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프 마라톤
대학교 동아리 가입 신청서 ‘특기’ 란에 당당히 달리기라고 적는 애가 있었다. 그걸 옆에서 말없이 구경만 하던 미진은 무슨 특기가 '달리기' 냐며 별나다고만 여겼는데 ‘취미’ 란까지 달리기로 채우는 걸 보고 그 애와 친구 먹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베프가 된 지 4년 후,
“절교야. 하태정. 헤어져! 헤어져!”
미진은 철퍼덕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앞서 뛰어가던 태정은 뒤돌아보면서도 발재간은 멈추질 않는다.
“미진. 잘만 뛰었으면서 왜 엄살이야.”
미진은 방금 첫 15km를 겨우 완주했다. 다 저 하태정 때문이다.
“이 페이스면 다섯 달 후엔 하프 완주 가능하겠어.”
“그건 네 얘기고 나는 안 할 거야! 내가 네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이건 너무 개고생이야. 안 해! 못 해!”
라고 큰 소리를 빵빵 쳤건만, 미진은 D-day 이른 오전, 마라톤 대회 배번을 달고 태정에게 두 무릎을 내어주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미진의 무릎에 테이핑을 해 준다. 안쪽 종아리에서 허벅지 바깥쪽으로, 바깥쪽 종아리에서 허벅지 안쪽으로 다시 허벅지 바깥쪽을 따라 한 번 더. 친구가 된 태정은 야금야금 본인의 러닝 라이프에 미진을 들여놓더니 세 번의 10km 대회를 참여시키고 드디어 오늘 첫 하프마라톤, 21.0975km에 끌어들였다.
“다른 건 필요 없어. 달리기는 몸뚱아리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다니까.”
얼마 안 가 미진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살도 뺄 수 있다는 태정의 감언이설에 자신이 완전히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 지금 신은 운동화만 해도 대학교 입학 후 큰 맘먹고 산 행사용 정장구두보다 더 비싸다. 양말은 1만 5천 원. 세상에 열 켤레가 아니고 한 켤레에 1만 5천 원짜리라니. 체중은 줄긴 줄었다. 그러나 그 기념으로 입으려던,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예쁜 원피스는 살 수 없었다. 지금 걸친 러닝복 때문이다. 러닝 할 때만 착용하는 고글을 사기 위해선 ‘올리브영 득템 찬스 세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자, 많다고 좋은 게 아니지? 욕심부리지 말고 딱 두 개씩만 챙기자.”
태정이가 ‘에너지 보충제’ 한 포와 ‘에너지 젤’ 두 개를 내밀었다. 지난 10km 대회에서 젤을 너무 많이 먹었다가 옆구리 배가 아파 완주하는데 큰 고생을 했다. ‘위 가스 팽창과 진통 통증’이라고. 그 이후로 젤은 가면서 하나, 반환점 돌고 하나 이렇게 두 개만 챙긴다. 에너지 보충제는 받자마자 입에 때려 넣고 젤은 힙벨트에 핸드폰과 함께 넣었다. 이 힙벨트 태정이와 나간 첫 10km 대회 경품 추천으로 득템 한 거다. 벨트 지퍼를 여닫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태정아, 나 떨려. 긴장되나 봐.”
“뭘 떨고 그래? 그냥 뛰는 거야. 다 알면서 그런다.”
“아니야. 너! 저번처럼 나 끌고 가면 안 돼. 걷고 싶다고 하면 걷게 해 주고 그만 뛴다고 하면 그만 뛰게 해 줘야 돼. 알았지? 약속해, 빨리.”
“약속은 지난번에도 했거든. 와, 날이 좋아 그런가 사람들 진짜 많다.”
