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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Apr 19.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14. 쿠로미 Kuromi



14. 쿠로미 Kuromi



으아아아아아! 아이의 오른 소매와 옷 앞판이 노랗게, 아주 샛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하여간 꼭 이러더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하얀색 옷을 입혀 보낸 날엔 무사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아니이이, 최주아가 먼저 새치기를 해가주고오오오.”

“아니 그럼 옷이라도 갈아 입지. 학원도, 하루종일, 그 꼴을 해가지고 다닌 거야?”

“응. 이히히히.”

 

아까 낮에 점심을 먹고 나서 노곤노곤하게 졸음이 몰려올 때였다. 오후 근무를 위한 카페인을 바로 마실 것인가 일단 참았다가 일을 좀 하고 잠이 더 쏟아질 때 마실 것인가 고민하며 눈이 가물가물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려는데 딸 도연이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바로 잠이 확 깼다.


“어머!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 “네, 안녕하세요. 도연이 어머님, 통화 괜찮으신가요? 혹시 바쁘신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선생님 아니에요, 아니에요. 통화 괜찮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주신건지...?”

--- “아, 그게요 어머니… 다름이 아니라…”

 

도연이는 엄마인 선경이 보아도 아주 쉬운 애는 아니다. 작년 4학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노래를 만들어 불러 담임 선생님께 몇 번 꾸지람을 들었었다. 그랬던 노래 시즌을 두어 달만에 끝내더니 이번엔 다리 찢기 일등을 할 거라고 했다. 다리 찢기를 잘해야 태권도 발차기가 멋있게 된다고. 결국, 같은 반에 정말 유연한 발레 학원엘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보다 더 찢어 보이겠다고 막무가내 힘으로 스트레칭을 하다가 안쪽 허벅지 인대를 다친 적이 있었다. 그날 제대로 걷지도 못해 선생님 걱정을 얼마나 시켰던지.

그래도 장난이 심해 그렇지 친구들과는 큰 싸움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제법 안심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 “어머니… 도연이가 점심시간에 친구랑 다툼이 있었거든요.”

“네?! 도연이가요? 친구랑 싸웠다고요?”

 

선경은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도 뭔가 올 것이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 “어머니, 어머니 그렇게 놀라시지 마시고요. 다툼이 있긴 했는데 바로 화해도 했어요. 그래도 어머니가 도연이 보면 놀라실까 봐 미리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전화드린 거예요”

“네? 무슨… 애들이 조금 크게 싸웠나요?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니죠? 아니 설마, 도연이가 친구를 다치게 했나요?”

 

올해가 첫 담임이라는 도연이의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상대방의 기분을 조심스레 살피며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순한 맛으로 도연이와 친구의 일을 선경에게 설명해 갔다.


사건은 점심 급식시간. 식판을 들고 시끌벅적 줄을 서 배식을 하는 도중 벌어졌다고 한다. 도연이 앞에 혜미란 친구가 서 있었는데 주아라는 친구가 혜미에게 말을 걸면서 도연이 앞으로 새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도연이가 이의 제기를 해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고 혜미의 증언으로 주아가 새치기한 것이 인정되면서 그래도 일단락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선경은 노랗게 아니 누렇게 얼룩진 도연의 흰 블라우스를 넘겨받고 샛노란색 긴팔 스웨트 티셔츠를 건네주었다.


“윤도연! 너는 그러면 그렇게 그대로 끝냈어야지! 네가 또 왜 그런 거야?”

“왜 그러긴? 최주아가 먼저 새치기를 했으니까 그랬지.”

“아니, 그건 그래서 바로 주아가 사과했다면서?”

“응. 그랬지. 그래서 나중 거는 나도 바로 했어. 사과.”

 

도연이는 노란색 스웨트 티셔츠 넥라인으로 머리를 쏙 내밀며 대답했다.  


“으이그, 말이나 못 하면 정말! 얼른 갈아 입어!”


오늘 점심 급식메뉴는 카레였다고 한다.


