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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Apr 12.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13. 양갈비 파스타



13. 양갈비 파스타



[나 회사 그만둬.]

 

지운으로부터 톡이 왔다.


[뭐? 진짜?]


홍주는 지운의 톡을 보자마자 바로 답톡을 보냈다. 덕분에 할 일은 해야만 하니 겨우 일어나긴 했으나 미처 쫓아내지 못한 아침잠이 싹 달아났다. 지운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석 달 전쯤이었나? 같이 점심을 먹고 지금 진행 중인 각색작업의 가이드 회의를 진행했었다.


홍주와 지운이 처음 만난 건… 막연히 20년은 되었으려나 생각했는데 정확히 따져보니, 맙소사, 23년 전이다. 둘 다 뽀시래기 대학생이었던 시절, 애니메이션이란 걸 해보겠다고 여기저기 워크숍을 기웃거릴 때 처음 얼굴만 익혔다. 이후 홍주는 후반 합성 Staff으로 지운은 라인 PD로 첫 장편 애니메이션 이력을 시작하면서 제대로 친구가 되었다. 둘이 막역한 사이가 된 것은 그다음 진행한 케이블 드라마용 에필로그 애니메이션 작업부터다. 홍주는 애니메이션 연출 담당, 지운은 메인 PD였다. 그리고 둘은 정말 엄청 싸웠다.


“미친 거 아니야! 너는 왜 이딴 말을 듣고 오냐? 나는 감독님이 했다는 말들, 이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왜 몰라? 감독님은 좀 더 멀리서, 분위기 위주로 가자는 거지.”

“그러니까 알지만 알아도 그게 말이 되냐고! 그래서 콘티 회의를 여러 번 했잖아. 입에서 단내 나게 설명도 했고. 그렇게 결정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고! 이게 우리가 무슨 연기자들 연기하는 것처럼 테이크 한 번 갈 때마다 휙휙 감정표현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작업이 아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뭔데? 지금 감독 말은 다 엎고 다시 하라는 거잖아. 콘티가 리허설이란 거 이해한다면서?”

“그렇지. 그때는 그렇게 말했지. 나도 기억나.”

“이런 식이면 콘티를 다시 그려도 이해를 못 한다는 말이잖아! 안 되겠어. 그 감독 직접 만나봐야겠어!”

 

알고 보면 이 대화의 8할은 일방적인 홍주의 고성방가지만 홍주는 이걸 싸움이라 명명한다. 왜냐하면 홍주의 주장은 한 번도 관철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홍주는 매번 큰 소리를 뻥뻥 치며 감독에게 찾아가 한따까리 할 것처럼 으르렁거렸음에도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프리프로덕션을 무시한 감독의 무리한 요구사항도 결국 수용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마감도 한 번 어긴 적이 없었다. 모두 가운데서 피곤함에도 끝까지 유연하게 대처해 준 지운 덕분이었다.


“안 되겠어! 배고파!”

 

오전 회의(또는 언성, 싸움)의 끝엔 매번 홍주의 배고픔이 자리 잡았다.


“그래? 뭐 먹을까? 고등어? 제육?”

“음… 고등어! 청국장?”

“아니, 고등어.”

“그래, 고등어.”

 

훗날, 이 팀에서 배경미술을 담당해 주었던 미술팀장님은 그렇게 푸닥거리를 하다가도 시계 한 번 아니 보고 점심시간을 정확히 맞춰 신속하게 메뉴를 선택하는 두 사람의 팀워크만큼은 높이 평가해 주었다.


더 시간이 흘러 홍주는 어느 게임회사의 애니메이션팀으로 옮겼고 지운은 어느 출판사의 웹툰, 웹소설 기획팀으로 들어갔다. 이후 무언가 꿈과 희망으로 가득할 것만 같았던 애니메이션 세계가 점점 출퇴근을 위한 빡 센 콘크리트 회사로만 느껴질 무렵 홍주는 아예 인터넷 관련 디자인 회사로 이직했다. 출판사의 지운이 이직 이유를 물었고 홍주는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거라면 굳이… 반드시 애니메이션이 아니어도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답했다.


이후 홍주와 지운은 몇 년을 서로 경조사나 챙기면서 요즘 재미있는 영화나 웹툰에 관한 잡담으로만 가득 찬 톡만 주고받았다.


[홍주, 바쁘지? 각색 하나 해 볼래?]

[ㅇㅇ 바쁘지. 각색? 무슨 각색?]

 

지운으로부터 갑작스러운 각색 제의가 들어왔다. 물론 이전에도 틈틈이 이런저런 피드백을 주고받곤 했지만 제대로 된 제안은 처음이었다.


[웹소설을 웹툰으로 만드는 중간 각색. 너 그거 한 번 해 보자. 저번에 오디오 드라마 공모전도 결과 좋았잖아.]

 

홍주가 디자인 회사를 다니면서 작업한 짧은 글이 어느 작은 플랫폼 오디오드라마 공모전에서 1등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지운의 공이 큰데 홍주가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며 구시렁거리니 그럼 뭐라도 어서 써서 어디든 제출해 보라고 닦달 아닌 닦달을 해댔었기 때문이다. 하긴 지운은 이전부터 성실히 디자인회사에 출퇴근하는 홍주에게 왜 엉뚱한 데(?)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냐며 이미 꾸준히 닦달해오고 있었다.


