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향수'의 부제
* 8화와 동일한 등장인물입니다.
하준이가 개학을 했다.
지난겨울방학 내내 하준이는 아침 10시고 11시고 마음껏 늦잠을 잤다. 당연히 12시를 넘겨 일어난 적도 많았다. 마침 올해 초, 내가 밥벌이하는 게임회사도 출퇴근과 재택근무가 마구잡이로 혼재되었던 대혼돈의 코로나시대를 지나 반일 출근을 선언했다. 물론 전 직원 대상은 아닌 몇몇 연출팀만 선택되었는데 거기에 우리 팀도 포함됐다. 덕분에 나도 아이와 함께 실컷 늦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달 남짓한 겨울방학이 지나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이 될 개학 하루 전날, 저녁을 먹고 나와 노닥거리던 하준이가 평소보다 이른 취침준비를 했다. 그게 너무 일러서 나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고 하준이는 대답대신 혼잣말 하 듯 내일부터 8시에 일어날 것을 다짐했다. 이어 9시 등교, 정확하게는 8시 50분 등교를 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4학년때까진 잘 안 그러더니 5학년때는 9시를 넘겨하는 지각 등교가 꽤나 신경 쓰였나 보다.
나의 반일 근무 시작 전 계획은 일찍 일어나 오전에 개인 작업을 끝내고 출근 후 공동작업 그리고 마무리였는데, 현실은 완전히 반대로 늦게 일어나 오후 출근 후 황혼에서 새벽까지 개인작업을 하는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만 일찍 자겠다는 아이에게 괜히 심술이 났나 보다. 약을 올리고 싶어졌다.
“이야, 이제부터 늦잠은 못 자겠네. 나는 완전 개꿀 늦잠 잘 건데.”
“흥, 지금 자고 일어나면 잠자는 시간은 비슷하거든.”
“오~~~.”
“엄마야말로 빨리 하고 일찍 잘 궁리를 좀 해 봐.”
녀석, 분명히 약이 오르긴 오른 표정인데… 이제 말로는 쉬이 이기기가 힘들다. 어제까지 아무 걱정 없이 늦게 잠들었던 아들이… 되받아 치는 만큼 부쩍 자란 것 같다. 대견하다. 오히려 약을 올리려던 내 쪽이 반대로 약이 올랐다. 그러면서도 복잡 미묘, 무언가 뭉클하다. 아마도… 아들은 스스로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역시 내 코가 석자다. ‘남의 코 앞을 신경 쓸 게 아니다. 내 코 앞을 신경 쓰자.’라고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또 어제처럼 거의 동트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바삭. 후루룩, 바삭바삭.]
알람 소리도 아닌 것이 조신하게 움직이는 쇠와 사기그릇 부딪치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뜨인 눈을 다시 감아 잠을 도로 청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소리들만 더 또렷하게 들렸다. 매우 익숙한 소리, 하준이가 시리얼 먹는 소리다. “몇 시지?” 실눈을 뜨고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니 8시 28분. 녀석 정말 일찍 일어났나 보다. 잠시 잠이 덜 깬 채 뒤척이다가 도저히 잠들 것 같진 않아 거실로 나가봤다. 하준이는 이미 등교할 옷으로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얼추 끝낸 모양새다. 나는 하품을 크게 하며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 일어난 거야? 가방이랑 준비물은 잘 챙겼어?”
“응.”
하준이는 다 먹은 빈 그릇과 수저를 부엌 개수대 넣어 놓고 설거지할 때까지 그릇이 마르지 않도록 수돗물을 잠깐 틀어 그릇에 물을 받아 놓고 돌아와 책가방을 들었다. 양치하고 덜 닦인 치약거품인지 아니면 방금 먹은 시리얼의 우유인지 하준이의 입가에 묻은 어떤 것이 하얗게 빛난다. “으이그, 아직 애기구나?”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맨손으로 닦아주려고 하니 자기 늦는다고 내 손을 물리치고 자기가 슥슥 닦고선 신발에 발을 대충 구겨 넣고 후다닥 나간다. 대략 41분.
