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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May 04.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16. 뚱뚱한 가죽 지갑



16. 뚱뚱한 가죽 지갑



강남은 넓은 10차선이 넘나드는 넓은 대로는 완만한 평지에 가깝지만 높은 건물 사이 골목은 가파른 산이다.


아름다운(화려한) 소규모 예식으로 유명한, 오늘 초대받은 결혼식 장소는 강남구청역 근처 골목 안 산꼭대기에 있다. 네이버 지도는 강남구청역 2번 출구에서 도보로 12분이면 도착할 거라고 했지만 아직도 15분째 걷는 중이다. 아무래도 지도가 알려주는 12분에 오르막 길을 오르는 수고는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셔틀 타자고 했지?”

“그래, 내 말이. 너는 왜 내 고집을 안 꺾었어? 평소에는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하자고 하면 절대 안 한다고 칼차단 하면서 꼭 이럴 때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하더라.”

“너는 지금 그걸, 하, 상희야 나 예쁜 말만 하게 해 주라.”

 

오랜만에 상희를 만난 선경은 명색이 결혼식이니 발 끝에 잔뜩 힘을 줘 높은 굽의 슬링백 구두를 신은 터였다. 자신과는 달리 낮은 운동화를 신고 나온 상희가 시간도 여유 있는데 산책 삼아 걸어가자고 했을 때 왜 싫다고 안 했을까 뼈저리게 후회했다.


“네? ATM기가 없다고요?”

“네 그게 아니고 원래 있긴 한데요. 저희가 이번 주에 점검에 들어간 게 약간 좀 문제가 생겨서. 정말 죄송한데요, 나가서 왼편으로 조금만 내려가시면 길 건너편에 우리은행이 있긴 한데요.”

 

ATM기의 상황을 설명하는 식장 직원 분의 표정이 난처하다. 일단 ‘조금만 내려가면’의 그 ‘조금만’이 진짜 ‘조금만’이 아닐 게 분명하다. 선경은 진심 구두에서 내려오고 싶어졌다. 강남구청역 ATM기에서 수수료 1300원을 내고서라도 현금을 뽑았어야 했나? 상희가 요새 ATM기 없는 식장은 없다고 수수료 아깝다고 절대 여기선 뽑지 말자고 했었다.


“선경아, 나도 이럴 줄 몰랐는데 어떡하지? 그냥 카카오페이로 보내는 건 어때?”

“음…”

“그건 좀 그런가?”

“그건 안 되지. 그래도 현금이 맛인데. 그러지 말고 상희야 나 네 운동화 좀 빌려줘.”

 

막 임신 7개월째 접어든 상희의 운동화는 선경에게 살짝 컸다. 선경은 미안함에 눈썹으로 산을 만드는 상희를 식장 안 객석 의자 한쪽에 앉혀 놨다. 오랜만에 들고 나온 얌전한 행사용 검정 가방도 상희에게 맡기고 빌려 신은 운동화의 끈을 단단하게 조였다.


“진짜 같이 안 가도 돼?”

“너 그 배로 어딜 따라오려고 그래. 여기서 기다려. 내 구두 그거 비싼 거야. 그거나 잘 지키고 있어.”

 

자신이 다녀올 동안 후다닥 찍은 ‘인생 네 컷’에 대신 축하 메시지를 써 줄 것을 부탁하고 선경은 달렸다. 빨리 다녀와야 오늘의 신부 가영이와 신부대기실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우리 은행이 있다는 왼쪽은 방금 올라왔던 오르막길의 맞은편 내리막길이다. 최소 올라온 만큼 내리 달려 내려갔다가 10차선 도로를 건너갔다가 돌아와 다시 올라와야 한다. 흡사 옛날 ‘출발 드림팀’ 같은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하는 장애물 미션 게임을 하는 느낌이다. 손에 든 지갑이 계주 달리기 바통이라고 생각하니 무언가 투지가 불타오른다.


바나나만큼 휘어진 내리막길 끝에 거의 다다르자 10차선 도로 신호등의 초록불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저 초록색은 언제부터 깜빡였을까? 속도를 좀 더 내면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에 건널 수 있을까? 뭐, 남은 초록불이 10초? 내가 100m를 얼마 만에 뛰더라? 짧은 시간 수많은 고민을 했고 이 고민이 무색하게 횡단보도 바로 앞에서 초록불은 꺼졌다. 다리는 묶였는데 마음은 점점 초조해져만 갔다. 몇 분이 경과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핸드폰은 상희에게 맡겨뒀던 행사용 가방에 넣어뒀다. 길 건너 보이는 은행을 두고서 발만 동동 굴렀다. 엔진을 꺼트려선 안 된다. 다시 들어올 초록불을 위해 온 신체를 공회전시켰다.