이번 마라톤 대회는 참가자에게 기념품도 주고 순위권 안에 들어가면 상금도 준다. 상금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기념품엔 티셔츠도 있고 반바지도 있고 양말도 있고 현장에서 주는 물 완주 메달 등등이 있는데 참가비만큼 다 주는 것 같다. 또, 참가비 100% 전액 기부된다. 소외 계층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인다고 했다. 태정은 이걸로 지난 10km 대회 이후 다시는 마라톤 대회 따위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마음먹은 미진의 마음을 흔들었다. 돈 없는 취준생들이 큰돈 안 들이고도 할 수 있는 좋은 일.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어차피 참가비는 다 내서 기부는 된 거니까 저번처럼 그러지 말자고, 태정아 살살하자.”
“웃기고 있네. 괜한 엄살 피지 말고 야 저기 저 사람 봐봐.”
막 출발한 직후였다. 하나로 뭉쳐 있던 사람이 서서히 앞뒤로 흩어진다.
“야야, 양미진 그렇게 대 놓고 보지 말고. 왼쪽 앞에 살짝 봐, 살짝.”
미진이 고개를 휙 돌리려고 하니 태정이 말려 살짝 곁눈질로 봤다. 거기엔 어떤 여자분이 앞서 뛰고 있었다. 짧은 헤어컷 머리에 흰색 헤어밴드를 두르고 있고, 딱 붙는 형광 연두색 탱크탑에 오렌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키가 정말 작았다. 옷이 화려해서 그런지 피부가 정말 까매 보인다. 그런데… 다리를 절뚝이고 있다. 저 사람 양쪽 종아리와 발목 굵기가 선명하게 다르다. 왼쪽 종아리는 허벅지만큼 굵어 보이는데 오른쪽은 팔뚝만큼 가늘었다. 발목은 훨씬 심해 손목보다 가늘다. 심지어 관절 자체가 내회전으로 돌아가 있다.
“운동화… 양쪽 발 크기가 다른 가 봐.” 미진이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너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조용히 뛰기나 해. 이제부터 말도 아껴야 돼.”
무언가 기분이 숙연해진다. 미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출발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앓는 소리를 해댔으나 태정의 짐이 되기는 싫었다. 그래, 이왕지사 뛰는 거 기록 단축이다.
조금 앞에 있던 흰색 헤어밴드 여자분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속도를 조금씩 더 내는 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미진은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호흡했다. 주변에 경거망동 말자. 괜히 오버페이스로 흥분만 수 있다. 초반에 에너지를 아껴 놓지 않으면 후반부에 체력이 급격히 감소할 수 있다. 일단 현재 5분 40초 페이스를 유지하자. 잘하면 2시간 안에 완주할지도 모른다. 막상 달리기 시작하니 엄청 긴장했던 것에 비해 자신감이 붙는다.
5km마다 있는 급수대 중 첫 번째 급수대가 보인다. 아까 보았던 까맣고 키 작은 흰색 헤어 밴드 여자분이 물컵을 받아 벌컥벌컥 마시며 달리고 있다. 마라톤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물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게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저러다 ‘위 가스 팽창과 진통 통증’이 올 수도 있고 화장실이 급해질 수도 있다. 미진은 슬쩍 태정을 쳐다봤다. “왜?” 미진의 시선을 느낀 태정이 무슨 일인지 묻는다. 흰 헤어밴드 여자분은 이미 급수대를 떠났다.
“저 흰색 밴드 여자분 말이야.”
“저 사람? 왜?”
“… 아니야. 아무것도.”
미진이 태정을 불러 놓고 말을 거뒀다. 어차피 말해 봤자 “너나 잘하세요.” 라며 신경 끄라고 할 게 분명하다. 두 사람은 물을 안 마시고 지나쳤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미진은 6km 즈음부터 호흡이 잘 안 터지고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슬슬 몸에 슬로우가 걸린다. 태정과 나란히 뛰고 있었는데 지금은 앞 뒤로 뛰고 있다. 태정이 앞이다. 일정한 속도로 들숨과 날숨이 오가는 태정의 호흡이 유난히 큰 소리로 귓가에 때려 박힌다. 미진은 이 소리의 볼륨을 놓치기 싫었다. 구경 나온 행인들이 “파이팅!”을 외쳐준다. “파이팅.” 미진도 파이팅을 읊조렸다. 그들에게 답도 해주고 자신과 태정도 응원하는 의미에 서다.