우리 집은 아파트 단지 안 쪽에 있는 동이고 동 바로 옆에는 가파른 72개의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을 올라가 좁은 2차선 도로만 건너면 바로 하준이가 다니는 학교 후문과 만난다. 그렇게 걸리는 시간 대략 10분. 옛날 1학년 하준이는 그 계단이 너무 힘들다며 곧잘 징징거렸었는데 지금 하준이는 그 계단을 한 걸음에 올라간다. 아마 하준이는 스스로 약속했던 시간에 도착할 것이다. 뭐, 많이 컸네…
아, 피곤하고 잠도 덜 깨서 좀 졸리고 그리고 무언가 허전해졌다. 잠을 더 자면 그만일 텐데 다시 이불속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어제까지 늦은 아침을 같이 보내던 아이가 없어 그런지 어딘가 집도 휑하다. 그때 우두커니 서서 졸려서 멍만 때리던 내 눈이 반짝였다.
“역시… 아직 애기야. 애기네, 애기.”
그럼 그렇지. 아이가 떠나고 난 후 현관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파란색 실내화 주머니를 발견했다. 나간 지 몇 분 됐지? 서둘러 쫓아가면 잡을 수 있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후드 집업을 걸치고 얼른 나갔다. 아직 3월, 초봄이라 바람이 쌀쌀하다.
가파른 72개의 계단을 가벼운 패딩이나 점퍼를 걸친 아이들이 오르는 게 보였고 그 사이에 이미 계단의 반 이상을 오른 하준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하!” 큰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려다 아차 싶어 입을 닫았다. 스스로 약속한 시간을 지키려는 아이를 불러 세워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대신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우와, 반도 못 가서 헉헉거렸다.
“하준아! 정하준! 정하준!”
뒤에서 들리는 살짝 변성기가 온 목소리. 어느 남자애가 하준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모르는 앤 데, 하준이 친구인가 보다. 그 애는 초반에 뛰어오르느라 힘이 딸려 계단 손잡이를 부여잡고 오르는 내 곁을 지나치며 하준이의 이름을 더 크게 불렀다. “정하준! 하준아!” 하준이는 계단을 거의 오르고 나서야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알아채고 뒤를 돌아봤다. 이윽고 친구를 발견했고 마침내 나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의 빈 손을 발견했다.
“허억, 허억. 하준아 이거, 허억, 네 실내화 주머니, 허억.”
“엄마, 왜 그랬어?”
“허억, 왜라니? 허억, 뭘?”
“그게 꼭 안 가져다줘도 된단 말이야. 실내화 없으면 선생님이 빌려준다고.”
하준이는 무언가 쑥스러워하며 실내화 따위 필요 없는 투로 말했다. 그래? 그럼 도로 가져간다 하니 또 무엇하러 그러냐며 실내화주머니를 낚아채 가져갔다. 그리고 방금 만난 친구와, 다른 등교하는 아이들과 함께 학교 후문 안으로 들어갔다.
잠이 확실히 덜 깼나? 하준이가 보이는 시야가 몹시 이질적이다. 시야에는 분명히 존재하고 멀어지는 것뿐인데 느낌으로는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어떤 보이지 않는 결계가 후문을 비롯한 학교 주변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는 학부모 및 어른들은 들어갈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고 차원 안에 어른은 선생님이라는 자들만 허락된다.
결계 때문인지 집에서처럼 또 몇 초간 멍을 때렸다. 급하게 계단을 오르느라 이마까지 차올랐던 숨도 진정시켰다.
그제야 귀가 툭 트였다. 막힌 코를 힘껏 풀었더니 예상밖의 귀가 툭 트이는 그 느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벌렸더니 귀가 트이는 그 느낌과도 비슷하다. 이미 들리고 있었을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가 물밀듯이 밀려 들려온다. 학교 가기 싫다고 할머니 목에 매달린 작은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귀가 열리니 이미 시야에 들어왔었을 아이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고 학교 결계 안이 궁금해 목을 길게 뽑고 있는 엄마, 아빠들도 눈에 들어온다.