빨간불이 꺼졌다. O.k. 전력질주다.


“선경아, 빨리 와, 빨리! 곧 신부 입장이래.”

“흐어엌! 가여아! 가여아… 축하해. 축하해!”

“언니 크크크, 가여아가 뭐예요? 가여아가, 크크크. 상희 언니한테 얘기 다 들었어요. 정말, 진짜, 아웅 이렇게 와 주셔서 너무 고마워용!!”

”그래, 가영아. 당연히 와야지. 정말 우리 가영이 오늘 너무 예쁘다!”

 

미션은 무사히 성공했다. 다시 오르막길을 뛰어오르는 것은 무척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부 입장 전 꼭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다.

가영이는 선경이 예전 일하던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만났다. 그 회사는 어느 드라마 제작사의 자회사였는데 장소도 이곳 강남구청역 근처였다. 그때 진행한 프로젝트로 잠시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온 게 막 대학교에 입학한 가영이었다. 갓 미성년을 벗어난 아기 어른. 정말 귀여웠다.

상희는 그 회사에서 만난 입사 동기다. 상희의 결혼식 때는 신부 입장 전 함께 사진을 못 찍었다. 상희는 아직도 그 일로 가끔 섭섭해한다. 못 찍은 이유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그때 사귀던 남자친구와의 이별 후유증으로 잦은 음주에서 비롯된 늦잠 때문이었다.



”선경아 이제 내 운동화 줘. 밥은 편하게 먹자.”


어쩐지 신랑신부 친구 촬영을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뭔가 편하면서도 이상했다. 자꾸 사진작가님이 선경에게 앞 줄로 내려오라고 할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게 신발을 다시 바꿔 신지 않은 거였다. 아뿔싸, 이 날, 이 순간을 위해 부러 높은 굽을 챙겨 신은 거였는데. 원래 높은 힐을 자주 신던 상희는 임신으로 요 근래 몇 개월 안 신다가 신었더니 도리어 편했다고. 게다가 뒤가 트인 슬링백이었으니 더 시원하고 좋았다고 한다.


”우와! 너 그냥 내 구두 신어. 이렇게 된 거 억울해서 안 되겠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알고 그랬냐? 너도 몰랐잖아. 빨리 내 운동화 내놔.”

“아이고, 네들은 아직도 그렇게 티격태격거리니? 몇 년이 지났는데 변한 게 없어?”


당시 선경과 상희, 가영을 데리고 일했던 PD님도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는 크게 변하지 않은 이 둘의 모습에 반가워했다.


”어디 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면 좋은데 내가 시간이 없다. 상희, 뭐 맛있는 거 사줘야 되는데 금방 가 봐야 돼. 몇 달 남았어? 뒤에서 보면 애 가진 줄 모르겠어.”

“아휴, 맛있는 거야 이제 여기 쫙 깔린 거 제가 다 먹을 건데요. PD님이야 말로 식사도 안 하고 가시려고요?”

“응. 내가 항상 안 그러디. 우리네 인생 택시 미터계라고. 뛴 만큼 받는 거야. 많이 받으려면 뛰러 가야 돼.”

“와, PD님 그러려면 총알이 있어야 되잖아요. 저는 뛰고 싶어도 총알이 없단 말이에요.”

 

선경이 오랜만에 만난 홍PD에게 우는 소리를 한다.


“으이그! 너는 잘하면서 맨날 어리광이다. 자, 언제 한 번 놀러 와. 지금은 여기 있어. 오면 맛있는 거 사줄게.”


홍PD가 명함을 건넸다.


“오, 명함 너무 센스 있다. 완전 예뻐.”

“진짜요. 귀여워. PD님처럼 생겼어. 아, 제 것도 드릴게요.”

 

선경은 지금 다니는 회사로 이직한 지 한 달 밖에 안 됐다. 요새는 예전같이 명함을 주고받을 일이 많지 않아 명함집을 따로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새로 생긴 명함을 지갑에 두둑이 넣어 뒀었다. 잘 됐다. 오늘 한 장 턴다. 그런데… 어?!


“상희야, 내 지갑 못 봤어?”

“지갑? 왜? 가방 안에 잘 찾아 봐.”

“어! 어…”

 

선경은 이미 가방 속을 뒤지며 상희에게 묻고 있었다. 얌전한 행사용 가방은 그 크기도 작다. 선경이 항상 지갑만 한 가방이라고 스스로 자조하던 가방이다.


“어?!!”

