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2,860m, 오늘의 도착지 고레파니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곳곳에 눈이 얼었다. 숙소에 도착하기 위해 차가운 느낌의 짙은 파란색 집들 사이를 걷는다. 거의 다 왔을 텐데, 가이드가 이제 곧 도착이라고 했는데,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다. 살얼음으로 미끄러워진 돌계단을 걷기 위해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허리를 펴며 롯지 입구 앞에서 바로 선다. 롯지 'Hotel Hill top'은 이름 그대로 마을 꼭대기에 있다. 두 뼘 너비의 좁은 길을 제외하고 마당엔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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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들어서자 손님을 받기에 이른 시간인지 아무도 없다. 밖에 쌓인 눈과 어울리지 않게 내부엔 봄이 찾아왔다. 연한 민트색 페인트칠한 벽 위에 꽃무늬 조명과 조화가 걸려있다. 1층엔 밥을 먹고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있으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장작 난로가 있다. 난로 주변으로 검은 소파가 둘러싼다. 벽 한 켠 게시판엔 각종 여행사 광고지, 히말라야 산맥의 사진, 예전에 머무른 손님이 그린 그림으로 채워졌다.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찾는다. 여행사 광고지에 적힌 익숙한 글자가 유난히 반갑다. 한적한 숙소 구석구석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아, 배고파.”
“아빠도 배고프다.”
시간은 오후 1시가 넘었는데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 아빠는 익숙한 신라면을 고른다. 한국 사람들이 트레킹을 많이 하기 때문에 어떤 식당이든 라면이 있다. 대신 식당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끓여서 각종 야채가 듬뿍 들어간 네팔 전통 음식 느낌이다. 딸의 선택은 네팔식 국수 뚝바이다. 맑은 칼국수 느낌인데, 역시 맛이 천차만별이다. 뜨끈한 국물을 마시고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엔 웅장한 형세가 선명하던 건너편 산이 흰 구름에 잡아 먹힌다. 빠른 속도로 밀려온 구름에 마을 전체가 갇혔다. 햇빛이 비치지 않자 롯지의 온도도 내려간다. 얼음 궁전처럼 방과 화장실 물건에 손이 닿기만 해도 차갑다. 배는 부르고 날씨는 추우니 침낭으로 들어가 롯지에서 주는 이불을 덮는다. 나른한 졸음이 찾아오고 꾸벅꾸벅 눈이 감긴다. 누군가 침대에 접착제로 붙인 듯 꼼짝할 수 없이 몸이 무겁다.
사람들이 하나씩 도착하기 시작한다. 얇은 나무판자로 벽을 나눈 방은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다. 그들의 위치를 소리로 파악할 수 있다. 누군가 밖에서 숙소를 보고 반가워한다. 다음은 방이 있는 2층 계단으로 올라온다. 방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기쁨과 안도의 말을 뱉는다. 첫 번째 손님이라는 이유로 낮말을 엿듣는 새가 되었다. 더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는 딸을 위해 아빠는 잠시 자리를 피해서 1층에 다녀온다.
“아까 만난 한국 분들 오셨네.”
“오, 정말요? 날씨가 저래서 엄청 고생하셨겠네요.”
“응. 완전 무장하고 오셨어. 다들 밖에 추워서 꽁꽁 싸매고 오네.”
고레파니로 올라오던 중 한국인 모녀를 만났었다. 걸음이 빠른 딸들이 먼저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 서로에게 혼자 왔느냐 물었다. 뒤처진 부모님을 떠올리며 함께 웃기도 했다. 한 박자 늦게 따라온 아빠 말로는 따님이 먼저 웃음을 띠고 인사하며 물었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아버님이신가 봐요?”
다시 마주치니 더 반갑고 같은 숙소에 머무는 것만으로 든든하다. 저녁을 먹으며 함께 대화를 나눈다. 아빠는 포카라 관광을 고민하는 두 분께 패러글라이딩을 추천하고 각자의 여행 계획을 공유하며 도움을 받는다. 작은 문제로 아웅다웅 말이 오가던 모녀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랑 안 싸워요?”
“뭐…. 허허허….”
아빠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멋쩍게 웃는다. 딸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자식들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생긴다. 역시 자식과 부모님이 함께 여행하면, 사소한 문제로 다투고 어느새 화해하는 건 다들 비슷한 모양이다. 같은 주제로 한참 이야기가 이어진다.
두 분은 씻으러 떠나고 피곤한 아빠도 먼저 방으로 올라간다. 문 옆 의자에 앉아 혼자 일기를 쓴다. 걸었던 길을 기록하고 롯지에 머무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식당은 빈자리가 눈에 띄지만, 여전히 왁자지껄하다. 가이드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데 술을 곁들이는 분위기는 흡사 회식 같다. 활짝 웃고 대화하며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한다. 술 한 잔도 마시지 않았건만, 그들을 따라 볼에 열이 오른다. 장작이 타오르는 난로 주변은 인기 만점이다. 치열한 눈치 게임의 현장으로 누군가 일어나기 무섭게 채워진다. 큰 목청을 자랑하는 금발의 외국인은 고레파니에서 처음 만난 친구와 열띤 토론을 벌인다.
그 순간 롯지가 암흑으로 변한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놀라기는커녕 다들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롯지 주인 아들로 보이는 직원이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다. 분침이 두 발자국 정도 걸었을 때, 작은 전구가 순서대로 켜진다. 직원은 무심하게 돌아와 식당에 빈 식기를 채운다. 흰 바탕에 붉은색과 회색 체크무늬 식탁보와 롯지의 알록달록한 식기가 아기자기하게 예쁘다. 그가 자리로 다가오길래 일하기 편하도록 살짝 비켜주니 씩 웃는다.
계절은 겨울이고, 창문엔 트리를 장식하는 오색전구가 반짝거린다. 열기에 달아오른 얼굴들을 보니 크리스마스 같은 착각이 든다. 밖은 차디찬 바람이 부는데, 롯지 안은 온기가 훈훈하게 퍼진다. 저녁 8시 15분쯤, 끝날 기미 없는 분위기에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향한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는 다리는 콩콩콩 가볍고 기분도 통통통 튀어 오른다. 날씨는 몹시 매서웠지만, 모두에게 따뜻한 밤으로 기억되길. 산타 할아버지에게 바라는 선물처럼 작은 소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