새소리도 들린다. 눈에는 최소한의 날갯짓만 하는 비둘기만 보이는데 들리는 소리는 ‘구구구구’하는 비둘기 소리가 아닌 여러 종류의 새소리다. 참새도 있는 것 같고 나머진 잘 모르겠다. 다만 소리라는 게 이렇게 풍부한 것이었나. 이미 알던 게 묘하게 낯설다.
오감이 열린다는 게 이런 것일까? 시력, 청력. 어떤 기능이 좋아진 게 아니다. 원래부터 그만큼 구동되고 있던 기능을 비로소 느끼는 기분이다.
숨도 더 깊게 들이켜고 많이 뱉었다. 머리에 핑 피가 돈다. 이제야 나름 말끔하게 차려입은 어른들과 야무지게 차려입은 아이들 사이에 무릎이 튀어나오는 걸 넘어 축 늘어진 츄리닝 바지를 입고 언제 묻었는지 모를 붉은 무언가를 묻힌 집업을 입고 당당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예의상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던, 며칠 동안 감지 않아 떡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올려 잘 묶었다. 적당히 기름기가 있으니 오히려 더 단정하다.
익숙하다고 생각한 곳이 다른 시간대에서 반갑게 낯설어지는 경험을 더 해 보고 싶어졌다. 힘들게 올라왔던 가파른 72계단 쪽으로 가지 않고 후문 앞 학교를 두르고 있는 완만하게 경사진 도로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집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을 놔두고 빙 둘러가기로 한 것이다. 급하게 올라왔던 걸 보상받으려는 듯 이보다 더 천천히 걷기 어려울 정도로 천천히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영화 <도성>의 주성치처럼 스스로 움직임에 슬로모션을 걸었다. 결계에서 관심을 거둔 어른들이 유난히 빠른 걸음으로 곁을 휙휙 지나쳤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완만한 내리막길 끝에 나오는 작은 사거리까지 걸었다. 사거리에는 저녁에 가서 Take-out만 하던 작은 카페가 있다.
“어서 오세요.”
익숙한 가게에 낯선 얼굴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오전에만 일하시는 분일 거다. 낯선 얼굴은 주문한 음료를 마시고 갈 것인지 포장해 갈 것인지 물어 왔고 나는 들어올 때의 마음과 달리 마시고 가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저녁에 들렀을 땐 미처 못 봤던, 음료 제조하는 곳 가벽 너머로 숨어 있기 딱 좋은 테이블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커피를 사 갔던 게 하준이가 초등학교 입학한 것만큼 오래되었는데 테이블을 발견한 것도 의자에 앉아 보는 것도 지금이 처음이다.
짙은 원목으로 되어 있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는 딱 두 명이 마주 앉으면 알맞을 공간에 놓여 있었다. 음료 제조하는 곳을 가려주는 가벽에는 작은 선반이 붙어 있었고 그곳엔 다른 소품 없이 담백하게 몇 권의 책만 꽂혀 있었다. 주문했던 ‘아메리카노’를 받아 테이블에 돌아오면서 가장 익숙한 책 한 권을 집었다. 제목으로만 보면 하야미 가즈마사의 <무죄의 죄>가 더 흥미로웠는데 손이 멋대로 익숙한 책으로 향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 <향수>다. 부제로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고 붙어 있는데 원래 이런 부제가 붙어 있었나? 모르겠다. 표지엔 이야기 속 그 아름답고 불쌍한 빨강머리 여자로 미루어 짐작되는 여자가 누워 있다. 그래서 낯설진 않지만 내가 알던 <향수>와는 다르다. 내가 읽은 책은 흰 바탕에 구불구불 덩굴장식에 제목만 쓰여 있었다. 그나저나 파트리크 쥐스킨트였군. 지금까지 파크리트 쥐스킨트 줄 알았는데.
