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짓수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방학 Aug 23. 2019

어떻게 너 하고 싶은대로만 하고 사니

워킹대드 주짓떼로2-2편

입사 13년차지만, 아직도 사내 정치에 어두운 나는 어쩌면  ‘모자란 직장인’일 수도 있다. 입사 초기부터 사람들은 빠르게 라인을 탔다. 그리고 사내 조직도 외에 묵시적으로 통용되는 직원 간의 권력 관계도를 입수하느라 열심이었다. 이를  아는 회사 동료의 전언에 따르면,  번의 권력 교체와 그에 따른 숙청과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고 했다. 그것이 정당한 행위인지를 떠나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같았다.

 

나는 변변한 것이 없는 탓이기도 했지만, 학벌이나 지연 어느 것도 관심이 없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없었다. 성인이 되고   일관된 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손으로  벌어먹고 살지?’였다.

 

오래 , 무라카미 류의 글에서 “경제적 독립이 없는 정신적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읽고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책을 샀던  같다.  외의 다른 글들이 부엌, 요리, 여자에 관한 이야기여서 나머지를 열심히 읽지는 않았지만(여자 부분은 열심히 읽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사실 내가 딱히 가난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집이 그렇게 까지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경제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있었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소비 영역이라는  책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흔한 PC방도 다니지 않았고, 옷에도 관심이 없었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한밤의 도로를 질주하는 것과 같은 일탈에도 무심했다.  애늙은이 같았달까. 당시의 고등학교 뒷편으로 커다란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 벤치에 앉아서 소설책이나 읽다가 낮잠을 자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마음이  답답해지면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에 가서(5 거리였다) 파도가 치는 모습을 구경하고 돌아오곤 했다.  정도에 그리 많은 돈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독립을 하려면 우선 주거를 해결해야 했는데, 대학을 들어오면서 올라온 서울의 집값은 만만치가 않았다. 전투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해도 주거 비용을 대고 나면 남는  별로 없어서 실망할 때가 많았다. 경제적 독립을 꿈꾸었지만 현실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용돈을 보내달라는 말을 꺼내야 했었다.  

 

 

**

 

일본 문학을 전공한 탓에 배운  도둑질이라고 3,4학년쯤 되어서는 번역 일도 조금 했는데, 수입이 괜찮았다. 정확한 시세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호프집 같은 곳에서 맥주를 나르는 것보다 육체적으로  고되었고, 단가도 괜찮았으며, 무엇보다 일하는 시간이 자유로웠다. 마감일은 정해져 있었지만,  안에 결과물을 전달하기만 하면,  사이의 시간은  마음대로   있었다. 자유 시간에 뭔가 대단히 눈에 띄는 일을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했던 번역 일이 ‘불화 복원에 필요한 미술 회화적 기법’과 관련된 논문을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논문 하나  쳐서 70만원 정도로 조건이 좋았고, 양도 얼마 안되는  같아 수락을 했다가 된통 혼이 났다. 일단, 모든 용어가 낯설었다. 색깔, 회화 기법, 그림 도구, 불교 용어까지 한글로도 까막눈인 내가 일본어로   읽자니 진도가  나갔다. 그때만큼은 자유시간이고 뭐고  먹는 시간 빼고 번역에만 매달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마감을 지키자는 생각으로 죽어라 했더니 겨우 마감을 지켰지만, 솔직히 번역의 퀄리티에는 자신이 없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뒤로는 ‘까불지 말자’고 다짐했다.

 

 

**

 

하지만 번역을 했던 경험은 나에게 ‘좀 빡세지만 열심히 하면 굶어죽진 않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만들어 주었다. 전에 했던 일들은 육체 노동이 많았다. 신문  우유 배달업, 여름 해수욕장 음료수 판매업, 호프집을 비롯한 각종 요식업계 서빙  솔직히   이상 하기가 체력적으로 벅찼었다. 게다가 접시라도 깨거나 실수 하면 변상하느라 돈이 깨지고 몸이 아파서 약값으로도 비용을 써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평생은 커녕  년도 먹고 살지 못할  같은 좌절감이 있었다.   

 

번역은 달랐다. 우선 앉아서 번역만 하면 되었는데, 10시간씩 앉아 있어도 좀이 쑤시지 않았다. 그런  재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때만큼은 이것도 아무나 하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로하면 스트레칭  하고  앞에 마실  나갔다가,   먹고 쉬다가 다시 번역을 했다. 하루에 얼마만큼 해야겠다고 정해 놓은 분량이 있어서 그것만 해놓으면 누구에게 잔소리 들을 일도 없었고 뭘해도 자유였다.

 

회사를 이렇게 오래 다녔지만, 지금도 나는 나에게 가장  맞는 일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아직 번역   것들은 종종  손으로 번역을  두기도 한다. 시간이 많지 않아 많은 양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해놓고 나면 뿌듯하다.  세상에 아직 한국어로 되어 있지 않은 책을 내가 한국어로 구현해 놓았다는 자부심, 그리고 다른 누구의 지시도 들을 필요 없이 나만의 작업 방식과 원칙으로 일을 한다는 즐거움이 있다.

 

**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니?”

 

내가 어릴 , 그리고 지금도 종종 듣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 명치가 아프다. 하지만 반대도 참이다. 어떻게  하기 싫은 것만 하고 사나요? 세상에   가지 형태의 일을 어차피 섞어서 하며 살아야 하는 거라면, 하고 싶은 일의 비율이 점차 늘어가는 쪽의 인생이 되어야 하는  아닐까. 내가 살면 살수록 하기 싫은 일의 비율이 늘어간다면 그건 그야말로 살기 싫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오히려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위로를 건네야 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어떻게 하기 싫은 것만 하고 사나요?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살아야죠. “



 피라미드 그냥 안지으면 안됩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부부 싸움의 기술이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