카레는 요 근래 도연이의 최애 메뉴다. 도연은 등교할 때부터 카레 먹을 생각에 심장이 벌렁벌렁거릴 만큼 신나 있었다.

드디어 점심시간. 카레 냄새가 진동하는 앞으로 최주아가 새치기를 해 기분이 안 좋을 뻔했지만 빠르게 잘못을 인정했으므로 도연도 빠르게 화해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카레를 향한 자신의 행복을 망칠 수 없다.  


앞 친구들의 뒤통수 사이로 카레 냄새를 쑤욱쑤욱 흡입하니 드디어 도연이 차례다. 배식 당번 친구에게 “한 번만 더, 제발 많이! 한 번만 더!”를 외쳐 가며 사정사정했다. 당번 친구는 더 먹고 싶으면 다 비우고 다시 담아 가라면서도 은근슬쩍 스리슬쩍 넘치기 직전까지 카레를 듬뿍 담아줬다. 급식판에 맛있는 카레가 찰랑찰랑 가득가득 담겨 있다. 자칫 아까운 카레가 넘쳐 바닥에 흘릴 수도 있으니 도연은 조심조심 자기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주아가 자신을 앞질렀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도연은 갑자기 승부욕이 발동했다. 뜨거운 카레가 출렁출렁거리더니 엄지 손가락에 묻었다. 그러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도 흘러내리고, 다른 손가락에도 막 묻고. 뭐 손쯤이야 닦으면 그만이다.


‘저 최주아만 앞지르고 다시 조심조심 걸어야지!’


그렇게 카레 범벅이 된 된 손으로 식판을 부여잡고 주아를 앞지르려던 찰나 급하게 움직이던 도연이의 식판이 주아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래서 누가 부른 줄 안 주아가 뒤를 돌아봤다. 안전거리 미확보인 상황. 주아의 오른팔이 도연이의 식판과 부딪쳤고 카레가 가득했던 도연이의 식판은 그대로 뒤집어져 도연이를 덮쳤다. 당연히 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그나마 주아는 식판을 엎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엄마 그래도 내가 다 뒤집어써서 바닥에는 별로 안 묻었어. 내가 다 막아 낸 거야. 잘했지? 으히히히히히.”

“뭐?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옷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선? 으이그,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그래 바닥이라도 보호해서 잘했다. 아주 잘했어. 진짜 크게 깽값 물을뻔했어.”


아휴… 선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려 있는 도연의 블라우스를 쳐다봤다. 가까이 보니 어떤 수를 써 봐도 다시 하얘질 것 같지가 않다. 점심시간에 부랴부랴 전화를 줬던 담임선생님도 이걸 걱정하셨다. --- “어머니 도연이는 친구 하고도 잘 화해했는데요. 단지 옷이 좀… 너무 놀라실까 봐 걱정이 되어 전화드린 거예요.” 선생님이 충분히 놀랄 만도 했다. 옷을 과탄산수소 푼 물에 좀 담가보면 나아질 것도 같은데. 가만 생각하니 이 옷에 그렇게까지 공들일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작년 봄에 구입했던 도연이의 흰 블라우스는 한 치수 크게 샀음에도 가을, 겨울에 제법 맞더니 올봄엔 소매 길이가 간당간당해졌다. 친척 모임이나 행사가 있을 때만 입혔으니 이러다 아끼던 똥이 될까 싶어 학교에도 입혀 보낸 거였는데 결국 이 사달이 난 거다.

선경은 옷의 생사를 두고 누렇게 물든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킁, 킁. 옷에서 희미한 비누냄새가 난다.


“도연아 옷 빨았어? 누가 빨았어? 어떻게?”

“학교 화장실 비누로 혜미랑 주아랑 나랑 셋이서 빨았어. 나 잠깐 선생님이 티셔츠 빌려줘서 그거 입고 있었거든. 어때? 잘 빨았지?”

“응? 도대체 어디를 잘 빨았다는 거야?”