얼음을 동동 띄워 식힌 뜨거웠다가 적당히 식은 아메리카노를 몇 모금 홀짝거리며 책 <향수>를 후루룩 펼쳐 봤다. 향수의 배경이 되는 나라는 프랑스이고 나는 이 책을 18년 전쯤 파리 지하철 3호선 종점 갈리에니(Gallieni)역 부근 공동묘지에서 완독 했다. 읽었던 책은 그때 묵었던 갈리에니역 근처 H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다. 그 친구는 내가 이 책을 ‘마레 지구’의 어느 카페에 앉아 읽어 보기를 권했으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 청을 거절하며 책을 받았다.
당시 H게스트하우스 숙박 3주 차에 접어들었던 나는 첫 주에 갔던 장소를 또 가고 또 가고 반복해서 가고 있었다. 샹젤리제는 거리 초입에서 한 번 쓱 둘러보기만 했고 같은 날 개선문도 멀리 떨어져 확인만 하고 근처엔 안 갔었다. 에펠탑도 마찬가지. 우리나라로 치면 청담동 사거리, 63빌딩, 남산 타워라고 생각하니 흥미가 훅 떨어졌다. 대신 루브르 박물관에만 5번을 갔고 그중 2번은 하루 종일 루브르 스타벅스에서 보냈다.
미술관 스타벅스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엄청 낡았지만 두꺼운 아트북이 많이 있었다. 낯선 외국인들과 테이블을 공유하고 앉아 그 아트북만 구경해도 하루가 그냥 갔다. 내가 아트북 애호가라서가 아니다. 그냥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나도 아무 말 안 해도 되는 곳에서 유유자적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그 자체가 좋았다. 물론 “관광객이야?”, “책이 재밌니?”, “어디서 왔어?”라고 물어오는 외국인들도 가끔 있었으나 적당히 떨떠름한 미소와 함께 “So so.” 혹은 “I am sorry.”라고 답하면 거기서 대화를 멈춰주었다. 이건 다른 카페에서도 마찬가지.
몽마르트르 언덕도 처음 갔을 때나 팔찌 강매 상인들이 무서웠지 두세 번 더 가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특히 몽마르트르를 내려오면 보이는 내리막길을 더 내려가서 만났던 ‘마르셰 생 피에르(Marché Saint Pierre)’를 너무 좋아했다. 팔찌 강매를 피했다고 스스로에게 자랑해 놓고선 ‘마르셰 생 피에르에’에서 쓸데없는 단추를 왕창 샀었다. 그 단추들은 아직도 단추로만 존재한다. ‘뉴발란스’ 운동화 박스에 담겨 있고 1년 혹은 2년에 한 번 꺼내 보는데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파리에 도착해 맞이한 첫 주말에는 주말에만 열리는 ‘방브 벼룩시장’엘 갔고 그다음 주말에도 ‘방브 벼룩시장’엘 갔다. 거기에선 타일과 엄청 오래된 가구 손잡이를 샀다. 단추와 마찬 가지로 어느 운동화 박스에 타일은 타일로 가구 손잡이는 가구 손잡이로 고스란히 기분 좋게 남아 있다.
다 이런 식이었다. 오랑주리도 오르세도 퐁피두 센터도 가고 또 가고, 근처 카페도 가게도 가고 또 가고. 식사는 그때그때 형편에 맞춰서 싼데 아무 데나 들어가서 사 먹거나 길거리 음식을 길거리에서 먹었다. 길거리에선 샌드위치 같은 걸 먹다가 내용물을 추접스럽게 흘려도 괜찮았다. 한국 음식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H게스트 하우스는 한인 민박으로 파리 외곽에 있는 대신 숙박비가 저렴했고 아침을 한식으로 제공했는데 식사 시간이 이른 아침 7시 반이다. 마구마구 늦잠을 즐기던 나는 그래서 아침을 한 번도 못 먹었다.
