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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May 29. 2020

아빠, 우리에게 눈은 어떤 의미일까요?

[에세이] 아빠와 딸의 네팔 여행기(12)

3일 차 : 고레파니 -푼힐 전망대 - 고레파니-  데우랄리 - 타다파니


“선혜야, 거기 서 봐.”

“이리 와 봐.”

“사진이 남는 거야.”


아빠가 요란스럽게 부른다. 아빠와 딸이 도착한 이곳은 푼힐 전망대로, 안나푸르나 남봉과 높이가 약 8,000m인 다울라기리, 마차푸차레 등 히말라야 설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사람들은 빼어난 절경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찾아온다. 어둑하던 하늘이 밝아진다. 골짜기 사이를 메운 구름이 불그스름하게 변하고 그 위로 강한 빛을 내뿜으며 둥그런 해가 등장한다. 동트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지만, 해의 본격적인 무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고개를 살짝만 옆으로 돌리면 웅장한 설산을 타고 용암처럼 붉은빛이 흘러내린다. 거기에 표면이 그대로 드러난 바위와 산 그림자가 더해져 다채로운 색을 뽐낸다.



전망대는 사람으로 가득하고 다들 최고의 사진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름다운 일출에 다른 사람이 걸리지 않게 찍으려고 가파른 내리막길 앞으로 다가간다. 설산이 잘 보이는 위치에서 찍으려면 줄을 서 기다려야 한다. 차를 파는 작은 가게와 벤치, 전망대 전체가 북적북적하다. 해는 강렬한 등장을 마쳤고 날은 벌써 밝았는데,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일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 


“점프 사진 찍을래요?”


가이드가 묻는다. 아빠는 무표정으로 말이 없는 딸의 눈치를 본다.


“아… 괜찮아요. 됐어요.”


가이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진짜 안 찍어요?”

“찍어요. 왔는데 점프 사진은 찍어야죠.”


딸이 말한다. 설산을 배경으로 힘껏 뛰어 나는 듯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가 땅에 떨어질 정도로 열심히 뛴다. 아빠는 웅크린 채 높이만 높은 딸의 포즈가 불만족스러운지 팔을 번쩍 들고 두 다리를 넓게 벌려 뛴다. 사진을 찍으며 한바탕 웃으며 소란을 피웠다. 아쉬운 기분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누구나 멋진 풍경을 가장 멋지게 기억하고 싶은 건 당연하니까.



오늘 코스는 걷는 내내 눈을 볼 수 있어서 더 마음에 든다. 눈을 떠올리면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이 자동 재생되기 때문이다.  꼬맹이 시절 살던 빌라 주차장에서 만들던 눈사람, 태백 눈축제에서 친오빠와 온종일 타던 눈썰매, 열여덟 살이 되던 새해 첫날, 부모님과 일출 대신 본 소백산 눈꽃이 머릿속을 스친다. 추워서 빨개진 코를 훌쩍거리며 손으로 쓱 닦고 티끌 없이 웃던 기억들이다.


우리의 트레킹 코스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 3,400Km까지 올라간다. 눈 덮인 언덕을 오르는 좁은 길을 걸으려 사람들은 나란히 줄을 선다. 새하얀 눈밭은 햇빛을 반사해 눈이 부시다. 아이젠을 연결한 신발과 얼어버린 흰 눈이 만나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고도가 높고 경사가 심해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다. 입으로 길게 숨을 뱉는 아빠의 어깨도 끊임없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최선을 다해 눈길에 발 도장을 찍는다. 눈 밟은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들린다. 우리가 두껍게 쌓인 눈길을 걷는 모험가나 전문 산악인이라고 상상한다. 힘들어하는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딸은 한 편의 소설을 쓴다.


엉뚱한 생각을 하며 도착한 언덕 위는 살랑바람이 분다. 사방이 뚫려 시선엔 막힘이 없고, 쨍하게 푸르른 하늘과 하얀 눈의 대비가 청량하다. 지나치게 매혹적인 자태에 이끌려 손끝이 붉게 물들 걸 알면서도 눈을 만진다. 푹신하게 생겨서는 단단한 게 얼음 결정체에 가깝다. 하트 모양으로 눈을 뭉친다. 욕심껏 예쁜 하트를 만들려고 힘을 주다가 눈 뭉치가 산산이 조각났다. 아빠, 가이드, 포터는 딸의 손장난에 피식 웃는다.