“엄마가 잘 몰라서 그래. 원래 그거 진짜 노랬어. 완전완전완전 카레색이었는데 우리가 엄청엄청엄청 잘 빨아서 그만큼 하얘진 거야. 우리가 잘 빨았으니까 엄마는 편하게 세탁기로 한 번만 더 돌리면 될 거야. 좋지? 짱 좋지?”

 

도연이의 눈에서 근본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저 자신감에 선경은 말할 기운을 점점 상실해 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잘 빨아서 집에 와서 옷도 안 갈아입고 계속 이거 입고 돌아다닌 거야?”

 

선경은 했던 말 또 하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 했던 말만 또 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집에 와서 옷은 좀 갈아입고 갔어야지. 너 그럼 젖은 옷을 입고 하루종일 돌아다닌 거야?”

“완전 젖은 옷이 아니라 조금 젖은 옷이지. 선생님이 계속 옷 빌려준다고 했는데 옷이 엄청 빨리 말라서 집에 올 때는 거의 안 젖어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주아랑 운동장을 막 뛰었거든 빙글빙글 돌면서 그랬더니 옷이 더 빨리 말랐어. 그런데 또 그렇게 뛰니까 학원 갈 시간이잖아. 집에 왔다가 가면 늦는다구. 엄마는 내가 학원에 지각하는 게 좋아?”

“아니 굳이 따지자면 지각 안 하는 게 좋지.”

“그렇지? 그러니까 역시 잘했지?”

 

말할 기운을 상실해 가던 선경은 다시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잘, 했, 지?’ 윤도연, 너 지금 ‘잘했지?’라고 말한 거야?” 선경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당연히 나는 너 학원 지각 안 하는 게 좋지! 그리고 사고도 좀 안 치는 게 좋다! 응? 옷도 좀 깨끗하게 입고! 선생님한테 전화도 안 오게 하고! 정말 그런 게 좋다고! 그리고 너 저번에도.” 이제 했던 말을 또 할 뿐만 아니라 옛날 일까지 다 끄집어 내 말하고 싶은 선경이다.

“오, 맞아. 엄마 말대로 그러면 정말 좋겠네. 그런데 있잖아, 엄마 혜미네 이사 간데. 바로바로 내일.”

“알아! 엄마도 알아. 엄마도 안 다고!”

“알아? 우리 아파트에서 우리 아파트로 이사 가. 그것도 알았어?”

 

선경이 무슨 말을 하던지 도연은 자기 관심사를 먼저 말하는 게 중요한 가 보다. 이미 저 아이에겐 급식 시간에 카레를 뒤집어쓴 일 따위 머나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고 엄마인 선경만이 하얬는데 노래진, 애꿎은 옷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주아는? 주아 옷은 괜찮아? 주아도 튀었다면서? 선생님이 걱정 말라고는 했는데. 너도 걱정 말라고 하셨었거든.”

“응. 주아는 나보다 괜찮아. 왜냐면 최주아는 오늘 빨간색에 오렌지색 옷을 입었었거든. 그래서 깍두기 국물도 좀 묻었는데 괜찮았어. 그래서 주아도 나랑 같이 옷 빨아 입고 같이 운동장 같이 뛴 거잖아. 역시 달리기는 내가 좀 더 빨랐어.”

 

그래… 이것도 다행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선생님도 주아보다 도연이 옷이 더 걱정이라고 했었다. 만일 반대의 상황이었으면 더 아찔했을 것이다. 아니 상상도 하기 싫다.


선경은 하얬는데 노래진 옷에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자세히 보니 몇 번 입지도 않은 옷 팔꿈치에 미세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게 보이고 넥라인 안 쪽에는 찌든 때가 보였다. 두어 번 더 만지작거리고선 빨래통 옆에 조용히 옷을 두었다. 그리고 노란색 스웨트 티셔츠에 맞춰 노란색 츄리닝 바지를 입고서 다리 찢기 재도전 중인 도연에게 외출할 것이니 얼른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왜? 우리 어디 가? 밥도 안 먹고?”