애초에 무계획 5주 ‘파리만 구경하기’로 시작한 여행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기를 어언 3주 차, 사장님이 여럿이 함께 온 친구들을 위해 중간에 방 변경을 해 줄 수 있는지 5주 장기 투숙객인 나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었고 약속한 날에 나는 같은 가격으로 6인룸에서 2인룸으로 옮기게 되어 “개꿀!”을 외치며 짐을 옮겼다. 그리고 그 방에 선경이가 있었다. 선경이는 런던에서 넘어와 3일간 부지런히 파리를 즐기고 내일 세비야로 넘어갈 거라고 했다. 나는 오늘 마레 지구에 갔고 내일도 마레 지구에 간다고 했다.
“어! 그럼 이거 선물로 줄게요. 저는 다 읽었거든요. 재밌었어요.”
나보다 3살 어리고 키는 3cm가량 컸던 선경은 공들여 꾸렸던 트렁크의 짐들을 굳이 해체해 가장 안 쪽에 있던 책들 중 <향수>를 꺼내 나에게 주었다. 책 속의 몇몇 살인 사건이 ‘마레 거리’에서 일어나니 이 책을 ‘마레 지구’에서 읽으면 꽤나 의미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 그런데 나 책 읽는 거 싫어하는데.”
그러면서 책은 받았다. 책 첫 페이지 안 쪽에 선경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선경은 틈만 나면 여행을 즐긴다고 했고 그럴 때마다 평소에 다 읽은 몇몇 책들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놓는 수고를 들여 타지로 그 책들을 들고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가지고 온 책들은 선경이 오고 가며 만나는 인연들에게 주는 선물이 되었다. 다 한국어 책이니 한글도 널리 알릴 겸 일부러 다른 나라 언어권 사람들에게만 줘 왔는데 나는 특별히 예외로 두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뭐야? 예외인 거 좋은 거 맞아? 진짜?”
“깔깔깔깔, 맞아요, 맞아.”
그때 우린 마트에서 사 온 와인으로 이미 꽤나 취해 있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선경이는 없었고 <향수>만 남아 있었다.
H게스트 하우스가 있는 동네의 갈리에니(Gallieni)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3호선 끝자락 일산의 화정역쯤 되려나. 여행 4주 차에 접어들었을 땐 파리 중심가로 나가는 것이 귀찮아졌다. 사장님 부부와 제법 친해진 나는 숙소에서 여유로운 늦잠을 자고 거실에서 TV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OCN 같은 채널에서 방송해 주는 ‘CSI라스베이거스’를 봤다. 소리는 배우가 말하는 영어, 자막은 프랑스어다. 당연히 영어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프랑스어는 더 읽을 줄 몰랐다. 그런데도 내용은 알았다. 이미 다 본 것이므로. 그래서 못 알아듣고 못 읽어도 재밌었다.
“저 그럼 다녀올게요.”
CSI로 점심 일정까지 끝낸 나는 사장님 부부가 편히 게스트하우스 살림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웠다. 그때 찾아낸 것이 동네 공동묘지였다. 그 공동묘지에 어떤 이름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냥 정처 없이 동네를 걷다가 흘러 흘러 공원 같은 데를 몇 번 갔는데 하루 이틀 가보니 군데군데 박혀 있던 뭔가 있어 보였던 돌들이 비석이구나 깨닫고 문득 ‘아 여기는 공동묘지로구나.’ 안 것뿐이다.
사장님 부부에게 따로 공동묘지에 관한 정보를 묻지도 않았다. 자, 알고 보니 이곳에 내가 모르는 유명인 무덤이 있다 치자, 그렇다면 그 유명세에 어깨는 으쓱할지언정 까닭 모를 거리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혹은 내가 모르는 무서운 괴담이라도 있다 치자, 이건 필사적으로 모르는 게 좋다. 언어를 모르는 것도 큰 장점이 되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나는 이곳이 좋았다.
나에게 이곳은 동네의 완만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인적이 드물고 나무가 많아 시원하며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적당한 예쁜 돌(비석)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좋은 장소일 뿐이었다. 선경이 준 책 <향수>를 이때 여기에서 읽었다. 예의 그 예쁜 돌(비석)들을 구경하면서.
5주 차가 되고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말, 나는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으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속 여행. 이 말을 한 건 여자 사장님이었다. 부부가 운영하는 이 게스트 하우스 두 분 사장님들을 그렇게 불렀다. 남편분 쪽을 남자 사장님, 아내분 쪽을 여자 사장님.