각색 제의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주는 회사에 연차를 쓰고 지운이 일 하는 회사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지운이 소개해준 담당자를 만나 열심히 준비해 간 전체적인 각색 방향 계획서와 시놉시스, 회차별 트리트먼트를 설명했다. 다행히 첫 회의는 꽤나 긍정적이었다. 담당자 연호님은 매우 친절하여 홍주가 놓친 부분이 있으면 먼저 짚어주었고 원작 작가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설정에 관한 주요 팁도 알려 주었다.


“홍주야, 배고프지?”

“어… 어? 어.”

 

회의를 마무리할 무렵, 연호님을 소개만 해 주고 나갔던 지운이 돌아왔다. 이제 막 시작한, 햇병아리 신입 각색작가인 홍주는 그냥 영수증 청구가 아닌 기획팀의 대외비로 잡힌 지출에 포함된 예산으로 점심을 먹었다. 깔끔한 한정식집이었다.


아, 홍주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 제법 적응할 무렵, 그녀가 다니던 디자인회사가 망했다. 홍주는 크게 놀라진 않았다. 이전에 애니메이션 회사들도 몇 번 망하는 걸 봐왔는데 망하지 않을 것 같은 회사가 망하는 건 못 봤다. 지운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언제까지 일하는데? 연호씨도 아는 거야? 어제도 아무 말없었는데.]

 

홍주가 서둘러 컴퓨터 전원을 켰다. 생계를 위해 프리랜서 디자이너로도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겐 집이 일터다. 그러니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것은 일종의 출근이다. 현재 인연을 맺고 있는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은 일전에 다니던 망한 회사 덕분에 인연을 맺었다. 여러 번 엎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색일도 계속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어제도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물론 그제도, 그끄저께도. 매우 규칙적으로 늦은 새벽에 잠들고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가 다시 졸리면 낮잠을 나누어 자는 생활을 하고 있다. 홍주는 프로 쪽잠러다.


[지운. 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뭐? 너는 어디 아프냐?]

[나? 나야 술도 안 하고 담배도 끊고, 완전 무결점 건강인이지.]

[나도야. 나도 아픈 데 없어.]

 

아무리 용가리 통뼈를 고아 삶아 먹은 것 같은 녀석이어도 이제는 월요일에 출근해서 일요일에 퇴근해도 끄떡없을 나이는 너도 나도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 꼭 짚고 넘어가야 했다. 휴, 홍주는 일단 안심했다.

 

[그럼 너 퇴사 전에 너네 회사 한 번 가야겠네.]

[그렇지. 와야지.]

[언제 갈까?]

[이 달까지 근무니까 이 달 안에만 오면 되는데 혹시 모르니까 빨리 오는 게 좋지.]

[내일? 모레?]

[모레.]

 

홍주는 담당자 연호씨와 메신저와 전화 통화만으로도 충분히 의견교환이 가능하니 당분간 오프라인 회의는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러 수고를 들여서라도 일할 날이 얼마 안 남은 현 지운의 회사에 방문을 해야겠다.


[그거 먹자! 지난번에 그 양갈비 파스타. 그거 먹을래. 내 돈 주고 못 사 먹는 거.]

[ㅇㅋ 더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그럼 거기서 스테이크도 시켜.]

[ㅇㅋ 그럼 스테이크 콜.]

 

척하면 척이다. 홍주는 지운의 퇴사기념 회사카드 지출에 크게 기여하기로 했다. 십여 년 전이었다면 홍주는 일당 백인분도 해치울 수 있었다. 회사는 홍주가 옛날의 홍주가 아닌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 물론 알려줘 봤자 어이만 없어하겠지만, ㅋㅋㅋ.


[음, 그냥 회 먹을까? 고기?]

[아니야. 양갈비에 스테이크.]

[ㅇㅋ]


지운은 이직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작지만 매력적인 애니메이션 회사로 새 출근을 할 예정이란다. 홍주보다 먼저 애니메이션을 떠났던 지운이 다시 돌아가는 셈이다. 덕분에 홍주도 마음속, 꺼놨던 애니메이션 불이 자꾸 깜빡깜빡 켜지고 꺼짐을 반복하는 걸 느꼈다.


[그래도 아니야. 나는 애니메이션은 이제 못 해. 하나도 못 할 거야. 다 까먹었어.]

[그래. 그래도 장담은 하지 마라.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너도 잘 알면서 그런다.]

[아, 몰라. 일단 장담하고 나중에 말을 바꾸지 뭐.]

[그래, 그렇게 살려고 그렇게 살아서 그렇게 사는 사니까.]

[맞아, 이렇게 살려고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사는 거니까. ㅋ 파이팅이다.]


지운은 흐름은 만들면서도 주변에 물 한 방울 튕기지 아니하고 고요했다. 속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한결같이 한 곳에 고인 적도 없었다. 덕분에 홍주도 물은 좀 튕겼을지언정 한 곳에 고여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 지운과의 차이점이라면 지운은 멀리 보고 흐르고 홍주는 코앞만 보고 흐른다는 점일까? 물론 따지고 들면 차이점은 이보다 훨씬 더 많겠지.

일단 홍주는 친구가 기꺼이 베풀어 줄 코앞의 만찬을 즐겁게 즐길 거다.


[와인도 먹겠다. 어차피 이동은 지하철.]

[ㅇㅋ 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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