다음은 숲 속 내리막길이다. 길을 제외하고 아무도 손대지 않은 청정구역으로 거대한 나무 위로 눈이 쌓였다. 바닥엔 나무의 잎사귀와 잔가지가 콕콕 박혀 삐죽거린다. 나무가 쓰고 눈이 연출한 한 편의 낭만적인 작품이다. 거대한 서사의 판타지 영화나 동화 속 아름다운 삽화에서 볼 법한 경치다. 주인공은 나풀거리고 반짝이는 옷을 입은 요정일까? 당장 빨간 망토가 앞질러 뛰어간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신비로운 작품에서 위기는 눈이 녹고 다시 얼어붙길 반복해서 생긴 미끄러운 빙판길이다. 지금까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도 잘 걷던 포터가 중심을 잃고 넘어진다. 꽁꽁 언 내리막길 앞에서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인다. 키 큰 금발 외국인은 긴 나무 막대를 주위서 지팡이처럼 꼭 쥐고 꼼작도 하지 못한다. 또래로 보이는 중국인은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서 대범하게 눈썰매를 타듯 내려간다. 그들의 타는 속도 몰라주고 산의 경사는 점점 심해지고 더 미끄럽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스틱까지 들었지만, 걸음을 내딛기가 긴장되고 조심스럽다. 산이 익숙한 아빠가 앞장서더니 딸의 팔을 잡는다.


봄엔 꽃이 펴서 완전히 다른 풍경이라고 합니다.

“아빠가 잡아줄게. 걱정 말고 걸어.”


그리고는 혼자서 씩씩하게 걷던 딸을 챙겨줘서 뿌듯한 지 한 마디를 보탠다.


“허허, 아빠가 앞에 설 때도 있네. 여기 와서 처음이야.”


가이드는 경험이 적은 포터에게 아이젠을 양보한다. 그리고 천천히 걸을수록 쉽게 미끄러진다고 말하며 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내려가는 시범을 보여준다. 스케이트처럼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한 번에 후다닥 뛴다. 다른 팀 포터들은 무거운 짐을 멘 채 가이드를 따라 한다. 겨울 산으로 출근하는 그들이기에 가능한 걸까? 그들도 사실 무서운지 뒤에서 외마디 외침이 들린다.



겨우 내려와 평지 옆 계곡에서 잠시 쉬는 중에 그들을 다시 만난다. 조금 전 마주쳤을 때,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신나게 따라 부르며 흥이 넘치더니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장난 같은 인사를 건넨다.


“살았다!”

“우리가 해냈어.”


다 같이 크게 웃는다. 떠나기 전 계곡물에 손을 담근다. 찌릿할 정도로 차갑다. 고개를 들어 내려온 길을 물끄러미 본다. 눈은 무해한 기쁨이고 오래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설렘이다.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제각기 다르겠지만, 딸의 시작은 가족이었다. 부모님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행복한 시간에서 새로운 기쁨을 찾도록 했다. 좋아하는 것을 이어가며 애정 가득한 자신의 세계를 가지도록 도왔다. 그래서 설산 앞에서 뛰는 아빠를 보며 사진 촬영이 좋아졌고, 모두가 칭찬하는 푼힐 전망대보다 아빠와 걸은 빙판길이 더 즐거웠다.


점심을 먹고 다시 걷기 시작한 길엔 이미 눈이 녹아 사라졌다. 산 너머에 위치한 타다파니에 가기 위해 산 하나를 오르내린다. 도착한 마을은 짙은 운해가 덮쳐서 스산한 분위기가 흐른다. 뼈를 파고드는 한기가 느껴지고 숙소 방 안에서 하얀 입김이 나온다. 저녁도 유난히 맛이 없고 와이파이는 사용료를 지불하고도 흐린 날씨 탓에 이용할 수 없다. 불편하고 제멋대로인데도 네팔 히말라야를 좋아할 것 같다. 어차피 우리 영화의 장르는 행복하게 끝날 가족영화니까.


+) 아빠의 말

영상으로 보면 더 멋진 네팔의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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