여행 끄트머리의 어느 날, 여자 사장님이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3일간 짐을 맡아 줄 테니 런던이라도 다녀오라고 권유한 것이다.
“와, 진짜요? 개꿀!”
알게 모르게 파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내 짐은 꽤나 몸집을 키운 상태였다. 단추와 타일과 가구 손잡이와 더불어 문손잡이와 오래된 잉크, 경첩이 고장 난 나무 상자, 두르지도 않을 화려한 스카프들, 순전히 표지만 보고 고른 시멘트 벽돌만 한 크기의 낡은 중고 아트북들. 그리고 프라이팬과 화병, 주전자, 기타 등등.
런던의 숙소는 남자 사장님이 알아봐 주었고 나는 정말 단출하게 여권과 지갑, 핸드폰, 간단한 세면도구만 챙겨서 다녀왔다. 가서 선경이가 극찬했던 영화 <노팅 힐>에 나온 '노팅 힐'을 어슬렁거렸고 밤거리에선 ‘오아시스’와 ‘블러’를 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짜 이때는 무슨 뽕에 취했는지 신비로운 매직도 경험했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 몇몇이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로 보이는 거다. 한 명만 그렇게 보였다면 진짜 리암 갤러거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유사 리암 갤러거가 너무 많았어서… 서양인들이 보기엔 동양인들이 비슷하게 보인다더니 그 반대도 딱 그렇구나. 그래도 여러 리암 갤러거라니 좋은 착각이었다.
아, <향수>는 런던까지 다녀오고 H게스트하우스를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들른 공동묘지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얼마나 웃었는지. 진짜 공동묘지 한가운데에서 단전부터 끌어올린 큰 웃음소리를 냈다.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선경의 메모 때문이었는데,
Nice to meet you.
If I visit your country one day,
please welcome me again then.
I look forward to that day.
이래서 외국인들에게만 책 선물을 한다고 한 거였구나. 선물하려고 준비한 모든 책들의 마지막 페이지엔 이렇게 적어 놨을 것이다. 나름 꽤나 전략적인 플러팅이다. 나는 엄청난 글로벌 인싸를 알게 된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마찬가지로 한국에 있을 선경에게 혹은 여행 중인 선경에게 나를 방문해 달라고 해야겠다.
아, 그러려면 돌아가야겠구나. 여기 있는 내내 한국 음식도, 집도, 가족도 친구도 딱히 한국의 무엇이 아쉽다거나 그립다는 생각을 안 했었는데 꼭 그렇지 만은 않았나 보다. 코를 풀다가 툭 트이는 귀처럼 이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깨달았다. 없었는데 생긴 게 아니다. 떠나올 때부터 계속 있었는데 이제 깨달았을 뿐이다. 운 좋게 5주가 지나 딱 돌아가는 날 아침 코를 풀어서.
카페 선반에 꽂혀 있던 책 <향수>에는 따로 적어 둔 어떤 이의 메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름답고 불쌍한 빨강머리 여자의 표지를 촬영해 톡으로 선경에게 보냈다. 그리고 물어봤다.
[이거 봤어? 개정판 새로 나왔었 나봐. 옛날 향수 책에도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있었어?]
[? 모르겠음? 몰라.]
[왜 그 책 네가 나 준거잖아.]
[그러니까 모르지. 나한테 없잖아. 언니 밖이야? 언니가 직접 보고 확인해 봐. 나도 궁금하다.]
[아!]
“엄마, 엄마는 아침마다 어디 가?”
하준이 개학하고 두 달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내내 하준이가 등교할 때마다 같이 집을 나섰다. 무언가 활기 넘치고 바쁜 아침에 혼자만 <도성>의 주성치라도 된 것처럼 슬로모션으로 걷는 게 묘하게 즐겁다. 덕분에 밤잠이 늘었고 낮에 더 많은 일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략 18년 만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 <향수>에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원래 붙어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와, 이건 18년 만에 코 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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