8km쯤 되니 호흡이 조금 돌아왔다. 네이비색 싱글렛을 입은 남성분이 흰색 밴드 여자분을 앞지르는 게 보였다. 이어서 민트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여자분도 흰색 밴드 분을 앞지른다. 미진도 살짝 앞질러볼까 해서 다시 나란히 뛰고 있는 태정을 슬쩍 봤다. 태정과 눈이 마주치니 미진이 속도를 내 살짝 앞질렀지만 바로 따라 잡혔다.
“미진, 오버하지 말자.”
10km 급수대, 미진과 태정 둘 다 물을 한 모금만 마시고 컵을 내렸다. 흰색 밴드 여자분은 또 다 마신 것 같다. 저러다 진짜 방광 터질 수도 있는데.
드디어 반환점이 보인다. 미진과 태정은 반환점에서 아까 흰색 밴드를 앞질렀던 네이비색 싱글렛 남성분이 보이길래 추월해 따라잡았다. 먼저 반환점을 돌아오는 몇몇 사람들이 미진과 태정의 옆을 지난다. 방금 전 앞질렀던 네이비색 남성분의 발소리가 탁탁탁 뒤통수 너머로 가까워진다. 미진은 속도를 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네이비 분한테 잡히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태정도 속도를 냈다. 미진은 반환점에서 바로 앞에 달리던 흰색 밴드 분까지 따라잡아보려 했으나 방금 전 네이비색 때문에 힘을 써서 그런가 속도가 쉬이 나질 않았다. 일단 보내주자. 계획대로 에너지젤 하나를 먹었다.
아직 11km나 남았다. 하프가 이래서 힘들구나. 훈련할 때는 그냥 한 방향 전진으로만 향하며 단순히 10km에서 2배가량 된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현장에선 왔던 만큼 굳이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들었다. 그러나 아까 관통했던 경치 속으로 반대로 들어가니 같은 길이 맞나 싶을 만큼 새로워 쓸데없는 허탈감은 금세 사라졌다.
“미진아, 괜찮아?”
정신이 번쩍 든다. 미진은 자신의 정신이 아득해졌었는지도 몰랐다. 덕분에 왼쪽 종아리에 슬슬 쥐가 올라오려고 하는 것도 느껴졌다. 태정이 미진의 표정변화를 읽었다. 미진은 고개도 못 돌리고 손만 대충 흔들어 보였다. 태정에게 괜찮다고 흔들어 보인 건데 결과적으로 응원해 준 봉사자분들에게 답한 게 되어 더 큰 응원을 받았다. 이런, 힘을 내야만 한다. 눈에 힘을 주니 흰색 밴드 분이 조금씩 멀어지는 게 보인다. 미진은 속도는 나지만 자꾸 옆으로 기울어져 뛰는 그녀가 걱정이 되면서도 저분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17km 이후로 페이스가 점점 떨어진다. 미진은 주변과 자신이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숨 쉬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 가. 태정이 미진의 등을 툭툭 쳐 준다. 잠깐 멀어졌던 흰색 밴드 분이 다시 시야에 들어온다. 그분의 불편한 오른 다리가 거의 왼 다리에 끌려가는 것 같다. 내회전 된 오른 발목은 아무 힘이 없어 보인다. 다리 때문인지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골반과 어깨가 더 기울어졌다. ‘그래, 저분도 포기를 안 하는데 나도 힘내자!’ 미진도 태정의 등을 툭툭 쳐줬다. 남은 에너지 젤을 입에 넣었다.
19km, 2km가 남았다. 이 구간이 제일 버겁다. 뇌와 몸이 따로 논다. 뇌는 뇌 대로 말 안 듣는 팔다리 때문에 포기할지 말지 미친 듯이 고민하는데 팔다리는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애처럼, -실제로 팔다리는 아무 생각이 없다-, 제멋대로 움직인다. 이럴 땐 걷는 게 달리는 것보다 빠를 것 같다. 태정의 손이 조용히 미진의 등에 닿는다. 미진은 저 손에 기대지만 말자는 심정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급기야 팔다리를 따라 뇌마저 생각이 사라진다. 탁, 탁, 탁 네이비색 분의 발소리인가? 미진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저 발소리에게만큼은 따라 잡히고 싶지 않았다.