“설마! 어디 두고 왔나? 떨어졌나? 잘 찾아봐.”

“왜 무슨 지갑인데? 비싼 거야?”

“아니요. 그거 PD님도 아는 거요. 3단 갈색 가죽 지갑.”

“갈색 가죽? 변기 그거?”

“네, 쟤 거 아직 그거예요. 너 저기, 거기, 은행에 두고 온 거 아니야?”

“몰라. 기억이 안 나.”

 

한 치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듯 한치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선경은 기억을 쥐어짰다. 하루도, 반나절도 아닌 불과 한 시간 전 기억들이 전부 불분명하다. 신부의 가방순이였던 가영의 사촌동생에게 축의금을 건넬 때 현금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닌가? 그랬던 것 같다. 모르겠다. 신부대기실로 빨리 가고 싶었던 건 확실한데. 봉투를 누가 줘서 거기에 급하게 이름을 적었다. 이건 확실하다. 현금을 어떻게 가지고 있다가 넣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냥 축의금을 줬다는 것만 기억난다. 지갑은 모르겠다. 우와, 정말 지갑을 제일 모르겠다.


“일단 여기 직원 한데 말을 해야지. 그런데 그러면 선경이 너 그 옛날 지갑을 아직도 들고 다니는 거야?”

“네, 맞아요. PD님 선경이 진짜 징하죠.”

“정말? 그거 너 변기에 빠졌던 그거를? 그때 그러고서 안 바꿨어?”

“네? 네… 그 지갑이요. 당연히 안 바꿨죠. 아 진짜 어디 있는 거지? 큰일 났네.”


PD님이 말하는 그 지갑. 지금 잃어버린 그 지갑. 온갖 신용, 체크카드 쿠폰, 기타 등등 영수증으로 뚱뚱한 3단 갈색 가죽 지갑은 전전 남자 친구가 사준 것이다. 사귀고 6개월쯤 되어 받은 선경의 생일선물이었다. 6개월 동안 그 남자의 물건 고르는 안목을 파악했던 선경은 필요한 것으로 자신의 생일 선물을 직접 골랐다. 가격과 상관없이 그가 사 들고 올 선물을 좋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 문방구에서 구매한 찍찍이 천지갑을 사용하던 선경은 평소 찜 해두었던 이태원의 가죽 공방으로 향했다. 반질반질한 브랜드 지갑은 관심 없었다. 어딘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색의, 아주 튀지 않으면서도 흔하지 않은 지갑이 갖고 싶었다. 그 남자에게 그냥 지갑이 갖고 싶다고 말했다면 유행하던 패션지에 나오는 ‘이달의 편집자 Pick’ 페이지의 제품 중 아무거나 하나를 사 올 게 뻔했다.


“너도 참 유난이다.”

“뭐가? 뭐가 유난인데?”

“지갑 하나 사는데 이태원 골목골목까지 들어와야 되는 거니? 이게 맞는 거니?”

“아, 됐어. 오빠가 내가 갖고 싶은 거 말해달라면서. 오빠야 말로 이제 와서 왜 그러는데?”

“됐고. 너 이거 선물 사준 거 이건 잃어버리면 안 된다. 너 이거 잃어버리면 오빠가 헤어지자고 할 거야.”

“와, 뭐야? 머 선물 하나 해주면서 협박이야?”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리고 이 협박은 제대로 먹혔다. 선경은 그동안 오빠가 맘대로 사준 귀걸이며 목걸이, 헤어핀은 참 잘도 잃어버렸지만 이 지갑만큼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았다. 물론 잃어버릴 뻔한 적은 있었다.


숙대입구에서 신세계 백화점 본점으로 향하는 버스 안이었다. 선경이 외부 업체 미팅 후 회사에 필요한 비품 구입을 핑계로 오랜만에 남대문 시장으로 향한 날이었다. 주차가 마땅치 않을 것이라 판단되어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마침 햇볕이 좋아 버스에서 신나게 졸았다. 창문에 머리를 콩, 콩 박으며 졸다가 “이번 정류장은 남대문 시장, 회현역…” 녹음된 친절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쫓기든 후다닥 버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깨달았다.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저 버스에 두고 내렸어!’ 당시에 지갑을 바지 엉덩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엉덩이가 가벼웠던 것이다. 갑자기 갈증이 났다.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갈증은 심해져만 갔다. 빠른 판단을 내렸고 달렸다.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차가 엄청 막히고 있었다. 평소 이동할 땐 이 차량 정체가 엄청난 ‘헬’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엔 엄청난 ‘복’이었다. 선경은 방금 내린 버스의 다음 정류장을 알고 있었다. 그 정류장은 버스가 회차하는 곳이라 다른 정류장에 비해 버스가 오래 머물 엇이다. 그러니 차까지 막히는 지금 충분히 승산이 있다. 차만큼 인도 위엔 사람도 많았다. 요리조리 그들과 안 부딪치게 피해 가며 버스를 쫓았다. 선경 스스로가 생각해도 대단한 집념이었다. 그러나 버스는 버스, 선경은 사람. 거의 따라잡았다 환호한 순간 격차가 급격히 벌어졌다. 그러나 또 회차는 회차. 예상했던 정류장에 멈춘 버스는 선경이 도착할 때까지 출발하지 않았다. 선경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이밀고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소리쳤다. 버스 운전사님께.