“우리 ’방구대장’ 문방구 갈 거야. 빨리 나와. 그리고 네가 밥을 왜 안 먹어. 혜미네서 짜장면 먹은 거 다 알거든. 너는 이사준비 하느라 바쁜 집 가서 꼭 얻어먹어야만 했니?”

“그냥 먹은 거 아니야. 혜미 짐 싸는 거 도와줬다고. 그리고 짜장면은 면이지 밥이 아니잖아.”

 

옷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 그렇지, 선경은 그제야 도연이 입가에 묻히고 있는 짜장 자국 잔소리를 시작했다. 도연이는 잔소리를 듣자마자 옷소매에 침을 살짝 묻히더니 그걸로 입가를 닦는다.


“야야, 윤도연. 너 그걸로 또 입을 닦으면 어떻게 해!”

“응? 내 입에 뭐가 있어? 나 입 깨끗할 건데. 으히히히히”

“으이그 못 살아, 못 살아 정말.”

 

선경은 걷다가 말고 못 말리는 도연이의 입가에 남은 미처 닦이지 못 한 짜장을 닦아주었다. 도연이의 옷소매로. 한 번 묻었으니 두 번 묻는 것쯤이야 뭐 어쩌랴. 이 정도는 다 빨면 그만인 것을.


“그런데 우리 방구대장 왜 가? 뭐 살 건데? 나 필요한 거?”

“왜 가긴, 주아한테 ‘미안하다 선물’ 사러 가는 거지.”

“주아한테? 왜?”

“사 줄만 하니까 사주는 거야. 빨리 와. 주아는 캐릭터 누구 좋아해? 우리 그걸로 사주자.”

“아니야. 우리가 왜 주아한테 선물을 사주는데? 나하고 주아하고 벌써 다 화해하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애 좀 봐라. 주아 무슨 캐릭터 좋아해? 그거나 말해줘.”

“몰라! 내가 주아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

 

주아에게 선물을 사준다는 게 도연이에겐 예상치 못한 답이었을까? 도연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왜 걷다가 말아? 빨리 가자.”

“왜 사주냐니까?”

“‘미안하다 선물’이라고 했잖아. 그럼 뭐겠어? 미안하니까 사 주는 거지.”

“그러니까 뭐가 미안하냐고. 주아가 먼저 잘못했고 우리는 화해도 했는데 왜?”

 

도연이 쉬이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기세다. 선경도 잠시 멈춰 섰고 그대로 도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저 불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화해도 하고 같이 놀기도 했으니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또 사과를 하라는 것으로 여겨졌을 테니 무언가 억울하고 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도연이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을 터였다. 선경이 아주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다.


“음, 엄마는… 엄마는 우리 도연이가 ‘깽값’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 깽, 값? 깽값이 뭔데? 깽? 깨갱?”

 

으이그, 이 와중에 깽이라는 발음은 마음에 들었구나.


“깽값은… 음 깽값이란 말이지 원래는 일종의 합의금, 손해배상금, 사고처리금? 뭐 그런 건데 사실 아주 디테일하게 따지면 썩 좋은 말은 아니야. 그렇지만 엄마도 그렇게 고상한 사람이 아니라서 달리 더 좋은 표현을 찾기는 귀찮고, 아무튼 깽값은 그래.”

“그런데? 그래서 그 깨개깽 깽값이 무슨 상관인데?”

“지금 너는 네가 친 사고의 깽값을 지불하러 가는 거야. 엄밀히 따지면 너도 잘못을 했으니까.”

“아닌데. 잘못은 최주아가 먼저 했는데. 그리고 나 사과해서 끝났는데.”

“흠…”

 

선경은 발걸음을 옮겨 조금 벌어져 있던 딸 도연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기가 싫어 시선을 아래로 향하느라 보여주고 있는 도연의 정수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너 엄마랑 선생님이랑 통화한 거 알지?”


