네?”

 

염색이란 단어에 내 눈의 반짝임을 미용실 선생님이 단박에 껐다.


“지금은 하면 안 되지. 길어야 한 두 달? 세 달? 그만큼만 지나면 잘라낼 머린데 돈 아깝게 염색을 왜 해요. 하지 마요.”

“그럼 그냥 자를까요?”

“으이그 어여 갔다가 좀만 기다려서 다시 와요.”


그렇게 오늘이 왔다. 지금 이 순간, 선생님의 대답이 너무 기다려진다.

 

“오오 어머나.”

“왜요?”

“성공, 성공. 딱 25cm. 오늘은 자를 수 있겠네요.”

“아, 진짜요? 와, 진짜 살았다. 진짜 진짜 살겠네. 선생님 어서 잘라주세요.”


선생님은 그때 그 학생들처럼 이미 묶여있는 머리를 풀어 곱게 빗어 다시 묶고 가위를 들었다. 바짝 묶은 고무줄 바로 위를 자르면 된다. 괜히 두근거렸다.


서걱.


가위질 소리 한 번. 그 소리에 온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갑자기 머리가 쑥 올라가고 어깨가 훅 내려가 목이 길어진다. 머리카락 한 묶음 잘랐을 뿐인데 엄청난 짐을 덜어낸 것처럼 어깨가 가벼워졌다. 긴 머리카락 무계가 버거워 바짝 곤두섰었던 두피가 개운해졌다. 선생님 손에는 얼핏 나이 든 말의 꼬리 같은 머리카락 묶음이 들려있었고 짧아진 머리는 좌우로 촤르르 펼쳐졌다. 그 예쁜 학생들처럼 삼각김밥 머리까진 안 되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짧은 머리가 어색하면서도 스스로도 제법 귀엽게 보인다.


“최소 5년은 젊어졌네요. 확실히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네. 아이고 나도 다 시원하다.”

“선생님도요? 히히, 저도요.”


잘라낸 머리카락만큼 홀가분하면서도 선생님 손에 예쁘게 다듬어져 가는 짧은 머리를 보니 그동안 긴 머리가 어울리지 않았다는 걸 사뭇 깨닫는다. 사람 보는 눈은 거의 다 비슷하다더니 역시나 이제는 긴 생머리가 어울릴 나이는 확실히 아닌가 보다. 어떤 복잡한 마음, 이것이 진정 시원섭섭한 거구나.


“이제 끝인가?”

“이거요? 아, 완전히 끝나려면 조금 또 남았어요. 택배로 먼저 보내고 ‘어머나‘ 사이트에서 운송장 입력하고 신청서까지 작성해야 다 끝나요.”

“에이~ 그럼 다 끝난 거네.”

 

헤어컷도 거의 끝나간다. 선생님은 숱 치는 가위로 헤어컷을 마무리하면서 중요한 걸 물어봤다.

 

“어떻게 염색도 같이 할 거예요?”

“염색이요? 아, 염색하는데 오래 걸리죠? 시간이 얼마나 걸렸더라?”

“아이고 그새 다 까먹었구나? 좀 걸리지.”


어떡하지? 고개를 살짝 저어봤다. 짧아진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흰머리가 챠르르 움직인다. 한동안 흰머리가 아니라고 새치머리라고 열심히 불렀던 그 흰머리들. 흰머리는 얼떨결에 시작한 ‘어머나’ 운동으로 4년간의 방치기간 동안 건강하고 튼튼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그거 몇 년 봐왔다고 선명하게 보이는 흰머리가 더 이상 거슬리지 않는다. 예쁘게 컷팅된 검정에 가까운 원래 머리색과 회색에 가까운 흰색이 제법 잘 어울린다. 분명 머리카락 자를 때 예쁜 골드브라운으로 염색할까 싶었는데 다시 보니 브라운색이 어색할 것 같다.


“음, 선생님, 저 염색 안 하려고요. 그래도 되죠?”

“아유, 당연하죠. 저도 손님 머리카락 건강해진 거 보니까 염색 권하질 못하겠어요. 굵기도 많이 굵어지고. 그래서 그런가 머리숱도 많아졌네.”

“그렇죠?”


사실 그렇다. 숨겨야 할 새치머리 흰머리는 그냥 한 가닥 하얀 머리카락일 뿐 별개 아니었다. 좋은 일도 하고 스스로 집착했던 짐도 하나 털어냈다.


“오늘 진짜 드라이 예쁘게 해 줄게요. 그리고 사실 이 정도 새치는 티도 안 나요.”


선생님은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머리 감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머리를 말아줬다. 혼자서는 결코 이렇게 못하니 어느 순간 또 짧은 꽁지머리를 묶겠지.


동네를 거닐다 보면 그 중학생 두 명을 종종 지나치게 되는데 해맑은 학생 때에 비해 지금은 자신이 만든 건지 남이 만든 건지도 모를 세상고민을 몽땅 다 어깨에 짊어진, 이제 진짜 언니 같은 고등학생의 모습이었다. 그 짐들은 좋은 기회를 만나 덜어낼 수도 있고 혹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더 안고 가기도 할 것이다. 인사할 만큼 친숙하진 않아 혼자 속으로만 응원하며 지나갔다.


좋은 일을 할 때까진 몰랐다. 좋은 일은 허세가 아니었고 하기 전보다 하고 났을 때 더 좋아지는구나. 공짜에도 대가는 따른다더니 미용실에서 나와 복도창문에 비춘 짧아진 머리를 자꾸 쳐다보게 된다. 좋은 일까지 하고 이런 대가까지 얻다니 일거양득. 이루 말할 수 없이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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