“제가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어, 여깄다! 고맙습니다!”

 

지갑은 아무도 안 건드렸는지 선경이 앉아 있던 의자 오른 엉덩이 위치 그 자리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렇게 지갑을 지켜낸 선경은 이걸 사 준 남자와 헤어지면서도 지갑을 지켜냈다. 남자는 이별을 고하면서 꽤나 치사하게 나왔는데 자기가 사준 것을 다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선경은 그나마 잃어버리지 않았던 귀걸이 몇 개를 던져줬다. 그리고 지갑은 잃어버렸다고 고했다. 평소 물건을 잘 잃어버린 선경이 불만이었던 남자는 이걸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렇게 좀 살지 말라는 충고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했다.

선경은 남자가 신고 가는 축구화를 빤히 노려봤다. 저 축구화, 선경이 사준 것이었다. 선경은 생각했다. ‘어차피 신던 거고 돌려받아도 내 발에 안 맞을 테니 아무 말 말아야지.’ 남자가 메고 가는 가방도, 입고 있는 셔츠도 선경이 사준 거였다. 디자인도 선경 취향이 아니고 냄새도 선경 취향이 아닌 향수가 잔뜩 배어 있다. 돌려준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는 받아낼 생각만 있을 뿐 토해낼 생각은 아니 보였다.


잃어버릴 뻔 한적 말고 진짜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날은 주말이었고 집 근처에서 상희를 만났다. 홍PD의 회사에서 선경은 막 퇴사를 하고 상희는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PD님이 나도 다른데 빨리 알아보래. 나 때문에 회사 문 못 닫는 거라고.”

“진짜?”

“응. PD님 지금 회사 정리하면 다시 DJ엔터로 돌아갈 건가 봐. 거기 엄청 괴롭힐 텐데 걱정이야.”

“와, PD님 진짜 어렵게 버틴 건데 너무 안타깝다.”

“그렇지… 그나저나 PD님한테 오늘 너 만난다고 하니까 꼭 선경이 새 지갑도 알아보래. 꼭! 꼭!”

“푸하하하하, 구라치고 있네.”

“진짜야. 톡 해볼래?”

 

선경이 홍PD의 회사에서 퇴사하는 송별회 자리였다. 마지막 날이었고, 그래서 섭섭하고 헛헛하고 헤어짐이 못내 아쉬웠던 날이었다.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시고 스스로 더 따라 마셨다. 지금까지 이런 회사가 없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형식적인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주는 일은 적었다.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쉬운 게 하나 없는 대신 성취감만큼은 월등히 높았다. 나름 업계에서 좋은 평가도 듣고 있어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때마다 어깨도 으쓱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여느 대기업에게는 튀어나온 못 같은 회사가 되어갔다. 뭐,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괜찮은게 그게 그런게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망치를 휘두르는 놈들이 제일 나빠! 못 그렇게 다 때려 박으면 지들은 뭐 할 건데? 결국 맨바닥 뿌시는 거라고! 이게 다!”

 

결국 취한 선경은 주사를 부렸다. 화장실 변기 앞에 앉아서. 변기 속 물에 손을 집어넣고 말이다.


“야! 이 녀석! 이거 변기물에 손 처박고 뭐 하냐?!”

 

상희의 SOS에 여자 화장실임에도 불구하고 홍PD가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선경이 터진 입이라고 주절거리면서도 변기에서 손을 죽어도 안 뺏기 때문이다. 속에 빠진 지갑 때문이었다. 선경은 지갑 없인 안 나간다고 꼼짝을 안 했고 결국 홍PD가 직접 나서 손을 더 깊숙이 넣어 그 지갑을 빼냈다. 선경은 이 회사의 마지막을 이런 주사로 마무리할 순 없었기에 퇴사를 했음에도 몇 번을 더 예전 회사에 방문했다. 한 번으로는 덮기 힘든 마지막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갑은 맑은 물에 몇 번 담갔다 빼내어 잘 말려 계속 쓰는 중이고.