도연은 슬그머니 엄마를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아가 새치기한 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사과했다면서?”

“응.”

“그래도 너는 분이 덜 풀렸을 수도 있어? 계속 속상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선생님이 나서서 화해한 거니까. 그렇지?"

"… 응."

"주아가 정말 미안해서 그런 건지 선생님이 시켜서 그런 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주아가 너보다 빨리 가는 게 못마땅해서... 주아가 너를 앞지르는 게 싫었어. 속상한 게 덜 풀려서. 맞아?”

“….”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주아가 새치기 한 거랑 네가 주아한테 식판 부딪친 거랑은 별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는데 너는 어때?”

“… 그럴 수 있어.”

“그렇다면 식판 사건은 네가 그냥 먼저 가라고 해줬으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거야. 그렇지?”

“… 응.”

 

선경은 겨우 대답하는 도연이의 모찌 같은 두 뺨을 한껏 모았다. 더 아기 땐 이것보다 훨씬 오동통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귀엽다. 뺨과 뺨 사이의 입이 오리입이 되어 우물거린다.


“그래도… 그래서… 그것도 그래가주고 나도 사과했단 말이야. 순서는 선생님이 시켰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했다고. 진짜진짜 미안하다고 했어.”

“네 옷이 더 더러워졌다고 주아도 같이 사과했을 것 같은데?”

“…”

“선생님이 다 말씀해 주셨어. 그런데 도연아, 주아가 처음에 너한테 미안하다고 했을 때 너 말로는 화해하고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잖아. 마음은 그러지 못했지. 그러면 반대로 네가 주아한테 사과했을 때 주아도 괜찮다고 말했다고 해서 주아 기분도 바로 풀렸을까?”

“… 아니 몰라.”

“이제 도연이도 알잖아. 내가 속상한데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무조건 기분 풀리고 괜찮아져? 사과만 받으면 꼭 괜찮아져야 해?”

“… 몰라, 아니.”

“그래, 물론 풀렸을 수도 있고 괜찮아질 수도 있지. 그런데 그건 당사자가 아닌 이상 모를 일이야. 주아도 그랬을 거야. 게다가 너희 빨래도 같이 하고 놀기도 같이 놀았으니까 만약 덜 풀렸다고 해도 아주아주 조금 덜 풀렸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거의 풀리긴 풀렸을 거야.”

“… 응.”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주아가 먼저 실수를 아니, 잘못을 했든 또 괜찮다고 했든 결국 도연이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야. 사과를 한 도연이도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으니까 끝. 괜찮아. 다시 난 잘못한 게 없어.’ 이러는 것보다 엄마는 우리 도연이가 주아한테 좀 더 정성스럽게 사과를 잘했으면 좋겠어. 물론 도연이가 학교에서 한 사과가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야. 엄마도 알지. 단지, 오늘의 난리는 그렇게 말로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거고, 엄마가 봤을 때는 그 난리, 사고는 좀 더 깽값을 치렀으면 좋겠어. 그리고 엄마도 사과를 하고 싶어, 주아한테. 주아 옷도 더러워졌잖아. 네가 더 해서 그렇지.”

 

도연이가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못난이 얼굴을 만들어서는 선경을 바라보았다. 때문에 콧등에 자리 잡힌 주근깨 아래로 주름이 한가득이다. 도연이가 이해를 했을까? 말하는 선경도 어려웠다.

깽값을 말 한 진정한 저의에는 의도했든 안 했든 어떤 식으로든 본인이 무언가 물의를 일으켰다면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스스로 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이것까진 도저히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저 여기까지라도, 이해하기 어렵다면 알았다는 시늉이라도 보여주길 바랐다.


“… 주아는 쿠로미를 좋아해.”

 

도연이가 드디어 발을 뗐다. 뛰어가기까지 한다. 선경은 코웃음을 쳤다. 딸 도연이가 자꾸 까먹는다. 자기 엄마가 살면서 달리기 1등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선경은 주아를 앞지르며 소리쳤다.