“300미터! 전력질주 하자!”
태정이 갑자기 전력질주로 뛰기 시작한다. 주변의 공기가 훅 바뀐다. 300미터라고? 미진도 지친 다리에서 기운을 짜냈다. 자신이 달리는 좀비처럼 보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결승점 가까이엔 이미 빠르고 느린 좀비들이 꽤 많다. 유난히 신경 쓰이던 흰색 밴드 분의 특이점이 평범해 보일 지경이다.
“이제 허리 펴! 웃어, 웃어!”
결승선이다. 태정의 외침에 미진은 풀파워를 짜내 두 손을 뻔쩍 들어 보였다. 완주했다! 해냈다! 신난다!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결승테이프 따윈 없다. 미진은 완주를 확신한 순간, 드디어 걸어도 되는구나 싶어 걷다가 어느 순간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누워 버렸다. 계속 앞만 보고 뛰어 그런지 고글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낯설다. 아, 고글 렌즈색 때문인가. 양 갈비뼈가 감싼 몸통이 두 세배쯤 부풀다 수축한다.
“야, 미진. 일어나. 완주 메달 받아서 기념사진 찍으러 가자. 배도 고프니까 빨리 일어나.”
미진은 아직 말할 기운이 남아 있는 태정이 대단해 보였다. 페이스 메이커. 미진은 태정이 자신을 그녀의 페이스 메이커라고 불러주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항상 뒤처지면 앞에서 끌어주고 오버 페이스 땐 뒤에서 진정시켜 주는 건 태정인데 그녀는 미진에게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해 준다.
“뭐야? 미진? 울어?”
“아니.”
미진은 눈의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바닥에서 불이 난다. 쥐가 올라오려던 종아리가 터질 것 같다. 그제야 주변에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며 완주한 러너들이 눈에 들어온다. 네이비색 싱글렛 분도 민트색 반팔티 분도 땀범벅이 된 얼굴로 웃고 있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저기 봐, 그 흰색 밴드. 왜 안 보이나 했는데. 우리보다 먼저 들어왔나 봐. 메달 받아서 간다.”
“어? 진짜? 어디, 어디?”
완주 메달을 주는 부스 옆 편으로 메달을 걸고 가는 흰색 밴드 분의 뒷모습이 스친다. 홀로 참가했는지 주변에 아무도 없다. 달리는 중 물을 많이 마시는 것 같아 걱정까지 했었는데 괜한 기우였나 보다. 기념품 중 하나인 에너지 음료를 거침없이 마시고 있다. 걷는 것도 다르게 보일 뿐 이제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거 봐, 미진. 쓸데없이 쫄았지? 하프마라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라고. 다음엔 풀 뛰어 보자.”
“태정아 너 이번에 여유 있게 뛰었어?”
“아니, 사실 나도 말로만 큰소리치는 거지. 여러 번 위태위태했어.”
“나도… 나도 그랬어, 태정아, 나 진짜 죽기 살기로 뛴 거야.”
둘은 초창기 좀비같이 엉금엉금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 이상 속도를 내는 건 불가능했다.
“미진, 사실… 그거 알아?”
“뭐?”
“나 사실 저 흰색 헤어밴드, 저분. 여러 번 추월하려고 했었다.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못 했어. 안 되더라. 몇 걸음, 몇 발자국만 내딛으면 될 거 같은데 그 조금이 안 되더라고.”
“맞아… 그러고 보니 나도… 우리 저분 본 이후로 계속 뒷모습밖에 못 봤어. 지금도… 따라잡을 수가 없어.”
둘은 완주메달을 목에 걸고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흰색 헤어밴드의 여자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 기록… 기록은 아주 중요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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