“너 그때 PD님 사모님이 PD님 옷 다 젖었다고 엄청 놀랬던 거 알지? 냄새에도 더 놀라고.”

“알지. 잘 알지… 어? 잠깐만, 우리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왜 왔지?”

 

선경은 무슨 큰일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아빠는 정말 전화를 잘 안 한다. 할 말이 있으면 무조건 톡으로 하는 분이다.


“여보세요? 아빠 왜? 뭐? 지갑? 뭔 소리야? 지갑이 왜?”

 

아빠는 갑자기 무슨 장난을 치고 싶은 건지… 선경은 정말 뜬금없었다.


“아빠 그게 무슨 소리야? 지갑 당연히 나한테 있지. 지갑이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나왔겠어.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선경은 아빠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듯 대답하며 자신의 지갑을 찾았다. 일단 눈에 보이는 지금 앉아 있는 카페 테이블 위엔 없었다. 그러면 가방 안에 있겠지 싶어 가방 안을 뒤졌다. 없었다. 그러면 겉옷 호주머니 안에 있겠지. 없었다. 그러면… 바지 호주머니 안에 있겠지. 없었다. 어라? 지갑이 진짜 없었다.


“아빠! 진짜야? 진짜 지갑을 누가 들고 왔어?”

----- “아, 그렇다니까.”

“우와, 대박! 진짜?”

 

아빠 말은 이랬다. 혼자 집에 있었는데 웬 아줌마가 ‘장선경’씨 댁이 맞냐며 찾아왔다는 것이다. 자신은 요 옆동에 산다면서. 아빠는 참 희한하면서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문을 열어줬고 그 아줌마는 선경의 지갑을 아빠에게 보여주었다. 이 집 사는 분 물건이 맞냐고. 따님 지갑 같다고. 버스에서 주웠다면서.


“아니 그 아줌마가 우리 집을 어떻게 알았데?”

----- “어떻게 알긴! 지갑 속에 네 신분증 보고 알았지. 너 진짜 다행인 줄 알아. 좋은 분 만나서 지갑 찾은 거지. 안 그랬으면 벌써 네 지갑 누가 들고 가서 신분 위조하고 네 민증 도용하고 딴 나라에서 그걸로 보이스피싱하고 그러는 거야. 네 신용카드는 막 한도초과 긁히고 그러는 거라고.”

“아, 아빠 알았어, 알았어. 그만해, 그만해.”

 

사고가 난 줄도 몰랐는데 해결이 됐다. 이 분실 사고를 아빠가 몰랐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걸 빌미 삼은 아빠의 잔소리가 며칠 가겠지. 어찌 됐든 참으로 대단한 지갑이다. 선경은 지갑의 소중함을 느끼며 현실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다.


“상희야, 나 오늘 먹은 것 좀 사주라.”

“뭐?”

“그리고 집에 갈 돈도 좀… 집에 갈 차비도 없어.”

“뭐?”

 

선경은 새로운 회사를 알아봐야 할 친구에게 밥도 얻어먹고 차도 얻어 탔다.


그때는 지갑을 찾고 나서야 잃어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다르다. 지갑을 잃어버린 걸 잃어버렸을 때 알았다. 지갑이 안 보이면 최소 어디에 있는 줄은 알았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뭔가 느낌이 안 좋다.


“이거 어떡하지? 나는 이제 가봐야 되겠는데 미안하다.”

 

홍PD가 지갑을 분실한 선경을 두고 미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PD님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PD님이 미안해하세요. 그러면 제가 안 미안해지다가 미안해지잖아요. 진짜 이건 너무 복잡하다구요.”

“하하하, 그런가? 여기 직원분한테는 말해놨으니까 찾으면 나올 거야. 너무 걱정하진 말고.”

“네네, 고맙습니다. 먼저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상희는 애 낳으면 꼭 우리 회사로 이력서 한 번 넣어주고.”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꼭 연락드릴게요.”

 

홍PD는 선경 보라는 듯 있던 자리 의자까지 테이블에 쏙 밀어 넣고 사용했던 휴지 한 장까지 싹 다 정리하고 떠났다.


“너도 저런 건 좀 보고 배우란 말이야. 어디 일어날 때 뭐 흘리고 간 건 없나 살펴보라고.”

“…”

“카드 정지는 시켰어? 그것부터 해야 돼. 카드사에 전화해 빨리.”

“상희야, 나 은행에 좀 가볼게.”

“진짜?”

“어!”

“그럼 운동화 빌려줄까? 그런데 밥은?”

