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회초년생 벗의 인터뷰 : 아홉 번째 편지
벗에게
벗. 평소라면 사용하지 않을 말투로 편지를 쓰오. 이제 스물과 서른 중간 즈음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라는 걸 알고 있소.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까르르 웃겠구려.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한 노부부처럼 말할 생각이오. 벗은 이 편지를 그리 가볍게 웃으며 읽어주오. 오늘 밤 벗의 어깨를 누르는 무게와 눈에 매달린 눈물은 내가 가져가리.
귀엽다고 놀려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울보가 어느새 자라 밝은 성격에 웃는 상을 지닌 성인이 되었소. 어느덧 벗이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구려. 일요일 밤이면 다음 날 마찬가지로 출근해야 하는 친언니와 함께 말이 점점 사라진다고 너스레를 부리는 모습을 보니 이젠 직장인인 게 퍽 자연스럽소. 유치원 가기 싫다며 떼를 쓰다가 다녀올 때는 방긋 웃던 벗의 어린 시절과 비슷하구려.
벗이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고 말하던 순간을 기억하오. 유명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회사는 아니지만, 벗이 하고 싶은 일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곳이니 잘 된 일이라 생각했소. 여러 업무를 맡았으나 요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소.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벗이 처음에 오죽 신났을지 짐작이 되오.
첫 출근하는 기분은 어땠소? 마치 음식점에서 맛있는 냄새를 맡으며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기분이었소? 아님 새로 머리를 바꾸고 막 미용실을 나가며 거울을 보는 기분처럼 들뜨지는 않았소? 처음 시작한 사회생활과 동료라는 새로운 관계, 직장인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받는 직업을 갖게 되었소. 벗은 여전히 같은 사람인데 모든 게 변했소. 이제 학교라는 문을 열고 나가 새로운 사회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구려. 발그레한 볼로 씩씩하게 웃으며 인사했을 벗의 얼굴이 떠오르는구려. 정말로 입사했을 당시 벗은 늘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했소.
기쁜 일이었으나 처음은 누구에게나 어렵소. 낯섦에 실수가 자주 생기기 마련이니. 일은 예상과 차이가 있어서 어떻게 할지 몰라 매일 답답했겠구려. 잘 맞던 통계가 동료가 확인할 때는 맞지 않고, 안 되던 기계도 사수가 만지니 금방 해결되었소. 당황함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는 벗의 말에 대신 숨이 턱 하니 막혀 겨우 심호흡하오. 밥도 천천히 먹는 벗은 일하는 속도가 느려 애를 먹기도 했소. 실수와 부족함을 그동안 노력이 부족했던 벗의 탓이라고 생각했겠구려. 좋아하는 일을 멋지게 해내면 더 좋을 텐데 속상함을 감출 수 없었겠소. 벗. 자책하며 얼마나 벗을 혹사시켰기에 함께 일하는 동료가 보상이 없으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충고했겠소.
벗이 반복하던 말이 있었소. ‘잘리는 게 빠를까? 그만두는 게 빠를까?’ 매일 같은 생각을 하며 속 썩이니 벗은 스스로가 미웠겠구려. 그땐 잘하는 게 없는 벗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는 동료들의 말도 고민이었겠소. 자존감은 낮아지고 걱정이 쌓여 마음이 무거운 나날. 어느 날은 솔직하게 팀장님께 말했다고 들었소. 무엇을 잘하는지 모르겠는데 잘한다는 말을 하신다고. 그런 고민을 하는 걸 보니 ‘칭찬이 부족했나 보다.’라고 대답했던 팀장님의 마음을 우린 아직 어려 해석하기 어렵소. 곧 이해하겠거니 기다려보오..
인간관계도 쉬운 건 아니었소. 처음에 많이 웃던 모습이 독이 되어 돌아왔소. 피곤함에 잠시 지친 얼굴에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소.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던 거래처 직원의 말엔 아직도 대신 화가 나오. 은근히 비꼬는 말들을 흘리기엔 벗의 마음이 아직 여려 아파하오. 생채기 난 얼굴로 풀이 죽은 표정을 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누가 좀 알려주오. 무심한 세상에서 도와줄 이 누구 없소.
어디에나 벗과 안 맞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사회는 안 맞는 사람과도 함께 일하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곳이오. 안 친해서 낯을 가리기도 하고, 밥술을 뜨면서도 불편함에 팔이 직각이 되더라고 했소. 말할 때는 특히 조심했고 어색해서 입조차 제대로 뗄 수 없었소. 같은 공간에 있으면 자꾸만 벗은 얼었겠구려.