“방구대장 엄마보다 먼저 가면 너는 최애의 아이 카드 사준다.”

 

뒤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쫓아오는 도연이가 느껴졌다.






이틀이 지났다. 퇴근하고 돌아온 선경 앞으로 주아가 쇼핑백 하나를 들이밀었다.


“이게 뭐야? 웬 먹을 거?”

“주아가 우리 준 거야.”

 

쇼핑백 안에는 파스텔톤 마카롱 한 박스와 채도가 높은 원색의 프링글스 통이 들어있었다. 단짠의 조화가 완벽한 구성이다. 뭘 바라고 쿠로미 꾸러미를 보냈던 건 아니었는데 이런 선물이 돌아오다니 선경은 어안이 벙벙했다. 도연이가 ‘다 봤지?’라는 듯 쓱 와서 마카롱 상자만 쏙 꺼내갔다. 상자가 사라지니 쇼핑백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카드 봉투가 눈에 띈다. 봉투를 열어보니 카드가 아니고 작게 접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귀여운 글씨체를 보니 주아가 쓴 거다.


“도연아 엄마 이거 읽어봐도 돼?“

“응.”

“To 도연에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게 또박또박 참 야무지게도 썼다. 그런데 그 내용이…


“윤도연. 윤도연!”

 

내용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건 도연이와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다.


도연이는 기분이 좋았다. 도연이도 엄마와 마찬가지로 뭘 바라진 않았으니 주아가 준 뜻밖의 선물에 너무 기뻤다. 게다가 쇼핑백 안에 들어 있는 마카롱은 엄마가 비싸다고 잘 안 사주는 거다. 빨리 먹고 싶지만 일단 엄마에게 자랑이 먼저다. 엄마가 올 때까지 꾹 참았고 엄마가 확인을 하자마자 재빠르게 꺼내왔다. 빨리 먹고 프링글스도 먹어야지. 여러 가지 맛 마카롱 중에 제일 좋아하지 않는 맛을 골랐다. 그런데도 너무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기쁨의 몸부림을 치려는데 엄마가 부른다. 목소리가 살짝 깔려 있는 게 뭔가 불안하다.


“윤도연. 너 이 연필 이야기 뭐야?”

 

엄마 손에 주아가 써 준 편지가 들려 있다. 도연은 이미 읽어 본 거다. 크게 이상한 내용은 없었다. 이것저것 지난 이야기와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자는 이야기가 다였다.

 

“그거 주아가 연필깎이가 없다고 해서 나도 연필깎이가 없어서 가위로 깎아준 거야. 칼은 위험하거든.”

“아니! 가위도 위험하거든. 그러면 다른 친구한테 연필깎이가 없는지 더 물어보던가 해야지. 위험하게 가위로 왜 그랬어?”

“아니야, 내가 여러 번 해봤는데 하나도 안 위험해. 나 되게 잘 깎아. 모양은 안 예쁜데 연필은 가운데 흑연만 나오면 되는 거잖아.”

“어휴, 일단 알았어. 그럼 이 지우개똥 지우개는 뭐야?”

“지우개똥을 모아서 다시 뭉치면 지우개로 만들 수 있는지 실험하는 거야. 반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지우개똥을 모으는 중이지.”

“아니, 그렇다고 일부러 지우개질을 하면 어떻게 해? 그건 낭비잖아!”

 

도연이는 ‘주아야, 미안해. 도연이가.’라고 간결하게 써서 보냈는데 주아는 카드에 편지처럼 빼곡히 글을 써서 보내왔다. 거기엔 그동안 도연이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고 어떤 건 자신이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고 어떤 건 자기가 한 짓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엄마는 그걸 하나하나 짚어서 전부 물어보고 있다. 아휴, 내일 학교에서 가면 이 일에 관해 최주아와 이야기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다. 우리 엄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자꾸 엄마가 옛날 얘기를 꺼내고 했던 말을 또 하게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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