“아 몰라.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아. 운동화는 됐어. 너 신고 왔다 갔다 해야지. 여기 스테이크 맛있잖아. 벌써 줄이 길다.”

“아니 꼭 가야겠다면 가야겠지만 그게 은행에 있었다고 해도 아직 그대로 있을지도 모르고, 물론 그대로 있으면 제일 좋지만 또 이동하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 사이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빨리 가 보는 게 나을까?”

“응. 밑져야 본전이지.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 다녀온다! 가방, 내 가방 좀 갖고 있어!”

 

선경은 방금 전 내려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확실히 높은 굽 구두는 내리막길엔 최악이다. 속도를 내려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 그대로 고꾸라 질 것 같다. 마음만 급하고 속도는 그만큼 낼 수 없었다.


사실 아까부터 속으로는 새 지갑 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넓디넓은 무한의 인터넷 쇼핑몰에서 위시리스트에 찜 해 둔 지갑이 없는 게 아니었다. 좀 많았다. 이제 취향의 폭도 넓어져 위시리스트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내추럴한 스타일의 지갑부터 반질반질한 브랜드 지갑, 약간 넘볼 수 있는 가격대의 몇몇 명품 지갑,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해주는 찍찍이 천지갑까지 다양하게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지갑을 간단하게 결정하고 싶진 않았다. 지난 지갑과의 인연부터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어떤 인연은 노력이다. 만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찾을 수 없다면 그 지갑과의 인연은 정말 여기까지 인거다.


다 내려가니 10차선 신호등이다. 아까와는 달리 선경이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초록불로 바뀐다. 선경은 다시 생각했다. 그래 인연은 노력이다. 높은 굽 구두를 신고 전력질주 했다. 혹시 모를 일이다. 길을 건너 우리 은행 ATM기까지 한 달음에 도착했다. 숨이 차고 발바닥이 아팠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갑만! 지갑만 보이기를 바랐다.


선경은 기도했다. 종교는 없지만 기도했다. 만일 선경이 정말 거기에 지갑을 두고 왔는데 누군가 나쁜 마음을 품고 가져갔다면, 진짜 그랬다면 그가 남자라면 발기불능이 되기를 빌었고 그가 여자라면 피부가 싹 뒤집어지기를 빌었다. 남자고 여자고를 떠나서 그걸 가져간 자가 있다면 매일 3kg씩 걷잡을 수 없이 살이 찌기를 빌었고 그 자가 열흘의 변비와 열흘의 설사를 번갈아가며 하기를 빌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비열하고 유치했지만 저절로 빌어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최악의 결과. ATM기가 있던 그곳 어디에도 자신의 뚱뚱한 갈색 가죽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진심으로,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 자가 섹스하다 똥 싸게 해 주세요! 엄청 많이 싸게 해 주세요.”

 

“야,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아까는 되게 빨리 오더만.”

“…”

“뭐 마실래? 맥주 줄까?”

“아, 아니야. 나 지금 술 마실 기분이 아니야. 지금 기분이 완전 썩었어.”

“왜?”

“왜는, 그걸 몰라서 묻냐? 지갑 못 찾았단 말이야. 은행에도 없더라고. 씨씨카메라 보자고 전화할걸 그랬나? 무슨 보안업체 연락처 같은 거 있던데.”

“아니야, 됐어. 네 지갑 은행에 없어.”

“그래, 은행에 없었다니까.”

“그게 아니라 네 지갑이 은행에 없다고. 애가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그래, 은행에 없다고… 엥?! 지갑 뭐 여기 있어? 설마 여기 어디 있었던 거야?”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뭐야? 뭘 알아듣게 말을 해 줘야지.”

 

기분이 썩어 잔뜩 시무룩했던 선경이었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런데 지갑이 없다. 지갑이 없어 집에 갈 돈도 없으니 어떻게든 상희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이럴 때 집에 갈 차비 빌릴 친구라도 가까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기분이 너무 허했다. 그런데 왜 친구는 이렇게 알 수 없는 소리만 할까.


“그러니까 핸드폰은 왜 안 가져가?”

“그거야 들고 다니면 잃어버릴 까 봐 그랬지. 가방에 있잖아.”

“그럼 가방을 좀 챙겨서 다녀. 오늘은 큰 것도 안 메고 나왔잖아.”

“뭐 여기 코 앞에 잠깐 가는데 뭐 하러 그걸 거추장스럽게 들고 왔다 갔다 하냐. 귀찮게 스리.”

“너한테 전화가 왔었으니까 그렇지.”

“전화? 무슨 전화?”

“너 다시 나가자마자 얼마 안 있어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더라고.”