벗은 본디 사람을 좋아하고 잘 믿소. 구태여 신경 쓰지 않아도 사람들의 좋은 점을 찾고 다가가려는 성격을 지녔소. 사회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사람들은 모두 착할 것이라 판단했소. 하지만 순수한 마음에 때를 묻히는 이들을 조심하시오. 최근에 만난 이처럼 말이오. 앞뒤가 달라 벗에게 부탁을 하면서도 뒤로는 벗과 동료들을 깍아내리는 사람이었소. 그런 행동보다 그이가 보인 뻔뻔함에 벗은 또 아파했구려. 남 탓을 모르는 사람이니 또 사람을 함부로 믿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반성했겠소.
그럼에도 벗은 한결같은 사람이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하는구려. 술을 마시며 약간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속상했던 일을 털어놓곤 하오. 술을 마시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고 벗의 편이 되어 위로해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힘을 내오. 아버지들이 술을 마시며 하루의 무게를 털어내는 줄 알았더니 벗도 점점 어른이 되나 보오.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순식간에 3개월이 지났소. 잘리지도 그만두지도 않았소. 회사로 가는 길이 이젠 낯설지 않고 만나는 동료들의 얼굴이 익숙하겠소. 때때로 화가 치밀고 대체로 다닐 만해졌소. 어느 날은 조금 꾀를 부리기도 하고 나태한 마음을 갖기도 하나 보오. 일해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시험 전날 딴짓을 하는 마음처럼 자꾸만 놀고 싶은가 보구려. 최근엔 즐겨본 드라마에서 처음 일하는 직원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고 했소. 벗의 과거가 떠올라 민망하기도 했겠소.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점이 많기에 벗은 계속 공부하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말이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도록 관련된 분야만큼은 끊임없이 배우고 매진하는구려. 일을 좋아하는 벗의 마음에 당당히 책임지려는 모습에 먼 훗날이 기대되오.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일이라도 실상은 그렇지 않소. 자신의 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들이고 정진하는 이들이 주변엔 아주 많소. 벗은 그런 이들을 보며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시도해보고 있소.
벗을 회사에 보내자 부모님의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희미하게 깨달았소. 삼시 세 끼를 제때 제대로 챙겨 먹기엔 모두 너무 바쁘게 지내니. 벗도 마찬가지 같소. 자꾸만 회사에 놓인 탄산음료와 과자에 손이 가게 된다고 했소. 면을 좋아하는 동료와 함께 밥을 먹으니 덩달아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는구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지내다가 퇴근하면 운동을 해야겠다는 다짐도 백지장처럼 하얗게 사라지나 보오. 피곤으로 곯아떨어지는 모습이 가엾소. 벗. 오랫동안 벗을 보고 싶소. 건강 잘 챙기고 밥도 잘 챙겨 먹으시게.
내일이 없을 듯 놀던 아이가 교복 대신 정장을 입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소. 아직 벗은 많은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지만 시간은 흐르는 중이오. 벗은 아마 계속 같은 사람이나 모든 게 달라질 게 분명하오. 아니 어쩌면 가장 많이 달라질 건 벗일지도 모르겠소. 어릴 땐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 말했지만, 시간이 흐른다면 벗의 바람대로 논리 정연하게 정당한 일에 목소리 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소.
시간은 벗의 겉모습도 모조리 바꿀 것이오. 고운 손에 나이테가 새겨지고 내 몸이 내 몸 만치 움직이지 않는 순간도 기어코 찾아오겠구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겸손해지고 어떤 왕도 불로장생을 이루지 못하였소.
나이가 든다고 쉬워지는 건 하나도 없을 듯하오. 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까지 풍파를 겪어야 하고 황혼까지 끔찍이도 인간이 미운 시기도 찾아오겠구려. 부모님의 시간이 그리했고 먼 선조들의 시간도 다르지 않았소. 벗이 손톱으로 손바닥을 누르며 주먹을 꽉 쥐고 버텨야 하는 순간이 오거든 주저 말고 손 잡아달라 뻗어주시오. 함께 잡는 손은 아프지도 않고 부드러우며 따뜻할 테니. 서로를 토닥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씩씩하게 걸어가 보오. 벗의 눈물 대신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밝은 웃음을 더 많이 보며 늙어가리. 둘 중 하나 먼저 떠나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어도 곧 볼 테니 염려 말라며 손 흔들 수 있길. 벗. 오늘도 고생 많았소.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눈 감는 날까지 당신의 벗, 제이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