“모르는 번호면 안 받으면 되지. 너 설마 받았어? 왜 받았어?”

“아, 몰라. 그냥 느낌이 이상하게 그렇더라고. 벨소리부터 귀에 짝 붙었어. 가방 안에 있는데도 너무 잘 들리는 게 저장된 번호가 아닌데도 받고 싶어 지더라고. 그래서 네 폰인데 그냥 받았어.”

“그래서? 뭐래? 나 납치됐데? 내 몸값은 얼마래?”

“무슨 네 몸값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상한 보이스 피싱 같은 거 아니었어. 네 지갑 맡아 놨데. 건물 경비 보시는 분인데 네 지갑 거기 있다고 전화한 거라더라. 혹시나 걱정할까 봐 걱정하지 말라고.”

“뭐? 그럼 안 되는데.”

“뭐가 안돼? 그 아저씨 말로는 어떤 여사님이 네 지갑을 찾았는데 뒤져보기도 좀 그래서 그냥 자기는 열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경비실로 가져왔다는 거야.”

“그래서, 내 연락처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뭘 어떻게 알았겠냐, 그 아저씨도 가져왔다는 여사님이 열어보지도 않았다니까 그냥 두고 월요일에 건물 내에 방송하고 분실물 안내장이나 붙이려고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열어 봤다는 거지. 그래서 열어 보니까 네 명함이 나왔다는 거야. 신분증에 있는 이름이랑 같은 명함이 여러 장 나왔으니까 지갑 주인인 줄 안 거고. 거기다 회사가 그 건물 내에 있는 회사는 아니니까 월요일에 거기로 출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드니 걱정이 됐데.”

“어, 좋은 사람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뭘 그러면 안 된데? 그래서 명함 보고 전화 한 거래. 지갑 맡아 놓고 있다고. 찾아가라고.”

“맙소사, 너무 좋은 사람!”

“그래서 내가 말했지. 우리가 지금 결혼식장에 있다. 여기 식사도 하면서 신랑신부 인사도 하고 그러면 시간이 걸릴 텐데 좀 천천히 가도 되겠느냐, 그랬더니 걱정 말고 천천히 오래. 만약에 도착했는데 데스크에 아무도 없으면 부재중 보드 보고 연락하면 된다고.”

“이런, 상희야 너 종교 없는 기도 어떻게 생각해? 별 소용없겠지?”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종교 없는 기도가 왜? 그런 기도는 뭔데?”

“아니 내가 뭘 간절히, 아주 간절히 빌었거든. 혹시라도 그게 아주 약간의 효험이 있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뭘 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도는 네가 했으면 개꿈 같은 기도겠지. 됐지? 개꿈. 네가 잘 꾸는 거, 개꿈.”

“아, 개꿈…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약간 안심이 된다.”

 

선경은 그제야 작은 병맥주를 잡았다. 산미구엘이었다. 강남의 아름다운 예식장이 준비한 맥주답게 병 표면에 살얼음이 살짝 덮여 있는 게 딱 마시기 좋게 차가웠다.


“와, 이제 좀 살겠다.”

 

선경의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어 있던 승모근에 힘이 풀렸다. 어깨가 가벼워지면서 허기도 밀려왔다. 다행히 역시 강남의 아름다운 예식장답게 뷔페엔 아직도 먹을 게 많다. 신부 가영이도 곧 신랑과 함께 한 바퀴 돌며 인사하러 내려올 예정이라고 한다. 선경은 그전에 제대로 식사를 해야겠다.


“자, 너의 웃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줄게. 저기 봐봐, 권팀장 저 인간이 왔어.”

“미친, 진짜? 와 저 인간, 지가 가영이한테 꼰대짓한걸 생각하면 축의금만 왕창 보내고 나타나진 말았어야지. 진짜 뻔뻔하다, 개뻔뻔해.”

“저 인간 꼴에 여친도 데려 왔어, 봐봐.”

“대박! 저 여친 아직도 만나네. 유유상종이라더니 저 여친은 여전히 개많이 먹는다.”

 

권팀장, 홍PD 밑에서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 안달이 나 있던 인간이었다. 홍PD가 운영하던 소규모 회사에 사람이 적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 전부가 잘 맞는 건 아니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그 회사에서 권팀장 저 인간이 또라이였다. 최소 선경과 상희는 그랬다.


“아이고, 선경씨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내지?”

“네? 네.”

“나도 뭐 그럭저럭 잘 지내. 요새 경기도 안 좋은데 선경씨네 회사는 어때, 괜찮아? 알잖아 내 인맥, 내가 그런 쪽으로 빠삭한 거. 선경씨네 회사도 여러 가지 들리는 말이 많던데.”

“뭐하러 물어보세요. 인맥으로 이미 아신다면서요.”

“에이, 크로스체크. 크로스체크 몰라? 그나저나 여기 식장은 좀 좁다. 이러면 하객 많이 오는 결혼식은 못 하겠는데, 안 그래? 식도 우아한 느낌이 부족하고 말이야.”

“아, 그러면 권팀장님은 여기서 하지 마세요.”

“선경씨, 사람이 더 팍팍해졌다. 선경씨는 지금 사귀는 사람도 없다면서 정말 어떡하려고 그래? 그러다 아무도 못 만나. 여기 우리 상희씨처럼 떡하니 임신도 하고 집에서 남편이 주는 월급으로 살림도 해보고 그래야지. 안 그래? 응? 안 그래, 상희씨?”

 

접시에 코를 박고 방어회에 크림 스파게티를 먹던 상희가 고개를 들었다.

 

“아, 안 그래요. 저 결혼 안 하고 임신만 했어요. 애아빠는 연락도 안 돼요.”

“… 아니, 이 사람들 그대로구나. 아직도 이렇게 짓궂다. 무슨 농담들을 그렇게 해? 하하하하하.”

“응? 농담 아닌데.”

“… 선경씨 그러지 말고 빨리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 그런 거 있잖아. 소울메이트 그런 거. 그런 영혼의 단짝을 만나야 인생이 완성되는 거라고.”

“아…“


선경은 잠시 말 없는 감상에 빠졌다. 그리고 입을 뗐다.


“소울메이트. 저 있어요, 소울메이트.”

“뭐?”

“있다고요, 완전 집착 쩌는 소울메이트. 사람이 아닌 게 좀 그렇긴 한데 아무튼 있어요.”

“그게 뭐야? 어디? 선경씨 개 키워?”

“아니요. 그게 생명체가 아니에요. 아, 권팀장님은 말해줘도 몰라요.”

 

접시를 비운 상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경도 따라 일어났다. 둘 다 가방을 들고 있었다.


“왜, 가? 벌써 가려고?”

“아니요. 테이블을 옮기려고요. 권팀장님은 이 자리에서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권팀장은 뭐가 아쉬웠나 보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렸고 그의 여자 친구는 눈인사 한 번 건네지 않고 먹기만 했다. 선경과 상희의 자리는 뷔페와 가까운 꽤 괜찮은 자리였지만 권팀장과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와 가까이 앉아야 할 만큼 가치가 있진 않았다. 그리고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아 똥! 선경은 갑자기 똥 생각이 났다.


“상희야.”

“왜?”

“내 기도, 내 개꿈 같은 기도 말이야. 권팀장한테 해도 될까?”

“뭔데? 무슨 기도를 어떻게 했는데? 내용을 알아야지.”

“아, 내용은 좀 거시기해. 아무리 너래도 너는 태교해야 하니까. 아무튼 내 기도를 권팀장한테 보내야겠다. 이게 아까 너무 간절히 빌어서 나도 주워 담는 게 폼이 안 나니까 그 대상을 바꿔야겠어.”

“그거야 네 맘이지, 뭐. 맘대로 해라.”

 

선경은 아까 빌었던 기도를 그에게 옮기기 위해 간절함을 한껏 담은 시선을 권팀장에게 보냈다. 그가 선경과 눈이 마주치더니 느끼하게 웃으며 여자 친구 모르게 윙크를 한다. 선경은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기도를 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 저 인간이 이렇게 쓸모가 있을 때도 있구나. 역시 사람은 좀 오래 볼 필요는 있나 보다.

 

“왜 자꾸 저쪽을 봐? 그만 봐.”

“어, 다 봤어, 크크.”

“선경아, 너의 소울메이트는 언제 찾으러 갈 거야?”

“소울메이트? 아, 그 소울메이트?”

“그래, 집착 쩌는 그 소울메이트. 네 지갑.”

“그거야 가영이 보고 가야지. 오늘 가영이 너무 예쁘다, 그렇지? 그리고 거기 건물 가는 길에 편의점이 있었는지도 봐야 돼.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데도 그게 기억이 안 나. 검색해 봐야 돼.”

“그래, 일단 먹고. 검색할 때 하더라도 그건 일단 먹고 천천히 해.”

“그래, 알았어.”

 

밥 되는 걸 먼저 먹고 과일을 먹었다. 선경은 위시리스트에 당분간 아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대로 이미지로만 머물러 있을 지갑들을 생각했다. 걔네랑은 거의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계속 쓰던 지갑을 사용할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괜히 입꼬리가 올라간다. 마음이 막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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